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연출 서충식, 배우 최하윤
우리는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을까? 그의 행동과 말에서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게 정말 그 사람의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렇게 믿을 뿐이다. 그래서 믿음은 힘이 세다. 보이지 않지만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는 사랑에 대한 믿음 뒤에 숨겨진 진실을 다룬 청소년극이다. 서충식 연출과 록산느 역의 배우 최하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글 차예지 사진 김경수(싸우나스튜디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제공
<시라노; 연애조작단>이라는 영화를 기억하는지. 연애에 서툰 사람들을 대신해 그들의 사랑을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에이전시의 이야기 말이다. 여기 쓰인 ‘시라노’라는 이름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Cyrano de Bergerac)라는 실존 인물에서 따왔다. 1600년대 프랑스 사람인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의 모델이 되어 널리 알려졌다. 유달리 큰 코 때문에 외모 콤플렉스가 심했던 그는 사랑하는 여인 ‘록산느’에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다. 록산느가 사랑하는 잘생긴 남자 크리스티앙 대신 연애편지를 써주며 그들 곁에 머물 뿐이다. 크리스티앙의 외면 뒤에 숨은 시라노의 비극적인 사랑을 담은 이 작품이 청소년을 위한 낭만활극이 되었다. 2015년 첫 막을 연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가 그것이다. 공연 연습에 한창인 서충식 연출과 주인공 록산느 역의 배우 최하윤을 만났다.
서충식 국립극단의 소극장 판에서 시작해 백성희장민호극장을 거쳐 작년에는 다양한 도시를 찾았습니다. 이제 다시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이게 됐어요. 공연장의 크기가 변화하며 배우와 현장 연주자의 수까지, 많은 것이 변화했는데요.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고전이 가진 힘은 여전하다는 것. 그리고 예술의 영원한 테마인 ‘사랑’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죠.
최하윤 처음 안동 공연 연습 때부터 지금까지, 록산느는 제 안에서 계속 다른 얼굴로 자라고 있어요. 명동예술극장에서의 공연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선배님들의 공연을 관객으로 만나며 자라온 곳이니까요. 그중에서도 서충식 연출님의 <실수연발>도 정말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 공연의 커튼콜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 만큼요.(최하윤은 휴대폰을 꺼내 2016년 12월 23일에 찍은 <실수연발>의 커튼콜 사진을 보여주었다.) 존경하는 선배님들의 연극을 보며 자라온 제가, 이제는 그 무대 위에서 록산느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을 때가 있어요.
최하윤 청소년 관객은 감정에 정말 솔직해요. 사랑과 상실이라는 감정에도 깊이 공감하죠. 간혹 수줍은 친구들도 있지만 마음에 들면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조용히 앉아 무대를 바라보지만 온몸에서 ‘나는 당신을 좋아한다’는 강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요. 저는 그런 반응을 보면서 무대에 대한 책임감을 더 크게 느끼게 됐어요. 어떤 시기의 경험은 크게 남아 평생 기억되기도 하니까요. 연극을 보고 실망해서 ‘연극은 시시한 거야’라고 생각하면 안 되잖아요.
서충식 연출 입장에서는 그들과 어떻게 소통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겠죠. 청소년들이 쓰는 언어나 생각을 파악하는 일이요. 원작이 고전이기 때문에 고전만이 가진 문학적인 힘이 아주 크지만, 거기에 더해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미션이 있죠. 국립극단을 통해서 중·고등학생 서포터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요.
우리 극에 ‘낭만활극’이라는 소개를 붙였는데요. 서양 배경이기 때문에 펜싱 장면을 넣었거든요. 지금이야 전자장비가 있지만 고전 펜싱에서는, 찌른 사람은 상대를 찌른 줄 잘 모른대요. 찔린 사람이 알지. 그러니까 찔린 사람이 ‘나 찔렸다’하고 인정해야 하는 스포츠인 거죠. 안 찔렸다고 우기면 계속 진행되는 거예요. 청소년 시기에 가질 수 있는 낭만성, 승부의 역동성, 그리고 결과에 승복하는 진정성. 그런 것들을 펜싱이라든지 다양한 연출에 어떻게 녹여낼지를 많이 고민했습니다.
최하윤 록산느를 흔히 주체성이 강조된 캐릭터라고 하는데요. 저는 역설적으로 주체성이라는 단어에 갇히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 단어가 주는 모호함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거든요. 주체성이라는 단어를 잠시 덮어두고 록산느가 처한 상황과 관계에 집중하려고 했고 그 안에서 제 감정에 진실하고자 노력했어요. 장면마다 의미를 덧붙이기보다는 록산느라면 어떻게 반응할지를 따라갔습니다. 그랬더니 록산느는 어떤 해석이 덧붙여지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주체적인 인물이더라고요. 역시 대본을 정공법으로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리고 록산느 위에 배우 최하윤이 선택할 수 있는 장난기 어린 행동들을 살짝 얹어보기도 했고요.
