무대와 객석의 공존 ‘이머시브 시어터’
기존의 공연 방식을 탈피한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er)가 공연계에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관객참여형 공연 또는 관객 몰입형으로 불리는 이머시브 시어터는 관객이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을 넘어 작품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배우들과 함께 상호작용을 하는 공연을 말한다. 이머시브 시어터의 가장 큰 매력은 관객이 능동적인 참여자로 작품의 몰입도와 이해를 높이며 공연을 더욱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머시브 시어터 공연의 대표적 성공작은 2003년 영국에서 초연한 <슬립 노 모어>이다. <슬립 노 모어>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맥베스》를 모티브로 제작한 이머시브 시어터 공연으로 미국 뉴욕의 멕키트릭 호텔 건물 전체를 무대로 이용한다. 관객들은 가면을 쓰고 건물 내 여러 개의 방을 돌아다니며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데 관객은 직접 선택한 배우를 따라 이동하면서 한 인물의 관점으로 작품을 감상할 특별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이런 현장성과 즉흥성을 추구하는 독특한 형식이 관객들에게 시각적 자극과 함께 각기 다른 경험을 선사하면서 <슬립 노 모어>는 색다른 것에 목말라하던 연극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슬립 노 모어>의 흥행은 이머시브 시어터의 대중화로 이어졌다. 영국에서 최장기 공연 중인 <위대한 개츠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그레이트 코멧> 등이 연이어 흥행한 데 이어 최근 브로드웨이의 인기 있는 신작들에 이머시브 요소를 결합한 공연들이 속속 선보여지며 이머시브 시어터는 공연계 주류 형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내에도 이머시브 시어터 공연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관객이 내용을 바꾸는 즉흥극인 <쉬어매드니스>, 장소의 특정성과 증강현실이라는 과학기술을 결합한 <행화탕 장례날>, <위대한 개츠비>, <그레이트 코멧>의 한국 공연이 열리는 등 공연계 이머시브 형식이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쉬어매드니스>는 국내 최초 이머시브 시어터가 도입된 연극으로 2006년 라이선스 초연 이후 현재까지 대학로에서 장기공연 중이다. <쉬어매드니스>는 쉬어매드니스 미용실 위층에 발생한 ‘바이엘 하’의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한 관객이 증인이 되고, 용의자를 유추해 매번 관객들에 의해 내용이 바뀌는 코믹 추리 수사극이다.
지난해 <위대한 개츠비>와 <그레이트 코멧>이 라이선스 공연을 초연하면서 마니아층을 양산 중이다. 두 작품은 탄탄한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는데 <위대한 개츠비>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그레이트 코멧>은 유명 소설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 화려한 미국을 그대로 재현한 다양한 공간에서 관객은 개츠비가 주최하는 파티의 일원이 되어 배우와 직접 소통하며 공연을 즐기게 된다. 반면 <그레이트 코멧>은 19세기 러시아 귀족 살롱처럼 꾸며진 입체적인 무대에서 배우와 관객이 뒤섞인 채 공연을 펼친다. 3인칭 시점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국내 관객이 1인칭의 시선으로 작품에 직접 참여하는 경험은 공연에 대한 몰입과 재미를 안겨주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2019년 제작된 <행화탕 장례날>은 증강현실을 결합한 이머시브 시어터 공연이다. <행화탕 장례날>은 폐업을 앞둔 복합문화예술공간인 ‘행화탕’을 공연 장소로 두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구조를 모티브로 해 ‘1958년 행화동, 목욕탕집 딸과 쌀집 아들의 사랑과 죽음에 얽힌 세 가지 기억’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관객은 입장과 함께 모바일 디지털 기술 증강현실(AR) 장치를 활용하여, 각자 사건의 근거를 찾아가며 선택한 극의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체험과 결론을 경험할 수 있다. 관객 100명의 소규모로 진행된 공연이었지만 증강현실이라는 AR 기술을 이머시브 시어터 공연에 도입한 시도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코로나로 인해 공연계가 장기간 침체되며 관객 참여형 이머시브 시어터 공연도 타격을 입고 있다. 최근에 몇몇 공연들이 재개되고 있지만, 관객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연 형식을 수정하는 등 공연장 감염을 막기 위한 관객과의 거리 두기에 이머시브 시어터 공연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관객몰입 여부가 공연 성공의 주요 요인인 이머시브 시어터 공연은 관객들의 직접 참여를 전제로 공연을 연출하기 때문에 이머시브 요소를 제한하는 것은 단순히 공연의 일부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머시브 시어터 공연 자체의 의미를 잃는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비대면 시대,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관객참여를 위한 새로운 연출법이 제시되고 있다. 해외공연이 불가능한 K-팝 스타들이 가상현실(VR)을 이용해 해외 팬들을 만나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는 뮤지션의 초고화질 퍼포먼스 실사 영상에 CG 특수효과를 더해 생생한 VR 콘텐츠를 모션 체어에 앉아 감상하는 <VR 이머시브 콘서트>가 소개됐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Geffen Playhouse’라는 극단은 온라인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VR을 이용해 마술쇼를 생생하게 표현하거나, 배우와 관객이 온라인에서 상호작용하며 추리극을 완성하기 위해 화상회의 플랫폼인 ‘줌(Zoom)’ 프로그램을 활용하기도 했다.
공간과 시각이 아닌 청각에 중점을 둔 이머시브 공연도 등장했다. 우란문화재단과 다크 필드의 협업으로 제작된 <더블>은 온라인 이머시브 오디오 공연이다. 이에 이머시브 시어터 공연에도 다른 미디어 매체들에 적용 중인 다양한 연출의 시도와 기술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이머시브 시어터 공연에 AR, VR, AI(인공지능) 등의 새로운 과학기술을 도입해 공간적 현실감과 현장의 생동감을 표현할 수 있다면 직접 공연장을 가지 않고도 관객몰입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글 김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