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고흐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곳에 가면 고흐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나는 그 희망 하나만으로 지명조차 모르던 작은 고장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고흐의 아주 작은 흔적이 남아 있다면, 화려한 풍광이 없는 곳이라도 그저 좋았다. 네덜란드 준데르트와 누에넨, 벨기에 몽스, 프랑스 생레미 등은 고흐에게 관심을 갖기 전에는 너무도 생소한 장소였다. 그러나 고흐의 흔적을 따라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낯섦은 사라지고 불꽃처럼 살다간 한 예술가의 마음에 가닿게 되었다.
고흐의 고향 준데르트를 찾았을 때, 고흐에 대해 설명해주려 친절하게 다가오는 준데르트 사람들을 만났다. 작은 마을의 이점은 이렇듯 여행자를 조건 없이 반가워해준다는 점이다. “여기까지 찾아온 한국인을 처음 본다”라는 한 할아버지는 고흐하우스의 전문 가이드를 나에게 소개해 주며 “오늘 하루 당신에게만 무료 가이드를 해줄 거에요”라고 말해주었다. 이런 행운이 아주 가끔은 일어난다. 모든 것이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로 이루어지는 대도시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행운이다.
나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준데르트에서 고흐의 유년 시절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구교도로 가득한 준데르트에서 거의 유일한 신교도 집안이었던 고흐네 부모는 타인을 향해 폐쇄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아이들에게 ‘바깥은 무서운 곳, 집안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라는 세계관을 주입했다. 고흐는 그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동생 테오처럼 고분고분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아니었으며, 첫딸 아나처럼 엄마를 꼭 닮은 보수주의자도 아니었다. 고흐는 ‘부모가 주입하는 세계관’ 너머의 일탈을 꿈꾸었다.
지금의 준데르트는 따스하고 인정 많은 마을이지만, 고흐의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폐쇄적인 교육관 때문에 고흐의 형제자매들은 늘 집안에 갇혀 살다시피 했다. 동네 친구들이 별로 없으니 서로가 가장 가까운 친구였으며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부모님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살았다. 고흐 집안의 아이들은 부모와의 정서적인 독립에 커다란 문제를 겪었다. 훗날 어른이 되어 정든 목사관을 떠난 후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며 두려움과 자책감을 공유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이런 문장이 적힌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얼마나 더 어머니와 아버지를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부모님께 별로 쓸모가 없는 존재야.”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던 고흐는 부모님의 기대를 가장 많이 저버리면서도, 부모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싶어 했다. 간절히 신께 기도하고 절실히 부모님의 사랑을 필요로 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가족들과 섞일 수 없다’는 소외감을 천형처럼 짊어지고 살았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동생들에게조차도 고흐는 이해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이럴 때 그의 유일한 친구는 자연이었다. 그는 산과 들을 누비며 홀로 헤맬 때 원기를 되찾고 용기를 내고는 했다.
독특한 화법으로 그림을 그릴 때도 실제 이미지를 주요 모티브로 삼았던 과거와 달리,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절의 고흐는 급격히 환상적인 이미지를 강화했다. 오베르 주변의 풍경을 그릴 때 고흐는 좀 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느낌, ‘이곳에 가면 온 가족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미지를 추구했다. 특히 도비니의 마지막 저택은 고흐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아름다운 저택에서 도비니는 절친한 벗이자 위대한 화가였던 오노레 도미에와 함께 살았다. 온갖 과일나무들과 철철이 피어나는 꽃들로 둘러싸인 저택에서 도비니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친구 오노레 도미에와 함께 화가로서의 마지막 안식을 꿈꾸었다. 안타깝게도 도비니는 언덕 위의 작은 천국 같은 집의 안락함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도비니가 세상을 떠난 뒤 무려 12년이 지난 뒤에도, 도비니의 부인은 저택에 머물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변함없이 검은 옷을 입은 채 집에서 살았던 도비니 부인. 그 모습은 고흐에게 커다란 감명으로 다가왔다. 도비니의 저택이 고흐의 새로운 이상향이 된 것이다. 일반인들도 가끔 그 집에 방문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도비니의 아내 소피 도비니 가르니에의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비니의 저택을 스케치함으로써 ‘오베르로 너희 가족이 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비췄고, 자신이 꿈꾸고 사랑하는 모든 정원의 이미지를 그림 한 폭에 집어넣고자 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외로이 탁자 옆에 서 있는 도비니 부인, 신비롭고 생기발랄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고양이 그리고 그들을 평화롭게 감싸 안은 듯 보이는 정원과 저택의 이미지는 고흐에게 ‘예술가의 집’을 향한 환상을 부추겼다. 고흐가 꿈꾸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이 바로 이 그림 속에 들어 있었다.
밤하늘의 별을 그린 또 하나의 작품 <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 속에는 정신적 고통, 육체적 쇠약과 싸우는 과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고흐의 해맑은 정신의 고투가 드러나 있다.
아를에 도착하자마자 크고 작은 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고갱과의 아슬아슬한 동고동락이 끝난 후, 고흐는 자신이 정말로 미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갱과 다투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도 고갱이 그린 자신의 모습이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자르는 심각한 자해행위를 한 뒤,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급기야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른다. “나는 나 자신에게 부과된 미치광이의 역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 그림은 아를에서 치유되지 못한 고흐가 생 레미의 요양소로 거처를 옮긴 후 나온 작품이다.
아를에서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가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려진 작품이라면, 생 레미에서 그린 밤하늘의 별은 인간의 모습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고 오직 밤하늘과 별만이 서로 싸우듯, 서로 섞이듯 혼란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밤의 카페 테라스>의 별들이 평화로운 모빌의 조각들처럼 밤하늘에서 조용히 흔들린다면, 이 그림의 별들은 격렬하게 소용돌이친다. 발작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점점 육체적 건강에 자신감을 잃어가던 고흐였지만, 밤하늘을 그린 그림에서는 오히려 ‘바로 이것이 나, 고흐다’라는 강렬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그는 더더욱 자기만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집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흐,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그림 중 하나인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다운 모든 요소들이 강렬하게 집약된 작품이다. 고흐는 과연 얼마나 오래, 얼마나 하염없이 별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 것일까. 그는 별을 바라볼 때마다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문학·심리·여행이 어우러진 글을 쓰는 작가이자 칼럼리스트. 저서로는 《끝까지 쓰는 용기》 《그림자 여행》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등이 있다.
글 정여울
사진 이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