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사람, 천경우 작가
지난 5월 27일부터 6월 7일까지 남양, 송산, 팔탄, 병점, 동탄 등 화성시 곳곳에서는 좀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즉석에서 부탁 받은 시민들은 손바닥만한 종이 카드 위에 하나의 닫힌 선으로 저마다의 어떤 모양을 그렸다. 그 모양은 둥글기도 하고 길쭉하기도 하고 바람이 빠진 풍선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위에 점을 하나 찍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천경우 작가를 북한산 자락 세검정 인근에 자리잡은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시 승격 20주년을 맞아 화성시문화재단은 천경우 작가와 함께 공공미술 프로젝트 ‘플레이스 오브 플레이스(Place of Place)’를 진행하고 있다. 시민들은 각자가 알고 있는, 또는 방금 상상해낸 화성시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그 위에 나만의 특별한 기억이 담겨 있는 위치를 점으로 표시했다. 그것은 실제 화성시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화성’이라는 도시를 지칭한다.
“‘플레이스 오브 플레이스’는 처음 독일의 괴핑엔이라는 도시에서 진행했어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도시죠. 그곳에서 시민들과 함께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인식을 환기할 수 있는 프로젝트로 처음 구상했어요. 제가 관심 있는 것 중 하나가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사실 세상의 가장 중심은 내가 지금 있는 여기이지 남이 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공간(Space)이 기능적이고 물리적인 개념이라면 장소(Place)는 그 공간에 누군가의 역사와 의미, 기억이 담겨 있는 곳을 말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는 당연히 장소성을 띠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내게 의미 있는 곳이라면 ‘장소 중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린 것은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보물지도이기도 하다.
“화성시에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희망을 가지고 이주를 해왔거나 중요한 건 여기 살고 있다는 것이죠. 내 몸이 지금 위치하는 곳이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중요해요. 그것을 내 손을 통해서 나의 몸 밖으로 표출한 거예요. 도시의 모양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화성시 지도를 검색하려는 분들도 있었죠. 그러지 못하게 했어요. 잘 그리는 건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점을 하나 찍었어요. 이게 무엇인지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그린 사람은 알아요. 내가 행복감을 느끼는 곳이거나, 첫 키스를 한 곳이거나, 태어난 곳이거나 직장이거나. 나한테는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기억의 장소이죠.”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화성시민들에게 공간에 대한 ‘공동의 기억’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플레이스 오브 플레이스’에는 시민 600명이 참여한다. 어른이 300명, 어린이와 청소년이 또 300명이다.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들까지 생각하면 적어도 수 천 명에게 같은 기억이 생기는 셈이다. 이 작품에 어린이와 청소년을 참여시키는 것은 작가로서도 이번이 처음이다.
“제가 이런 작업을 공공장소에서 하는 이유는 공간의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거예요. 공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결국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이거든요. 참여하신 분들은 잠깐 앉아서 간단하고 재미있는 걸 했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꽤 진지한 질문과 고민이지요. 이 분들이 각자 일상으로 돌아가면 내가 사는 곳을 다시 보게 되겠죠. 이 기억 속 장소가 나에게 왜 소중했는지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요. 그림도 그리고 앞으로 조형물로도 만들겠지만 실제 진짜 작품은 600명의 마음 속에 있는 거예요. 그것은 이제 저의 손을 떠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자라날 거예요.”
600명의 기억은 우연으로 조합되는 두 개의 조형물로 만들어진다. 지금은 그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완성된 작품은 오는 9월 1일부터 로얄엑스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렇게 조형물을 설치해서 도시에 남겨두는 건 여기가 처음인 것 같아요. 대부분은 공공장소에 조형물을 남겨두지 않으려 해요. 중요한 건 과정이고, 물질적인 재료의 힘은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시민들의 행위와 기억이 담긴 이 작품의 경우는 조형물의 보존이나 누구의 소유물이 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이 장소에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화성시는 어린이도 많고 인구가 젊어서 처음 제안 받았을 때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구상이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조형물은 3미터 정도 되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바라보는 시점이 달라지게 되겠죠. 그리고 여기에 참여한 기억들이 적어도 몇 년은 계속 전해질 테고요.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고유의 삶이랄까 운명이 있어요. 9월에 전시를 하고 화성시민과 같이 살아갈 이 작품의 운명이 저는 좀 흥미로운 것 같아요.”
