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 빠지는 날도 있으니까

주저앉은 사람을 위한 플레이리스트

회사 일과 집안일, 친구, 동료, 가족, 고양이.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내 안의 감정들. 숨 가쁘게 걷다 지쳐 주저앉았다. 멈추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누구나 기운 빠지는 날은 있으니까. 성급히 일어서는 것보다 먼저 호흡을 가다듬는 게 좋다.

BOOK

이 또한 간직하리라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박연준, 달, 2019

ⓒ 달 출판사

“나와 윤 사이에 조그만 웅덩이가 생긴 것 같았다. 웅덩이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다만 둘 사이에 서로 모르는 고단한 일들이 생겨, 웅덩이로 빠져버리는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중략) 나는 그애의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이렇게 오래, 연락이 안 되는 시간이 지속되어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고마운 날도 허무한 날도 있다. 뜨거운 감정에 괴로울 때도, 차게 식은 기분에 외로울 때도. 마음이 뜰 때는 이 책을 들고 산책을 나선다. 나는 지나간 것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덤덤한 말투에서 위로를 얻는다. 떡볶이와 튀김처럼 꼭 붙어 다니던 친구 C가 내 말에 헤매는 표정을 지었을 때, 우리도 참 많이 변했다고 쿨한 척했지만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 기댈 곳은 오직 그뿐이었던 시간이 아득해졌다. 각자의 일상 테두리에 맴돌며 추억을 추억하는 우리는 언젠가 “서로의 삶 바깥으로 밀려나고” 말까. 그렇다면 결국 싱거워지고 말 순간과 관계에 매번 열중할 이유가 없잖아. 불안과 비관을 오가며 속을 앓는 나를 붙드는 건 이런 대목이다. “윤이 보고 싶다. 이렇게 쓰고 나니 눈물이 후드득,다된 이파리처럼 떨어진다.” 한 번 끓어오른 마음은 다 식은 후에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사랑인 채로 남아 있는 기억을 꺼내 껴안아보고 다시 서랍에 넣는다. 이 또한 간직하리라. 덕분에 나는 내일도 솔직하고 뜨거울 수 있다.

MOVIE

엉망인 순간에 들리는 기척
<미스 리틀 선샤인Miss Little Sunshine>, 2006

ⓒ 미스 리틀 선샤인

“괜찮아. 가자.” 

드웨인은 색맹 테스트 게임에서 영 글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적록색맹은 전투기 조종사가 될 수 없다. 꿈을 이루는 날까지 말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던 드웨인은 버스를 박차고 나가며 온 힘을 다해 내질렀다. “망할!!!” 세상을 잃은 듯 좌절한 드웨인의 마음을 건드리는 건 동생 올리브다. 작고 통통한 아이는 저벅저벅 걸어가 오빠 옆에 앉는다. 나는 올리브가 무릎을 굽힐 때부터 드웨인이 곧 일어설 수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우리가 밑바닥에 주저앉은 순간에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작은 기척이다. 우울하고 약해져 있는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 곁에 앉아 잠시 이 우울과 침묵을 함께하는 숨소리, 조심스레 내 어깨를 두드릴 때 몸 안에 울려 퍼지는 토닥토닥 소리. 나는 남매의 가족과 함께 머뭇거리면서 올리브의 용기와 움직임을 바라봤다. 올리브는 무안해지거나 뿌리쳐질지 모른다고 겁먹지 않는다. 그런 용기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드웨인은 올리브의 손을 잡고 버스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뱉은 모진 말을 사과했다. 좁고 낡은 버스에서 서로를 못마땅해하던 가족은 다시 함께 달린다.

MUSIC

무거운 것은 해변에 벗어두고
[Okinawa], 92914, 2018

ⓒ 92914

“I WANT TO STAY BY THE SEA / WATCHING TURN INTO RED
SAT DOWN WITH THE PEOPLE/ LISTEN THROUGH THIS SONG / MOON IS SLOWLY RISING”
“바다 곁에 머물고 싶어 / 붉게 물드는 걸 바라보면서
사람들과 앉아서 / 이 노래를 들었어 / 달이 천천히 떠오르네”

숨 가쁜 하루를 보낸 날, 소파에 누워 이 곡을 크게 틀었다. 분주한 일, 쏟아진 말, 변덕스러운 감정들. 숨을 죽여야 들리는 파도 소리는 속을 어지럽힌 것들을 쓸어낸다. 92914의 음악은 가장 뭉클한 순간의 소리를 채집해 놓은 것처럼 희미하고 아득하다. 그들은 조용한 목소리와 손짓으로 이미지를 만든다.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 드문 시대다. 하물며 기억에 없는 풍경을 상상하게 하는 노래는 더 그렇다. 그러니까 이 곡은 오롯이 혼자인 시간에 듣는다. 상상을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까. 조용히 울리는 기타 소리를 듣는 동안 나는 파도가 되어 어딘가로 밀려갔다. 파도라면 어딘가에 부딪혀도 괜찮으니까, 방향을 확인하고 걱정할 일도 없지. 팔다리를 쭉 뻗고 어깨를 들썩이니 굳은 어깨가 한결 편안해졌다. 몸을 늘릴 때마다 조금은 유연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그 후로는 종종 이 노래를 틀고 바다로 향한다. 고단한 하루를 해변에 벗어놓고 맘껏 헤엄치다 파도가 된다. 다시 해변으로 실려 올 즈음엔 남아 있는 게 없을 테니까,개운하게 맨몸으로 돌아오자.

글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