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 이남현
둥근 것에는 무한의 속성이 있다.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 동력처럼,
한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힘. 그러니 둥근 바퀴를 두 개나 가진 이남현은
앞을 향해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글 차예지 사진 김성재(싸우나스튜디오)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신인 시절 공연에서, 사회자가 절 소개할 때 “다음 무대는 장애인 성악가의 무대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다음번엔 미리 사회자를 찾아 그냥 성악가로 소개해달라 부탁했는데요. 이번엔 ‘휠체어 성악가’ 라고 절 소개하는 거예요. 근데 휠체어도 장애를 상징하는 이미지잖아요. 그래서 장애, 비장애 구분 없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친근한 나만의 정체성이 생길 때까지 무대에 서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저를 보시면 휠체어의 큰 바퀴가 눈에 딱 들어오죠? 이걸 보고 ‘내가 휠체어에 올라타 의지하는 게 아니라 바퀴가 나에게 와서 달렸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 그래서 바퀴 달린 성악가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됐습니다. 공연할 때, 바퀴 달린 성악가라는 소개를 듣고 관객들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관심을 보이면 수식어를 잘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큰일을 당하면 감정 수용 단계를 겪는다고 하죠. 저 역시 사고로 전신 마비 판정을 받고 후천적 중증장애인이 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감정 수용의 단계를 겪었어요. 수술하면 회복될 거라는 부정을 시작으로 분노하고 자책도 하며 다시 일어서게만 해달라고도 하고요. 모든 게 부질없구나 하는 우울의 시기를 길게 겪은 후 수용 단계에 접어드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시작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죽을 수도 있었는데, 안 죽은 데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내가 이 땅에 남아서 해야 할 사명이 아직 남았나 보다. 그게 뭘까. 인생의 과제를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종합병원에 검사받으러 갈 때, 어린이 병동에 있는 아이들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선천성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음악을 들을 때 너무 행복해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세상 어떤 약보다 음악이 효과가 좋구나 싶었고, 저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자 병원 로비에서 공연하는 걸 목표로 삼았어요. 물론 연습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제 폐활량은 사고 전의 20~30%만 살아있어요. 복근, 하지 등 어깨 아래로는 모든 신경과 기능이 마비돼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노래를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미지 트레이닝 하듯 연습했죠. 게다가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음악을 가르쳐 줄 분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고요.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는데요.
오히려 그 경험으로 저처럼 음악을 배우고 싶은데 못 하는 장애인들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고, 제가 남에게 가르쳐 주는 길잡이가 돼야겠다 마음먹기도 했죠. 그래서 공부하고 활동하다 보니 환경이나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후배들을 위해 내가 도전해 길을 넓혀야겠구나 생각해서 박사까지 하게 됐어요.
사실 저에게 큰 무대, 작은 무대의 구분은 없습니다. 제가 필요한 곳에서 저의 메시지를 나눌 수 있다면 어느 곳이든 소중합니다. 그래도 그중에 하나를 말해보자면 뉴욕 UN 본부의 초청을 받아 갔던 공연이 기억에 남아요. 전 세계 대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연하고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누구나 꿈꾸지만 아무나 서지 못하는 카네기홀 대공연장에 섰다는 게 평생 기억에 남을 일이죠.
저에게 해외 공연 일정이 생긴 것도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나라를 다녀보면 예술가를 대하는 마인드가 좀 다르다고 느끼는데, 외국은 장애의 여부를 떠나 예술가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 사람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장애의 원인을 개인이 아닌 사회적 입장에서 보는 시각이 있어요. 일상에서는 늘 장애인과 눈높이를 맞춰 대하고, 약자로 바라보기 보단 이해를 바탕으로 공존하는 것 같았어요.
한국에는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이 법정 의무교육으로 지정돼 있지만, 아직 장애의 원인을 개인에 두는 시각이 많아 시설이나 환경 등 사회 전반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이건 뭐가 좋고 나쁘고를 비교하는 게 아니라,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일상에서 장애인을 많이 만나면 격차가 줄고 사회가 변화하리라 생각해요.
