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웅 연출가
하늘에서는 아비를, 땅에서는 어미를 잃은 토끼가 고난 가득한 육지를 떠나 미지의 세계, 수궁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토끼는 꿈꾸던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창극 〈귀토〉의 제목에는 ‘거북과 토끼(龜兎)’와 ‘살던 땅으로
돌아온다(歸土)’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겼다. 신명 나는 장단과 소리가 휘몰아친 끝에 극은 말한다.
바람을 피하는 대신, 바람 속에서 흔들리며 기꺼이 춤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글 박채림(편집실) 사진 이대원(싸우나스튜디오)

여전히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작업에 집중하면서도 다음 작품을 마음속으로 가늠하고 있지요. 마방진 20주년 기념 작품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귀토> 연습도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오늘 연습도 분위기가 무척 좋았어요. 기존에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과 새로운 주역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고, 소리와 호흡도 잘 맞았습니다. 즐거운 출발이었지요. 더 나아가 이번 공연에서는 작품을 조금 더 다듬고 호흡도 정리했습니다. 전보다 훨씬 밀도 있게 완성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연출가로서 공연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화성 관객들도 분명 즐겁게 보실 수 있는 무대가 될 듯합니다.
저는 공연이 계속해서 무대에 다시 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본을 쓰고 작창도 해야 하고, 연습과 의상, 무대 설치까지 많은 시간과 비용, 인력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만든 작품이 무대에 다시 오르지 못한다면 정말 아쉬운 일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귀토>가 화성의 관객과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기쁩니다. 한동안 수원에서 예술감독직을 맡았던 경험이 있어, 화성은 심적으로도 가까운 도시입니다. 다시 찾게 돼 감사하고, 그만큼 신나는 마음으로 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선 누구나 아는 판소리 <수궁가>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친숙합니다. 익숙한 이야기지만 조금 비틀어 새로운 재미를 더했고요. 전통 판소리에 뿌리를 두면서도 장단은 새롭게 풀어냈습니다. 공연을 거듭하며 불필요한 부분은 덜어내고 호흡을 다듬으면서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과감하게 덜어내려 노력했습니다. 원작의 ‘산중호걸’ 대목도 최대한 충실하게 담아보려 했지만, 공연 전체의 호흡으로 보면 관객은 토끼와 자라 이야기에 계속 집중하게 되더군요. 그 부분을 덜어내고 나니 작품이 훨씬 긴박하고 밀도 있게 흘러갔습니다.
창극은 장단의 힘이 굉장히 큰 장르입니다. 동살풀이처럼 신명 나는 장단이 시작되면 관객도 어느덧 자연스레 작품 속으로 들어오게 되지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몸으로 기억하는 리듬입니다. 반대로 계면조 같은 느린 가락이 흐르면 또 다른 풍취가 생깁니다. 흥겨움과 슬픔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사이 감정도 깊어지지요. 웃음과 해학 역시 그런 흐름 속에서 피어납니다. 정신없이 웃다가 문득 삶을 돌아보게 하는 힘, 그게 창극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말하자면 너끈너끈하게 넘어가는 거지요. 슬픈 노래가 훅 들어오면 어느새 눈물이 나고, 또 웃긴 노래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웃게 됩니다. 감정의 기복을 만드는 데 복잡한 과정이 필요 없습니다. 음악이 관객의 마음으로 곧장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게 음악의 힘이자, 창극만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고 느낍니다.
요즈음은 견디기보다는 금세 떠날 준비를 하는 시대 같아요. 과정보다는 결과가 궁금하고, 다급하고 초조하게 곧장 다음으로 넘어가곤 하지요. 직장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곳이 있을 거라 기대하며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떠난 곳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고민을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귀토>는 토끼가 겪는 ‘팔란(八難)’, 곧 삶에서 마주하는 숱한 고통을 어떻게 견디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갈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교훈을 앞세우는 작품은 아닙니다. 다만 공연을 보고 나서 ‘내가 지금 디딘 이곳에서 춤을 추는 것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을 품게 된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우선 지금 이 시대에 다시 공연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의 관객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인지,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릴 명분이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수궁가>는 발상 자체가 놀라운 작품입니다. 토끼를 물속으로 데려간다는 상상에서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창의성을 느낄 수 있지요. 다만 오늘의 무대에서는 토끼가 꾀를 부려 용궁을 빠져나오는 것만으로는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서 <귀토>는 토끼가 다시 뭍으로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고전을 그대로 옮기는 대신 오늘의 관객이 공감할 수 있도록 의미를 확장하고, 지금 우리의 삶과 맞닿게 해야 합니다.
창극은 종합예술입니다. 귀로만 듣는 공연이 아니라 눈으로도 함께 즐기 는 무대이지요. 음악의 흐름과 감정의 기복은 물론 무대와 영상까지 유기 적으로 어우러져야 합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바닥과 전면에 영상을 활용 하고, 아날로그적인 무대장치도 더했습니다. 달항아리가 등장하는 마지 막 장면은 짧지만 오래 남는 여운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관객이 지루할 틈이 없도록 덜어낼 대목과 보강할 대목을 끊임없이 고민했습니 다. 공연 곳곳에 짧지만 오래 기억될 잔상을 남기고자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양한 역할을 오가며 살아가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경험이 제 작품에 녹아 있습니다.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다른 환경에서 작업하며 겪는 일들이 제 안에 차곡차곡 축적되고, 다음 작품으로 이어집니다. 그 모든 시간과 감정이 결국 지금의 저와 제 작품을 만든 셈입니다.
20년 전 극단을 시작할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제작 환경이 크게 나아졌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20년 동안 분명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연극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후배들에게 극단을 잘 이어 주고 싶지만, 이들이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늘 염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이 사람의 향기를 가장 진하게 품은 장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AI가 빠르게 세상을 바꾸는 시대에도, 무대 위에서 배우와 관객이 같은 시간을 호흡하며 만들어 내는 경험은 쉽게 대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연극이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하고, 또 오래 살아남을 거라 믿습니다.


관객에게 꼭 극장에 와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각자의 취향과 선택이니까요. 다만 좋은 공연을 만나면 삶에 활력이 생기고, 심장이 다시 뛰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배우와 관객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호흡하며 만들어 내는 울림은 마음속에 오랜 흔적을 남깁니다. 그리고 삶을 움직이게 하는 자극이 되어 줍니다.
올 하반기에는 〈투신〉과 〈찻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투신〉은 한 사람이 건물에서 투신했지만 아무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는 설정에서 출발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적하며 오늘의 사회를 비추는 작품입니다. 〈찻집〉은 50년 가까이 한자리에서 찻집을 운영해 온 사람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몰락하는 이야기입니다. AI와 로봇이 산업혁명처럼 세상을 바꾸는 시대에 인간의 노동과 예술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은유적으로 담아내려 합니다. AI가 화두가 된 세상에서 저 역시 기술의 변화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있지만 AI는 끊임없이 진화하며 아무런 동요 없이 인간을 돕지요. 앞으로 어디까지 변화할지 기대하는 동시에, 두렵기도 합니다. 그런 시대일수록 예술이 던져야 할 질문이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국립창극단 배우와 스태프 모두 더 좋은 작품을 보여드리기 위해 열심히 다듬었습니다. 믿고 오셔도 좋습니다. 책임감을 갖고 끝까지 잘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신명 나는 장단과 소리, 그리고 웃음과 여운이 함께하는 〈귀토〉를 화성에서 꼭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화분>Vol. 71
에디터 박채림(편집실)
포토그래퍼 이대원(싸우나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