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둘이, 우리끼리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하는 성격은 아니어서 늘 친구들이 하자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이번만큼은 먼저 손 내밀어볼까?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면 친구들은 이상하지만 재밌다는 듯 내 손을 꽉 잡아주겠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은 걸 보고 나누는 일, 그보다 마음 편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오늘은 친구들 손을 잡고 책방으로, 스크린으로, 미술관으로 성큼 다가가 보기로 한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친구들과 함께라면 두 배로 재미있겠지.
BOOK
“좋아하는 게 하나 생기면 세계는 그 하나보다 더 넓어진다. 그저 덜 휘청거리며 살면 다행이라고 위로하면서 지내다 불현듯 어떤 것에 마음이 가면, 그때부터 일상에 밀도가 생긴다. 납작했던 하루가 포동포동 말랑말랑 입체감을 띤다. 초당옥수수 덕분에 여름을 향한 내 마음의 농도는 더 짙어졌다.”
― 김신회, 《아무튼, 여름》 중에서.
“우리 오늘은 좋아하는 걸 읽어 볼래?” 좋아하는 걸 ‘읽다’니,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친구들과 함께 작은 책방에 간다. 아마 많은 책방에 《아무튼,》 시리즈가 한데 꽂혀 있을 테다. 그렇지 않더라도 ‘아무튼’이라는 글자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 그도 그럴 것이 시리즈가 차곡차곡 쌓여 벌써 30권이 넘었으니까! 《아무튼,》 시리즈는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세 개의 출판사가 모여 펴내는 에세이 시리즈다.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엔 상상했거나 상상하지 못한 소재들이 한껏 담겨 있다. 서재, 게스트하우스, 쇼핑, 망원동, 잡지, 계속, 스웨터, 택시, 스릴러, 방콕, 외국어, 딱따구리, 트위터, 비건, 양말, 식물, 술, 떡볶이…. 누구에게나 ‘좋아한다’고 말할 무엇이 있겠지만 이를 책 한 권에 재미있게 담는 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
친구들과 책방을 서성이며 마음이 닿는 단어에 손을 뻗어 나만의 ‘아무튼, ○○’을 가져 본다. 술을 좋아하는 어떤 이는 김혼비의 《아무튼, 술》로 술에 대한 애정을 새삼 복기하며 깔깔, 떡볶이를 좋아하는 어떤 이는 요조의 《아무튼, 떡볶이》로 떡볶이에 관한 자신만의 에피소드를 새록새록 떠올리며 낄낄. 작고가벼운 이 시리즈를 읽다 보면 좋아하는 게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시간이 얼마나 더 근사해지는지 알게된다. 늘 좋아해 온 것, 자연스럽게 좋아해 온 것, 죽도록 미웠지만 어쩔 수 없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그런 것들을 하나씩 찾아내는 재미는 꼭 내 삶에 숨어 있는 보물을 캐는 것 같다. 《아무튼,》 시리즈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얼굴에 빙글 미소가 떠오른다. 친구들과 가만히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다른 걸 보고 있어도 같은 표정으로 웃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겠지.
MOVIE
“동생 예쁘지?”
“솔직히 별로예요. 대머리에다가 이도 없잖아요. 주름도 자글자글한걸요? 차라리 불독이 낫죠.”
“인생 첫 기억은 언제야?” 친구들은 몇 초간 침묵하더니 이내 몇 개의 숫자를 부르며 어린 시절을 복기한다. 어떤 친구는 유모차 안에서 본 독일의 풍경을 이야기하고, 어떤 친구는 유치원 시절 친구와 다툰 기억을 소환한다. 어떤 친구는 첫 기억이 중학생 때라며 의아해하기도 하면서 우린 서로를 모르던 오래전 어느 날로 성큼 들어갔다 나온다. 그렇게 나눈 이야기들을 모아 한창 옛 기억에 빠져 있을 때 영화를 하나 틀었다.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친구들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모이고 이내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오프닝 영상으로 펼쳐지는 장 자크 상페의 그림을 보고 어느 누가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친구들과 미소 띤 얼굴로 영상에 집중하고 있으면 열 살짜리 프랑스 소년들이 줄지어 나와 그림 같은 에피소드를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아빠가 엄마에게 잘해주면 동생이 생긴 것이고, 동생이 생기면 나는 버려진다는 불문율에 잔뜩 겁을 먹고 동생을 없애기 위해 작전을 펼치는 꼬마들. 심지어 동생이 생긴 친구가 학교를 결석하면서, 모두 그 친구가 버려진 거라는 공포에 벌벌 떠는데! 이 귀여운 아이들은 아직 세상을 모르거나 세상 말고 모든 걸 잘 알아서 이토록 귀여운 게 아닐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새삼 친구들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같은 장면에서 손뼉 치고, 같은 장면에 좋아하고, 같은 장면에 미소 짓고, 같은 장면에 안타까워하는 우리가 귀여워 보이는 귀중한 시간이다. 함께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이 애틋함! 누구나 지나온 어린 시절을 함께 보는 건 역시 좋지 아니한가.
EXHIBITION
“2020년 여름, 21세기 신데렐라를 만나다.”
전시는 언제나 혼자가 제격이라 생각했다. 작품을 하나하나 천천히 즐기는 편이었고 특별히 좋았던 건 일기장에 기록하며 홀로 곱씹곤 했다. 종종 작품 앞에 덩그러니 혼자라는 게 아쉬웠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친구 손을 잡고 가면 그만인 일이었다. 함께 예술 활동을 즐겨줄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얘들아,전시 보러 안 갈래?”
샤를 페로가 1697년에 출간한 동화집 속 이야기 《신데렐라》는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당연하게 자리 잡은 작품이다.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그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다가 “근데 신데렐라 이야기 조금 이상하지 않아?” 한마디를 시작으로 다양한 의견이 탱탱볼처럼 튀어 오른다. 이런 갖은 목소리들이 모여 만들어진 전시가 바로 <신데렐라 유니버스展>이다.
어릴 적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읽혔지만, 지금에 와 돌아보면 어딘가 어색하고 조금 이상해 보이는 이 이야기는 <신데렐라 유니버스展>을 통해 21세기 신데렐라로 새로이 탄생한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마냥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전시를 돌아본 이후 낯설게 느껴지는 건, 어릴 적 읽은 동화를 체험하는 테마존과 21세기 신데렐라 모습을 제시하는 섹션으로 나누어진 전시 구성 덕분일 테다. 전시를 보고 나와서 친구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신데렐라는 더는 마음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고. 유리 구두 하나로, 왕자의 손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수동적인 그녀는 더는 아름답지 않은 것 같다고.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새로운 신데렐라 이야기를 꺼내보며 새로운 동심을 지어보는 그런 여름이다.
신데렐라 유니버스展
일시 5월 9일 (토)~8월 30일 (일)
장소 K현대미술관
글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