맞아요. 그 이야기 꼭 써주세요. 누구나 경험하지 못한 건 모르잖아요. 이런 것을 복지 개념보다 문화 개념으로 확장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한국 문화가 전 세계에서 열풍이고, 이에 지원이 확장되는 가운데 장애 예술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뭘 해야 할까 고민해보자는 거죠. 그러면 자연스레 문화 복지가 강화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제가 지금은 무대에 서지만 언젠가는 무대 뒤에서 후배들을 서포트하는 입장이 될 거잖아요? 그때도 불편함 없이 활동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거든요. 장애 예술가가 일할 수 있는 환경, 시설 등 모든 면에서요. 모두가 이런 고민을 함께한다면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장애예술인 지원법이 생기면서 많은 부분에서 권리가 생겼어요. 저도 장애 당사자로서 국회에 가서 발표도 하고 포럼에도 참여했었죠. 중요한 건 법이나 정책의 수혜를 받는 장애인이 단 한 명뿐이더라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수요가 많아야만 집행하는 게 아니라 미리 준비돼 있어야 한다는 거죠. 화성시도 장애 예술인 지원 사업이 없었다가 작년에 생겼거든요. 그때 제가 타 도시와 비교하며 건의도 많이 하고 협의체를 통해서 장애 예술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많이냈어요. 지금은 관심이 적더라도, 지원 제도가 있으면 분명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또 찾아올 거라고 얘기했죠. 그래서인지 올해 경쟁률은 좀 높아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장애예술인지원센터의 부재로 화성시 장애 예술인이 많이 떠났어요. 직속 기관이나 전담부서가 있어야 진행이 수월할 거라고 생각해요.
또, BF(Barrier Free)인증이라는 게 있어요. 장애인, 노인 등 모든 국민이 이용에 불편함이 없도록 인증하는 제도예요. 근데 이걸 문화 향유자 입장에서만 생각하는데 저처럼 장애 예술 당사자들이 있잖아요. 연습실, 백스테이지, 무대 등 전반적인 시설에 이런 인증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만일 화성시문화관광재단에서 앞장선다면 너무 좋은 모범 사례가 되겠죠. 재단이 관광을 함께 다루는 기관이 된 만큼, 공연장이든 관광지든 지역사회가 무장애 환경이 된다면 정말 좋겠어요. 타 도시에도 무장애 관광지가 있으나 제 경험으로는 무장애의 정의에서 벗어나 있더라고요. 화성시가 특례시인만큼 무장애 관광을 정확히 정의하고 효과적으로 시행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도시가 되면 좋겠습니다.
공연이라는 게 대관료, 홍보 비용, 출연자 섭외, 연습에 들어가는 비용등 다양한 걸 고려해야 하는 일이거든요. 그에 대한 부담이 상당한데 재단의 지원으로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재단에서 홍보도 도와주고, 시민들이 장애 예술가 공연을 볼 수 있게 독려도 해줘서 많은 도움이 돼요.
그 덕에 9월 28일에 반석아트홀에서 <더 브릿지 콘서트(THE BRIDGE CONCERT)>로 찾아뵐 예정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무대이니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참석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무료 공연이고 선착순 입장이니 부담 없이 와서 봐주세요.
제가 성악가가 된다고 할 때 많은 분이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더 나아가 전공을 한다니, 안되는 걸 왜 하냐며 축하보다 질타를 많이 받기도 했고요. 제 슬로건이 ‘몸에는 장애가 있어도 꿈에는 장애가 없다’입니다. 사실 비장애인도 마음에 장애가 있거나 힘든 시기를 지나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이 말을 ‘환경에 장애가 있어도 꿈에는 장애가 없다’로 바꿔 말하기도 해요. 그 누구도 장애 또는 환경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는 상황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가 되길 바라요. 제 활동이 도전과 희망의 에너지를 전하는 만큼 장애 예술가들이 더 많아지고, 전공자들이 늘고, 세계에 K-장애 문화가 확산됐으면 하고요. 제2의 이남현, 제3의 이남현이 늘어갔으면 좋겠어요.
의미가 있는 곡도, 좋아하는 곡도 많은데요. 한 곡을 추천하자면 이탈리아 가곡인 ‘나를 잊지 말아요(Non Ti Scordar Di Me)’가 생각나네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잊지 말라 노래하는 내용이지만, 어떻게 보면 장애 예술가들의 상황에 빗대어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주위에 흔하게 보이진 않지만 없는 건 아니라는, 어딘가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니 잊지 말아 달라는 의미를 담아 전해드리고 싶네요.
이남현이 부른 ‘나를 잊지 말아요(Non Ti Scordar Di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