천경우 작가는 90년대부터 한국과 유럽을 기반으로 작업을 해왔다. 시작은 사진이었다. 한국은 물론이고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지금도 학교에서 예술사진을 공부하는 제자들의 조력자로 일한다. 하지만 그가 하고 있는 설치미술이나 행위예술 작업들을 생각하면 쉽게 연결고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사진은 대개 결과 위주의 매체예요. 결과가 안 좋으면 아무 것도 의미가 없죠. 촬영하는 과정도 굉장히 빠르게 흘러가고요. 그런데 저는 셔터를 누르기 전, 그리고 누른 후의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어요. 물건이나 풍경이 아닌 사람과 주로 작업을 하다 보니까 그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죠. 뭔가가 감지되고 교감이 이루어져요. 그 사람의 마음이나 기억이 내 작품 안으로 들어오는 거죠. 물질적이지 않기 때문에 뚜렷하게 가시화되지는 않지만, 사진에는 어떤 식으로든 표출되거든요. 그런 부분들을 도구화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나 보니까 결과로서의 이미지나 조형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가라는 의구심이 계속 생겨났어요. 그러다 뭐가 남겠어요. 과정만 남는 거죠. 그래서 과정이 중심인 작업들을 자연스럽게 시도하게 되었어요. 과정이 드러나고 과정의 경험이 중심이다 보니 사람들은 행위예술이나 퍼포먼스로 규정하는 것 같아요. 제가 이런 매체 안에서 무언가를 하겠다 해서 시작한 건 아니에요.”
‘플레이스 오브 플레이스’를 알리는 보도자료에 천경우 작가는 ‘사진작가 겸 설치미술가’로 소개되어 있다. 그는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하고 물어본다면 영어로는 ‘이니시에이터(initiator)’라고 해요. 우리말로는 개시자, 창시자, 발기인 정도의 뜻이죠. 저는 다른 사람과 협업을 하면서 그들이 자신을 표현하거나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저 스스로를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어요. 사진은 제가 가장 오래 사용한 매체이고 설치나 퍼포먼스, 영상 같은 것은 일종의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사진이라고 봐요. 작업의 내용에 따라 어떤 매체로 표현할지가 달라지죠.”
그는 서울과 뉴욕, 바르셀로나 등에서 ‘Versus’라는 작품을 진행했다. 참가자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의 어깨에 서로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 둘은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고 15분이라는 시간을 보낼 뿐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평생 낯선 사람의 신체를 접촉하거나 감각할 기회가 거의 없다. 처음 어색하고 불편한 순간이 지나면 타인의 숨소리와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에 대해 생각한다. 그 15분만큼은 타인의 존재에 대해,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몰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참여자들이 끝나면 저에게 물어봐요. 뉴욕에서 했을 때에도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이게 뭐예요? 저한테 생긴 이 감정, 이 이상한 거 이게 뭐예요?’ 그러면 제가 그러죠. ‘이것은 당신이 가지고 가야 할 마음의 그림이다’ 하고요.”
참여자가 경험한 그것은 타인과의 경계가 흐려지고 내가 확장된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평범함 속에 잠재된 우리들의 비범함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20분간 두 사람의 손을 묶고 악수를 하게 하는 ‘Greetings’나 ‘1000개의 이름들(1000 Names)’, ‘1000개의 답변들(1000 Answers)’ 같은 작품에서도 그는 이런 발견의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이 작업들이 ‘사진의 확장’이라고 한 작가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카메라라는 기계를 들지는 않았지만 그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사진기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기억’을 만든다. 참여자들을 낯설고도 이상한, 하지만 진실과 대면하는 상황에 놓는 것은 천경우 작가의 특기이다. 작가는 이런 예술적 공간을 통해 타인에 대해 감각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기회를 제공한다.
앞으로 화성에서 만날 ‘플레이스 오브 플레이스’를 통해 우리는 천경우 작가의 이러한 마음을 기억에 담아 가게 될 것이다. 끝으로 그에게 화성시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화성이라는 도시는 외형적으로는 많이 성장해 있어요. 방학이 끝나면 아이의 키가 갑자기 훌쩍 커있는 것처럼, 화성에 갈 때마다 그런 걸 느끼거든요. 내적으로도 소중하게 잘 자라야 하는 아이 같다고 할까요. 이제는 이 도시가 사람들의 많은 새로운 기억들을 채워가게 되겠죠. 그 중에 영감을 주는 일상의 기억들이 바로 도시의 정체성이자 품격 있는 문화의 자양분이 될 겁니다. 유명한 공연이 도시에 온다고 좋은 문화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건 아닐 거예요. 일상의 인간적이고 소소한 기억들이 쌓여서 일종의 건강한 생명체 같은 게 자라나는 거죠. 이 도시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효용성의 이면에 숨겨진 우리 안의 인간다움을 발견하면서 타인과 그리고 자신과의 소중한 관계를 맺어 가길 바랍니다.”
‘이런 거 어때요?’ 하고 전에 없던 질문을 던지는 사람, ‘지금 이것이 맞나요?’ 하고 익숙한 질서에 균열을 내는 사람, 천경우 작가는 그런 사람이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한 듯 보이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단단하고, 묵직하다. 그는 우리가 숨쉬는 세상과 내 곁을 스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제안한다. 따뜻하고 정중한 방식으로.
글 윤인보
사진 김영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