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원 작가의 방
덤불 속 나뭇잎이 초록과 갈색으로 뒤엉키고, 창에 비친 구름이 푸름과 붉음으로 산란한다. 한국전쟁 중의 애드벌룬과 마스크를 쓴 커플이 흑백사진처럼 중첩되고, 구한말 요절한 작가와 지금을 사는 애니메이터가 한 공간에 마주한다.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사실과 해석 사이에서 하루하루 탐구의 조각을 쌓아 올리는 그림 노동자. 스스로 살아있는 박제가 되기보다, 설사 퇴보할지라도 한 걸음 더 나아가며 우아하게 늙고 싶다는 윤석원 작가를 만났다.
회화 작가 윤석원입니다. 설치 작업도 조금 하지만 서양화 작가로 소개하는 게 적당할 것 같네요. 원래는 경찰대나 육사에 가는 게 꿈이었어요. 임용고시도 본 적 있고요. 그런데 워낙 프라모델을 좋아해서 대학을 디자인학부로 진학했고, 대학원에서 회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했습니다. 미술을 워낙 늦게 시작했고, 입시 위주로 준비해서 대학생 때 그림을 잘 못그렸어요. 잘 그리고 싶은 마음에 화실에 다니고 드로잉 워크숍에도 나가고, 군 복무 땐 미술 동아리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죠. 크로키 북을 들고 엉덩이에 땀이 차도록 앉아 지하철 2호선이 몇 바퀴 돌도록 사람을 그리기도 했고, 찜질방에 있는 사람들을 먼발치서 몰래 그리다 걸려서 그림이 찢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림에 푹 빠져들었고,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엔 ‘기억과 감정의 3부작(미뤄진 것들, 자라나는 것들, 만난 적 없는 것들)’을 주제로 개인전을 준비했어요. 기억을 고정된 것이 아닌 살아있는 유기물로 보고 그러한 기억이 저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탐구했죠.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이어진 작업이었는데, 그때 했던 3번의 개인전이 지금까지 저를 지탱해준, 또는 저를 밀고 나가게 해준 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10년이 넘는 동안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했고, 지금도 꾸준히 작업하고 있어요.
현재는 ‘2021 화성시문화재단 신진작가 공모전 <다다르다>’에 제 작품이 전시 중입니다. 12월 22일까지 동탄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기획전인데, 저와 만욱 작가, 정미정 작가의 작품도 볼 수 있어요. 저는 ‘사람과 사람들’이란 주제로 참여했는데, 2019년에 그린 ‘사람과 사람들 1’과 2021년에 그린 ‘사람과 사람들 2’를 마주 보게 전시했어요. ‘사람과 사람들 1’은 19세기 말부터 2019년 사이에 활동했던 작가들 중 개인사에 흥미가 가는 51명을 그렸고, ‘사람과 사람들 2’는 작가나 기획자, 학예사, 애니메이터 등 시각예술 관계자분들 중 제가 흠모하거나 존경하는 동시대인 51명을 그렸습니다.
사실 제 작업들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10년 전부터 어떤 소재나 재료의 물성으로 규정되는 작가가 되지 말자고 다짐했거든요. 그러한 방식이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쉬운 부분도 있지만 어쩐지 비겁하다고 느꼈어요. 아직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하나의 소재나 기법에 의지하는 건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마른 식물> 연작은 생명 가진 것들의 시작과 끝, 그리고 생의 기간 동안 존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생명들에게 무엇을 빚지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았고, <No Man’s Land>는 한국전쟁 기록물 중 구호나 재건, 의료, 휴전, 군종, 여가 등 비전투활동의 모습을 스크랩해서 이미지를 재가공했어요. <코로나시대의 사랑>에선 제 결혼식 사진에 등장한 인물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거나, 마스크를 쓴 커플이 키스를 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또 최근에 선보인 <차경(借景)>은 휴대폰 카메라로 어떤 장면을 포착하듯 찍어서 그림으로 옮겼는데, 사진에는 표현되지 않은, 제가 느낀 공기나 냄새, 분위기까지 그림에 담으려고 했어요. 사진을 일종의 소스나 씨앗으로 활용한 겁니다.
화면이 흔들리거나 흘러내린 듯한 느낌, 사진의 블러링 효과 같은 기법을 쓰기도 해요. 그림을 그린 후 마르기 전에 붓으로 밀어내는 건데, 화면에 동적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예요. 제가 붓질을 하는 행위 자체가 생동감이나 운동 에너지를 부여한다고도 생각하고요. 또 한 화면에 수평과 수직의 구도, 즉 삶과 죽음이 모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은 <빛과 물질에 관한 연작>입니다. 집이나 골목, 공원 등 일상적인 공간이 어느 순간 빛과 공기, 습도에 따라, 또는 저의 기분에 따라 전혀 달라 보일 때가 있거든요. 그렇게 3~4박자가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연작으로 그리고 있어요. 언뜻 보면 <차경>과 비슷한데, 굳이 차경의 형식이나 스토리를 가져오지 않고도 빛과 물질이 버무려낸 순간을 정서적으로 극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스티브 킹이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뮤즈를 찾으러 돌아다니지 말고, 뮤즈가 몇시에 너희 집에 가면 되는지 알려줘라.” 저에게 작업실은 ‘그림 그리는 노동’을 하는 공간입니다. 작업실에서 저는 그냥 노동자예요. 정한 시간에 와서 목표량을 채우고, 또 정한 시간에 집에 가요. 그렇게 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죠. 완성된 작품을 보면 한번에 다 그렸을 것 같지만 마스킹 테이프로 구획을 나눠서 매일 해야 할 분량을 정하거든요. 그러한 조각들이 하루하루 쌓여서 50호, 100호 되는 그림이 완성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때론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는 시간도 아까워서 배가 고프지 않고, 아무리 작업을 해도 피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업 자체는 사실 힘든 게 하나도 없는데, 배고픔, 졸림 이런 것 때문에 작업을 끊어야 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지난 해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겨서 이젠 며칠씩 작업에 매달릴 순 없지만, 그전엔 일주일치 식량을 사서 아예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트레이닝 복장에 꾀죄죄한 모습으로 마치 세상과 단절된 외딴 행성에 홀로 있는 것처럼요. 그때 느꼈던 기분을 표현한 작품이 2017년에 전시한 <Run Silent, Run Deep>입니다. 우연히 제2차세계대전 때 쓰인 독일 잠수함을 소재로 한 영화 <Das Boot>를 보고 영감을 얻었어요. 음파와 잠망경이라는 제한된 정보에 의존해 심해 생활을 하는 승조원이 외부와 단절된 채 소음, 식량, 안전, 환기, 채광 등 열악한 환경을 견디며 작업을 하는 작가와 많이 닮았다고 느꼈거든요.
저는 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제일 싫어해요. 작가는 반드시 땅에 두 발을 딛고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 1cm만 살짝 발을 띄워서요. 둘러보면 작품의 소재는 바로 우리 곁에, 그리고 우리와 연결된 어떤 시간 속에 항상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작 뉴턴이 한 이 말을 늘 기억합니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작은 난쟁이다’. 그의 천재성은 선인들이 쌓아 올린 지혜와 지식 위에 가능했다는 뜻이죠. 지난 시간과 사람을 탐구하고 겸손하게 배우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에디터 최현주
포토그래퍼 남윤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