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 면모를 지녔던 왕, ‘정조’
현대인들은 다양한 명함을 갖고 산다.
직장을 다니면서 유튜버로 활동하고,
주말에는 인플루언서나 운동선수로 변신하기도 한다.
이른바 자신만의 부캐를 가진 이들이 일상화된 시대.
그런데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200여 년 전 몸소 실천한 인물이 있다.
바로 일국의 최고 통치자이자 다채로운 면모를 지녔던 왕, ‘정조’다.
글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조선에서 국왕이라는 자리는 한 인간의 어깨를 짓누르는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자리였다. 정조는 이 무거운 일상 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부캐를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그의 첫 번째 부캐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을 압도한 ‘석학’이었다. 신하들이 왕을 가르치는 경연 자리에서 오히려 신하들을 가르치며 “공부 좀 하라”라고 호통을 친 일화는 유명하다. 두 번째 부캐는 밤마다 밀실에서 움직인 ‘막후 정치가’였다. 정조는 낮에는 조정에서 자신과 격렬하게 대립하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밤마다 비밀 편지를 보냈다. “이 시기에 네가 나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라”, “이 비판에는 내가 이렇게 맞받아치겠다”고 하며 정국을 막후에서 조율한 고도의 소통가였다.
그의 손은 붓만 쥐지 않았다. 세 번째 부캐는 백발백중의 명궁인 ‘무인’이었다. 정조는 활을 쏘면 50발 중 49발을 명중시킨 뒤, 마지막 한 발은 일부러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능력이 가득 차 넘치는 것을 경계한다는 군자의 도리 때문이었다. 마지막 부캐는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던 ‘판관’이었다. 왕의 행차 때 꽹과리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이 있을 경우, 가던 길을 멈추고 직접 백성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죄수가 없게 하라”며 재위 기간 동안 무려 1,112건의 재판 기록을 일일이 검토하고 판결을 내렸다.
이처럼 화려한 명함을 가진 정조였지만, 사실 그 뒤에 꼭꼭 숨겨두었던 부캐가 하나 더 존재했다. 앞서 소개한 인물들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닌, 시대를 앞서간 미적 안목을 지녔던 ‘디자이너’가 그것이다.
디자이너 정조로서의 면모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은 단연 수원 화성의 건설 현장이었다. 성을 쌓을 당시 일부 신하들은 “성이 튼튼하면 됐지, 굳이 꾸밀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정조는 “겉모양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적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아름다운 성은 지키는 군사들과 백성들의 마음에 자부심을 심어주고, 그곳을 스스로 아끼게 만든다는 깊은 통찰이었다.
정조는 미적 기능과 실용적 방어 능력을 조화시킨 품격 있는 디자인을 추구했다. 그의 문집 《홍재전서》에는 이러한 생각이 잘 드러난다. 정조는 좋은 역사책을 좋은 그림에 비유하며 “귀나 눈이 아무리 닮았더라도 뺨 위 ‘세 가닥의 수염(三鬚)’까지 정교하게 그려야 인물이 살아 움직인다”고 강조했다. 작은 디테일에 집중하는 안목, 이른바 ‘세 가닥 수염’의 철학이다. 실제로 정조는 건축 설계에서 불필요한 사치를 배제하고, 견고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살렸다. 또한 공사에 참여한 석수와 미장이 등 장인의 이름을 돌에 새기는 실명제를 도입했다. 디테일을 중시하는 섬세한 디자인 경영의 표본이었다.


학자, 정치가, 무인, 판관, 그리고 시대를 앞선 디자이너까지. 정조는 실로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이 무거운 명함들을 지탱하게 한 정조의 가장 근원적인 에너지는 무엇이었을까. 그 중심에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효심’이 있었다.
정조에게 생부의 비극적인 죽음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이자 과제였다. 그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당시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히던 화산(花山, 현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으로 묘소를 옮기고 이를 ‘현륭원(顯隆園, 훗날의 융릉)’이라 명명했다.
