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와 비로소 꽃이 되다

화성시 생활문화동호회 ‘그린숲’

내게로 와
비로소
꽃이 되다

화성시 생활문화동호회 ‘그린숲’

시작은 아마 바라보는 것부터였을 것이다. 그저 예쁘고 고와서 하염없이 바라보다,
사진을 찍어 간직하고, 그다음 단계는 똑같이 그려본다…? 식물을 실제처럼 그리는
것이 쉬울까 싶지만, 그린숲 회원들은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일이 그렇듯,
처음부터 잘하려 들지 말고 ‘힘을 빼고’ 서서히 그 매력에 스며든다면.

이현주 사진 김성재(싸우나스튜디오)

마치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갑작스레 꽃과 풀에 미혹되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나이 드는 것이라 하지만, 일찌감치 자연이 눈에 들어오고 특별하게 보이는 사람은 분명 지혜로운 사람이다.

“…벽촌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겠을 만큼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돼먹었노?”

수필 <권태>에서 이상은 벌판이 ‘똑같이 초록색 하나’라고 했지만, 아는 사람의 눈에는 보인다. 그 초록 속에는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다는 걸. 물론 다층적인 해석이 필요하지만, 이상이 자연에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결코 권태로울 틈은 없었을 텐데. 보태니컬 아트 동호회 그린숲 회원들은 그런 점에서 복 받은 이들이다. 문밖을 나설 때마다 마주치는 풀과 꽃, 나무 어느 하나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없으니 그 일상이 얼마나 다채롭고 흥미진진할까. 2024년부터 동호회를 이끌어 온 김민영 대표는 그에 더해 큰 보람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네 삶과 자연의 시간은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린숲은 자연을 통해 지혜로운 삶을 살고 단단하게 성숙해지는 것을 지향합니다. 식물의 한살이를 보면 긴 겨울을 이겨내 싹을 틔우고, 꽃피우는 화려한 시기가 찾아옵니다. 영원할 듯해도 꽃은 언젠가 낙화하게 마련이죠. 그 모습은 볼품없을지 모르지만, 낙화 후엔 다시 열매를 키워가요. 이런 자연의 순환을 관찰하며 희망과 순리를 깨닫다 보면 삶이 단단해짐을 느낍니다.”

보태니컬 아트는 식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예술이다. ‘사실적’이라는 말은 정확성, 정밀성을 동반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관찰이라는 연관어가 따라오게 마련.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보태니컬 아트 작품을 보면 단박에 눈치챌 수 있다. 그 어떤 작품보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힘 빼는 게 이다지도 어렵다니

육아에 전념한 지 10여 년. 일상에 활력이 필요했던 김민영 대표는 취미를 찾던 중 보태니컬 아트를 알게 되었다. 긴 시간 인내력과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지만 완성하고 나면 큰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보태니컬아트의 매력에 푹 빠져 강사 자격증까지 따게 되었다고. 이후 뜻 맞는 이 몇 명과 소박하게 시작했던 모임은 결국 동호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린숲은 2024년 12월 향남 카페아르모니아에서의 첫 전시 이후, 올 연말 두 번째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그 새 회원은 16명으로 늘어났다. 기본을 강조하는 김민영 대표는 보태니컬 아트를 처음 시작하는 회원들에게 무조건 선 연습부터 시킨다. 3개월 정도 선 연습을 거치고 나면 저마다 그리고 싶은 식물을 정해 관찰하고 직접 사진 촬영해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예쁜 사진 한 장 골라 따라 그리는 쉬운 방법 대신, 사계절을 거치며 식물이 성장하는 과정을 살피고 담아내야 작품으로써 가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문득 은행잎 새순을 봤는데 너무 예쁜 거예요. 그걸 한참을 보고 다음 해 또 보고 싶어 언제 나오나 하고 1년을 기다렸어요. 사진도 열
심히 찍어놨는데, 아직은 실력이 안 돼서 그리지는 못하고 있어요.”

이전까지 흔하디흔한 은행나무에 눈길 준 적 없던 신경선 회원은 그린숲의 일원이 된 덕분에 은행잎 새순을 재발견하고 설렘과 희망이라는 소중한 선물까지 덤으로 받았다. 시작한 지 이제 9개월 남짓인데 아직 ‘힘 빼는’ 것이 어렵다며 열심히 해당화 열매를 칠해가고 있다.
신경선 회원의 말처럼 섬세한 선으로 면을 채워야 하는 보태니컬 아트에서 ‘힘을 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잘 그리고 싶어 잔뜩 힘을 주면, 선은 오히려 흐트러지고 만다. 자연 앞에선 그렇게 애써 힘 자랑할 필요가 없다는 듯.
신경선 회원 옆에서 송문주 회원은 분홍빛 백합을 열심히 그리고 있다. 그 역시 동호회 활동을 한 지 9개월 정도 되었단다. 많고 많은 꽃 중에서 송문주 회원이 백합을 택한 이유는 뭘까.