최하윤 질문을 받고서 세 인물의 공통점이 먼저 떠올랐어요. 모두 여성이고, 죽음을 통해 성장한다는 거요. 근데 그 과정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작은아씨들>의 베스와 <붉은머리 안>의 안은 모두 어쩔 수 없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고 결국 죽음을 겪게 되지만, 그 안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남기는 존재들이었죠. 반면에 록산느는 어쩔 수 없는 것을 ‘맞이하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사건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인물이에요. 사랑을 위해 위험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고, 그 안에서 수없이 깨지면서도 끝까지 자신이 받아왔던 사랑과 자기 자신을 놓지 않죠. 그 모든 걸 자기 안에 담고 그다음으로 나아가요. 그런 점이 참 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서충식 열정이 느껴지는 배우요. 이번 극을 통해서 최하윤 배우와 처음 함께 일하게 됐는데, 열정이 엄청나요. 그러다보니 부상도 살짝 입었어요. 그만큼 너무 열심히 하는 배우죠. 모든 배우가 그렇지만 캐릭터에 대한 확신과 믿음도 분명하고요. 록산느처럼 주체적으로 작품에 임하는 것 같아요.
테크닉적으로도 몸을 정말 잘 쓰는 배우예요. 신체적 움직임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정서적으로는 집중력이 상당히 강한데 거기서 빠져나올 때는 또 금방 환기가 되더라고요. 칭찬만 하는 것 같아 민망한데, 보기 드문 배우죠. 크게 코멘트할 부분도 없고요. 물론 그건 제가 게으른 연출이어서 그렇기도 해요.
최하윤 서충식 연출님은 제가 정말 만나고 싶었던 분이에요. <실수연발>이라는 작품도 봤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보면 저는 ‘성공한 덕후’인 거죠. 그리고 배우를 믿고 기다려주시는 분이에요. 배우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게끔. 그렇다고 방관하는 건 아니고요.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주시니까 답답한 부분도 없어요. 오히려 그 기다림이 배우로서는 끝까지 해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극에 함께 출연하는 원빈이라는 배우와 지방 공연을 갔을 때 함께 방을 썼는데, 서충식 연출님이 그 배우의 스승이시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친구에게 나도 저런 선생님 밑에서 연극을 배웠다면 좋았을 텐데, 하며 부럽다는 얘기도 했었죠. 아, 생각해보니 단점이 하나 있긴 합니다. 맛있는 걸 많이 사주셔서 초연 때 살이 4kg이나 쪘어요.(웃음)
최하윤 저는 사실 2025년에 목표가 있었어요. 근데 그걸 벌써 이뤘습니다. 옆돌기하는 배우. 제가 그걸 못했었거든요. 근데 이번 작품 하면서 몸을 쓰는 것에 대한 쾌감을 많이 느꼈어요. 그러면서 옆돌기에 성공했습니다. 다음 목표는 재빠른 다리! 공연하면서 제 다리가 다른 배우들에 비해 좀 느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공연 끝나고 나서 스쿼트를 200개씩 하고 있습니다.
서충식 저는 작품 끝나고 배낭 하나 메고 여행이나 떠났으면 좋겠어요,
서충식 내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은,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게 사랑이 아닐까요.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에서 록산느를 둘러싼 세 명의 남자는 각기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리스티앙은 외모가 뛰어나고, 드 기슈는 귀족 가문의 권력을 가진 인물이죠. 시라노는 영혼, 진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들 각자가 보여주는 사랑을 통해서 청소년들은 내가 앞으로 가져야 할 사랑의 모양은 무엇일까 고민할 거예요. 근데 여기에 정답은 없거든요. 제 개인적으로는 나를 희생하면서도 그것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요.
최하윤 저에게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음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작품을 하면서 록산느에게서 배운 것이기도 해요. 록산느는 수많은 사건을 겪지만 누구도 미워하지 않아요. 크리스티앙도, 시라노도, 드 기슈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요. 모든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다음으로 나아가려고 해요. 멈추지 않고요. 우리는 가끔 누군가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느끼면 사랑하기를 멈추잖아요. 근데 록산느를 만나고 나서는 저도 안 멈추고 싶어졌어요. 계속 그다음을 보고 싶어요.
서충식 그래서 우리 작품의 엔딩에서도 록산느는 멈추지 않고 떠납니다. 다른 누구를 만나는지,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