이 공간에는 정조의 효심과 예술적 안목이 집약되어 있다. 현륭원 건설 기록이 상세히 담긴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보면, 정조가 이 공간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설계했는지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조선 왕릉의 연못은 보통 네모난 형태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틀에 박힌 형식을 벗어나 이곳에 둥근 형태의 원형 연못을 디자인했다. 현륭원이 자리한 화산의 형세가 풍수지리상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었기에, 정조는 묘소 바로 앞에 둥근 연못을 파서 ‘여의주’이자 ‘용의 눈동자’를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병풍석에는 일반 세자 묘에서 보기 어려운 모란과 연꽃 문양을 정교하게 새기도록 했다. 격식을 넘어서서라도 아버지를 예우하고자 한 의지가 드러난다.


아무리 아름다운 설계라도 백성의 삶을 어렵게 만든다면 온전한 성과라 할 수 없다. 정조의 업적이 빛나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드러난 애민정신에 있다.
사실 현륭원을 화산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원래 그 땅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던 수많은 백성과 관공서를 이전시켜야만 했다. 기득권 신하들은 백성들의 원망을 살 것이라며 대규모 이주 사업을 반대했다.
그러나 정조는 강압 대신 상생을 택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정조는 합리적인 이주 보상 대책을 마련했다. 이주하는 민가에 넉넉한 보상금을 쥐여주고 집 지을 재료를 나누어주었으며, 수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백성들이 새로운 터전에서 장사를 하며 먹고 살 수 있도록 시장을 개설해 주고 자금까지 지원했다. 그 결과, 큰 갈등 없이 이주가 완료되었고, 오히려 백성들은 “임금의 효심 덕분에 우리 삶이 더 넉넉해졌다”며 정조의 행차를 환영했다.
이 모든 정책의 바탕에는 ‘사중지공(私中之公, 사적인 마음 안에 공적인 마음이 있다)’이 있었다. 아버지를 향한 사적인 슬픔과 효심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을 단순히 개인의 눈물로 끝내지 않았다. 치밀한 행정과 세심한 배려를 통해 백성들이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일구어냄으로써, 사적인 동기를 위대한 공적인 성과로 승화시킨 것이다.
사적인 효심에서 출발했으나 끝내 공적인 번영을 이루어 낸 정조의 가치관은 오늘날 경기도 화성시라는 도시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륭원은 현재 ‘융건릉’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융건릉은 한 울타리 안에 나란히 이웃한 아버지와 아들의 무덤을 합쳐 부르는 명칭이다. 즉, 앞서 소개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무덤인 ‘융릉(隆陵)’과,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정조대왕과 그의 부인 효의왕후가 잠든 무덤인 ‘건릉(健陵)’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동등한 높이의 서로 다른 언덕에 부자(父子)의 묘가 나란히 놓인 이 독특한 배치는 정조의 유언에서 비롯되었다. 임종을 앞둔 정조는 죽어서도 아버지가 누워 계신 산자락 옆에 묻히기를 자처했다. 살아서 다하지 못한 효를 사후에라도 나란히 누워 이어 가고자 했던 정조의 마지막 바람이었던 셈이다.
오는 10월, 화성시에서는 정조의 이러한 정신과 효심을 기리는 대규모 ‘정조효문화제’와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 행사가 열린다. 특히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곳 화산으로 모시던 역사적 여정을 그대로 재현하는 ‘현륭원 천원(遷園) 재현’은, 정조가 백성들과 함께 그렸던 효와 상생의 의미를 느껴 볼 수 있는 축제의 하이라이트다.
빽빽한 조직의 틀 속에서 저마다의 또 다른 명함을 품고 바쁘게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정조의 삶은 좋은 이정표가 된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 지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번 가을에는 정조의 깊은 안목과 숨결이 깃든 화성시 융건릉의 솔숲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솔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정조가 무거운 책임 속에서도 자신만의 공간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치유했던 것처럼, 우리도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마음을 다독이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화분> Vol.71
에디터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포토그래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