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 작가 고은주
꽃과 엄마, 너무도 흔해서 자주 외면하는 이름들. 고은주 작가는 장맛비 속에서 암술과 수술을 지키다 홀로 떨어진 꽃잎을 보며 엄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작품을 남겼다. 그가 정면으로 마주 보고 그린 꽃잎에는 비단 엄마의 이름뿐 아니라, 세상 모든 여성의 이름이 담겨 있다.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따뜻한 그림을 그리며 매일 염원하는 두 손을 모은다.
어릴 적 미술 학원에서 동양화, 조소, 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를 즐겁게 배운 기억이 있어요. 그때부터 그림은 저 자신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예술이었죠. 자연스럽게 대학에 진학해 그림을 배우고, 2007년에 석사를 졸업하며 첫 개인전을 열었어요. 한국화라고 하면 흔히 동양화의 연장선에서 사군자나 문인화를 생각하는데, 저는 비단에 담채(수채)를 이용한 채색화를 그려요. 꽃을 통해 모성을 탐색하는 작업을 하죠. 어릴 때부터 여성스럽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여성이라는 말에 덧씌워진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으로 느껴졌어요. 저는 제 작품 속 꽃을 통해 주체적이되 너무 공격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여성성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따뜻한 위안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요.
초기에는 화선지를 겹쳐 만든 장지 위에 그림을 그렸다면, 후에는 점차 비단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흔히 생각하는 매끄러운 비단은 아니고 한복에 사용하는 투명한 천을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바탕이 투명하기 때문에 앞뒤로 채색을 하면 그림에 입체감이 생기게 되죠. 비단은 종이보다 섬세한 표현이 가능한 반면,수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계획을 세우고 작업에 들어가야 해요. 제 작업 방식은 물로 물감의 농도를 조절하는 담채인데요. 여러 번 중첩되게 채색을 해도 그림의 투명함이 유지되어, 특유의 담담한 맛을 낼 수 있어요. 지난 14년간 작품 활동을 하며 그림의 소재도 변해 왔어요. 엄마를 생각하며 꽃잎을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부터, 결혼이라는 큰 사건을 앞에 두고 물방울로 제 감정을 표현한 작품, 삼신할머니가 아이를 점지해 주는 내용을 담아 그린 작품, 최근에는 전통 부적을 변주해 그린 작품과 페이퍼 커팅을 이용한 설치 작업까지. 같은 꽃을 다뤄도 개인적 사건에 따라 의미와 상징을 다르게 만들려고 노력했죠. 기본적으로 꽃이라는 소재의 특성상 사람들이 큰 거부감 없이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에요. 반면에 꽃이라는 소재가 흔하다 보니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단점 또한 있어요. 다른 소재로 바꿔볼까도 고민했지만, 작업을 하다 보면 다시 꽃으로 돌아가게 되더라고요(웃음).
최근 전통 부적에 관심이 많아서 시리즈 작업을 하고 있어요. 특히 ‘삼재소멸부’는 세 가지 악재를 소멸한다는 의미를 담은 부적인데요. 호랑이 두 마리와 머리 세 개 달린 매의 형상을 꽃으로 그려 넣었어요. 동양적인 소재지만 너무 동양적인 표현은 피하고 싶었거든요. 벽에 걸어놓을 작품으로 그리되, 염원하고 기원하며 복을 부르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또 하나, ‘영원한 어머니의 표상_들장미’는 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준 작품으로, 오래된 작업이긴 하지만 가장 애착이 가요. 장맛비가 지나간 다음 날, 도서관 앞 만신창이가 된 장미꽃밭을 봤어요. 하지만 어지럽게 흩어진 와중에도 꽃의 암술과 수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죠. 저는 그 암술과 수술을 감싸다 떨어진 꽃잎이 저희 엄마처럼 느껴졌어요. 그런 엄마의 희생을 되새기려 작품을 그렸죠. 꽃잎을 정면에서 마주해 그림을 그린 것은 엄마의 이름을 찾아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찢긴 꽃잎을 재생하고 싶은 마음으로 잎맥을 따라 하나둘 작은 점을 찍어 내려갔죠. 사람들이 제 작품을 통해 모성의 숭고함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작업을 하며 개인의 정체성과 모성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고, 그러한 고민을 통해 제 자신과 가족의 복을 함께 염원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어요. 앞으로도 따뜻함과 배려로 공존하는 가족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어요. 그리고 후에는 여성의 삶으로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글.사진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