“어릴 적 봤던 꽃들 중에서 분홍색 백합이 너무 예뻤던 기억이 있어 그리게 되었어요. 원래 꽃과 식물을 좋아해요.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그려가는 재미가 쏠쏠해요. 그런데 너무 어려워요. 성격이 급한 데다 힘 조절을 못 해 처음엔 연필도 많이 부러뜨렸어요.”

송문주 회원은 그림을 그리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잡념이 사라진다고 이야기한다. 어렵지만 완성하고 난 후엔 더없이 뿌듯하단다. 올해로 3년 차라는 장혜지 회원의 작품 속에는 다양한 모양의 나뭇잎들이 자리 잡고 있다. 꽃 한 송이나 식물 한 포기가 담긴 그림들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저마다 모양이 다른 식물의 잎으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는 장혜지 회원은 핸드폰에 저장된 다양한 작품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식물 중에서 마음에 드는 나뭇잎을 고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을 보고 또 바라봤을까.

그렇게 그린숲 회원들의 작업 공간에선 알록달록 꽃과 식물이 종이 위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저마다의 추억과 사연이 잎사귀며, 줄기와 뿌리 사이사이 스며 들에 핀 다른 식물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된다.

이토록 무해한 취미라니

그린숲 회원들은 일상에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핸드폰에 아이들 사진보다 식물 사진이 많아진 회원이 제법 많은 것은 비밀이다. 처음부터 식물을 좋아한 이들도 있지만, 그림을 그리며 점점 빠져든 이들도 있다. 잘 아는 것보다 더 큰 재미를 주는 것이 바로 ‘알아가는 재미’가 아닐까. 여기에 더해 그린숲 회원들은 함께하는 즐거움과 나누는 뿌듯함도 맛보고 있다. 지난 3월 주민자치페스티벌에 참여해 시민들에게 보태니컬 아트를 알린 일 또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시민들이 이렇게 예쁜 작품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주셔서 기분이 참 좋았어요. 특히 어린이 체험자들이 많았는데, 색을 칠하다 보면 식물을 찬찬히 관찰하게 되고 특징을 알 수 있잖아요. 덕분에 자연에 관심을 갖고 아끼는 마음도 생길 거라 믿어요.”

아이들이 꽃과 식물을 그리는 엄마를 좋아해 덩달아 기분이 좋다는 황윤주 회원의 화폭에는 꽃다발처럼 여러 꽃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각양각색 특징이 모두 다르지만 함께 어울리면 더 고운 꽃다발처럼 그린숲 회원들은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자신들이 그린 그림처럼 일상을 아름다운 색으로 채워가고 있다.

그린숲은 보통 일주일에 한 번 모여 그림을 그린다. 요즘처럼 전시를 준비할 때는 비정기적으로 모여 작업 내용을 공유하기도 한다. 40~50대가 주 구성원이지만 20대, 70대 이상도 있다. 좋은 스승이 있어야 훌륭한 제자가 탄생하기 마련인지라, 김민영 대표의 수업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으니 미술에 소질이 없다 하더라도 두려움 없이 도전하면 된다.

“제가 수업할 때 모든 분께 하는 말이 ‘힘 빼세요, 천천히 하세요’예요. 그러면 다들 ‘한국 사람이 어떻게 천천히 해’라고 하세요. 성격이 급해서 어렵다고 하시면서도 꾸준히 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렇게 열심히 참여하시는 분들은 시간이 지나면 변해요. 선이 부드러워지고 점점 차분해지시죠.”

김민영 대표는 그렇게 변해가는 회원들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바쁘게 보내는 시간이 있으면 천천히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듯, 그림을 통해 삶의 밸런스를 맞춰가길 바라며.

“보태니컬 아트처럼 무해한 취미가 또 있을까요.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 자연을 화폭에 옮기는 동안 차분히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되고,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야를 터득하게 되지요. 무엇보다 경쟁이 필요 없는 일이에요. 어떤 그림을 그려갈지 방향성에 대해 서로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어려운 부분은 함께 해결하지요. 이렇게 공유와 공존을 실천하니 무해한 삶에 가까워질 수밖에요.”

김민영 대표의 말을 듣고 보니 보태니컬 아트는 단점이 없는 취미이자 예술인 듯싶다. 회원들에 따르면 단점이 있긴 하다. 한번 빠져들면 너무 오랫동안 계속해 허리가 아프다는 것. 물론 그 단점이 이토록 아름다운 취미를 즐기는 데 해가 될 리는 없을 듯.

보태니컬 아트 동호회 ‘그린숲’
활동기간 2024년 12월~
회원구성 40~50대 여성
활동문의 인스타그램 @kim.min_o
이메일 marine8412@naver.com

<화분> Vol.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