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집은 어떤 곳인가요?

화성인의 대답

햇빛이 강하게 내리비치고, 큰 회색 문을 열면 작은 골목들이 있는 곳.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번째 집이다. 그 집에서 처음 딸기를 먹었고 첫 번째 생일 파티를 했다. 집은 생각보다 나와 많은 것을 공유했고 함께 성장했다. 화성인의 추억의 담긴 집이 궁금해 물어보았다.

기억 속의 집은 어떤 곳인가요?

캔디|주부
다시 만난 어린 시절 우리 집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늘 초라했다. 친구가 놀러 오겠다고 하면 얼버무리며 도망치듯 혼자 걸어갔고 친구가 몰래 뒤따라온 것은 아닌지 주변을 의식하기도 했다. 번듯한 이층집의 쪽문을 열고 한 발자국씩 내려가던, 그 계단의 좁고 어두운 통로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비가 무섭게 내린 어느 여름,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안방으로 쳐들어온 빗물을 퍼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긴박한 얼굴을 바라보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음날 아침, 반쯤 가려진 창문 밖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룬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조용하고 푸른 마을에 자리해 있다. 아이들과 4년째 지내면서 나는 결혼 후 처음으로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집을 잠시 떠나야 했다.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 한 통. 내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사업장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이야기. 이틀 후인가 나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조용히 짐을 꾸렸다. 복작복작 아이들과 함께 지내던 우리집과는 달리 격리 병실은 조용하고 텅 비었으며 꽉 닫혀 있었다. 그곳은 처절하게 외로웠다. 삭막하고 답답한 병실. 그곳에서 나는 반지하 그늘에 갇혀 있던 어릴 적 움츠렸던 마음을 다시 만났다. 나는 나 자신을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 언젠간 이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날이 올 거야.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견뎌보자….” 그렇게 많은 날을 견디고 39일째가 되는 날,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내딛은 우리 집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마치 잃어버린 퍼즐을 다시 찾아 맞추는 듯한 기쁨으로 우리집은 그렇게 나를 반겨주었다. 남편은 아이들과 함께 화원에 가서 예쁜 꽃 화분들을 여러 개 사 왔다. 집 안 구석구석 봄 향기가 가득 차는 듯했다. 나는 가만히 입을 열어 말했다. “역시 우리집이 최고야.”

이은아|청소년 진로 교육 강사
손가락 그림 화가가 모여 있던 집

어릴 적, 다락방이 하나 달린 단칸방에 산 적이 있다. 그 흔한 소시지 하나 먹고 싶어도 꾹 참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나와 언니, 동생, 그리고 할머니까지 우리 넷은 한 이불 속에서 등을 붙이고 잤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우리는 서로의 등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주었다. 스윽스윽, 여느 화가 못지않게 제법 잘 그려진다. 토실토실한 살의 느낌도 좋았다. 웃음소리가 자장가 되고 살갗에 와닿는 따스한 온기로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렇게 많은 밤이 지나갔다. 나는 지금, 가족이 방을 하나씩 차지할 만큼 꽤 넉넉한 집에 살고 있다. 부대낄 일도 없고 먹고 싶으면 언제든 사 먹을 수 있는 편리하고 편안한 환경을 갖췄다. 근데 때때로 마음이 허전하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안락한데도 불구하고 그 시절 좁디좁아 서로의 살결이 부대끼던 다락방 단칸방이 생각난다. 그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때의 따스함 가득한 마음만은 꽁꽁 싸매어 다시 가져오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 안을 구석구석 그 온기로 채우고 싶다.

간석영|꽃차소믈리에
장난감이 가득한 다락방 집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오르면 다락방이 보였다. 다락방 계단은 어린 나에겐 오르기 힘들고 오래 있기도 힘든 장소였다. 그런데도 자주 오르락내리락한 이유는 오직 장난감 때문이다. 어린이날 동생에게 선물한 인형의 집부터 바퀴가 여러 개 달린 무선 자동차, 관절 로봇 등 가지고 놀 수 있는 게 무한대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부모님은 나 때문에 장난감을 모두 다락방에 보관해 두신 것 같다. 심하게 놀던 어린 시절, 장난감을 망가트려 생긴 상처가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서해인|강사
지금 살고 있는 만능 집

집순이인 나에게 집은 일터이자, 쉼터이자, 놀이터다. 6년 전 지병으로 투병 생활을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우울하고 답답했지만, 이젠 적응이 되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인터넷으로 봉사 활동도 하고 있다. 거실은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공간이 되기도 하고, 베란다는 독서와 기도하는 공간이 있는 놀이터가 된다. 비록 새집도 아니고 넓고 멋있는 집도 아니지만, 내게는 소중한 쉼터이고 나아가 가족에게도 따스하고 포근한 공간이 되기를 바라고 원한다.

김민정|취업준비생
책상 밑 나만의 집

어릴 때 내 방 책상 밑은 나의 두 번째 집이었다. 책장과 이어진 책상 아래는 작은 몸집의 내가 들어가기엔 안성맞춤이었고 거기에 이불을 뒤집어쓰면 그보다 완벽한 것은 없었다. 그 안에서 만화책을 읽거나 MP3로 노래를 듣는 등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생각해 보니 작디작은 그 공간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취했던 것 같다. 영원히 내 몸에 딱 맞을 것 같던 그 공간이 비좁고 작다고 느껴질 때쯤, 서서히 책상 밑은 내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나에게 ‘나’보다는 ‘우리’라는 단어가 당연해지면서, 점점 나만의 시간은 줄어들었다. 내 마음보다는 남의 마음을 우선시하게 되고, 내 망가진 마음은 홀로 이겨내야 하는 싸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겨울, 모든 것이 풀리지 않는 엉망인 날이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꿋꿋이 괜찮다고, 심지어 나 자신을 속이며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다. 날씨는 얼마나 추운지 모든 것이 얼어 있었고, 걸음을 재촉해 집에 들어간 순간,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때 나는 잊고 있던 나의 두 번째 집이 생각났다.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공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 큰 몸을 구깃구깃 접어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몸은 불편했지만 마음만큼은 정말 편안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 일을 계기로 오롯이 나만을 위한 공간, 그것이 제일 중요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집은 내가 어떤 모습이든지 그대로 묵묵히 존재함을 알게 됐다. 마음의 편안함과 안식,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에디터 김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