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알고 싶어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뮤지션 김창기

“내 뜨거운 입술이 너의 부드러운 입술에 닿길 원해. 내 사랑이 너의 가슴에 전해지도록. 아직도 나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다면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널 사랑하겠어.”라고 사랑을 노래하던 청년은 20여 년이 지나 “난 잘난 것도 없고 특별히 못난 것도 없는 평범한 남자야.”라며 읊조리듯이 고백한다. 밴드 동물원으로 활동한 대학 시절을 지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될 때까지 세월에 따라 자연스레 변해간 음악 안에서도 공통점은 엿보인다. 사람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 그는 여전히 고통과 기쁨의 근원을 탐구한다.

“음악은 감정의 퍼즐을 맞추는 일 같아요. 

감정에 맞는 멜로디를 실어서 곡으로 완성하는 작은 퍼즐이요.”

만나 뵙게 돼서 기뻐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강연도 다니고 공연도 했었는데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병원에서 환자만 보고 있네요. 한가하게 지내요.

화성시문화재단에서 예정된 공연 <THE H Concert>가 연기되었다고 들었어요. 아쉽지 않으세요?
아쉽죠. 병원 지하에 공연장 겸 연습실이 있는데 그곳에서 주기적으로 공연을 했어요. 올 1월에 공연한 뒤에 한참을 못 하다가 드디어 화성에서 노나보다 했는데, 취소돼서 좀 섭섭하더라고요(웃음).저나 밴드 친구들이나 공연은 돈 벌자고 하는 게 아니라 놀자고 하는 거라서요. 사실 지금은 공연을 하면 안 되는 시기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이번에 화성 독립운동 기념가를 작업하셨다고요. 화성시문화재단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요?
김재섭 예술진흥국장이 대학교 후배예요. 같이 공연도 여러 번 하고, 서로 공연할 때 게스트로 서기도 했어요. 친한 후배의 추천이기도 하지만 의미 있는 일이라서 맡게 됐죠. 노래는 다 나왔고 편곡 수정 중이에요. 제가 작곡, 김병철 시인께서 작사를 맡았고, 노래는 배우 박건형 씨가 불러요.

작업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처음에는 독립운동가라고 해서 장엄하고 웅장한 느낌을 생각했어요. 김병철 시인께서도 그런 느낌으로 가사를 써주셨고요. 그런데 이 노래에 맞춰 아이들이 춤추고 플래시몹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몇 가지 멜로디를 제안하고 화성시에서 선택해 주신 노래로 작업했어요. 가사도 화성이라는 지역이 독립운동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서 수정했어요. 발안장터에서 시작해 제암리 뒷산에서 횃불을 든 이야기를 넣었죠. 춤을 추려면 신나야 하니까 발랄하게 뛰어놀 수 있는 멜로디를 만들었고요. 경쾌한 응원가 같은 곡이에요.

화성에 대해 좀더 알게 되셨을 것 같아요.
화성에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있잖아요. 그걸 부각하려고 했어요. 곡을 작업하면서 알게 된 건데, 화성에서 독립운동하던 분들이 독립군이 되었더라고요. 그만큼 화성이라는 지역이 독립운동에 불꽃을 피웠다는 걸 알게 됐어요.

바쁘실 텐데 개인 작업은 언제 하세요?
진료 보면서 틈틈이 해요. 이 곡도 그렇게 만들었고요. 공연은한 달에 한 번, 병원 지하 공연장에서 하거나 종종 불러주시는 곳에서 하곤 해요. 공연장은 6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규모예요. 페이스북에 공지를 올리면 관객분들이 와주셔서 같이 술 마시고 노래하고 그래요. 저는 어차피 흘러간 가수잖아요(웃음). 지금은 그냥 취미로 하고 있어요.

두 번째 솔로 앨범 [내 머리 속의 가시]를 정말 좋아했어요.
아, 그건 좀 아쉬운 앨범이에요. 감정 과잉이었던 것 같아요. 주위에서도 기대하셨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나요. 그 전 앨범 [하강의미학]은 잘 되진 않았어도 평은 참 좋았거든요. 아무래도 그 앨범과는 결이 좀 다르니까요.

그래도 그 이후 꾸준히 앨범을 내고 계시잖아요. 음악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재미있으니까요. 음악은 감정의 퍼즐을 맞추는 일 같아요. 감정에 맞는 멜로디를 실어서 곡으로 완성하는 작은 퍼즐이요.

저는 그 퍼즐을 노랫말에서 느껴요. 누군가 자기 얘기를 아주 자세히, 차분하게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제 노래의 특징이 그런 구체적인 느낌이에요. 이야기가 있어야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야기가 없다면 그냥 멜로디에 말을 끼워 맞추는 것밖에는 안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공을 만들어서 그 사람의 삶이 다 들어가야 해요. 주인공은 제가 될 수도, 가상의 누군가가 될 수도 있죠.

실용음악과에서 작사를 가르치신다고요. 이 이야기를 들으니 수업 내용이 궁금해져요.

시를 가르치는 것과 비슷해요. 다만 노랫말은 틀이 있고 리듬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다르죠. 시보다는 훨씬 더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듣는 이들에게 스냅숏 같은 걸 줘야해요. 그런 제약이 있다는 점에서 노랫말은 시의 CF 버전 같기도  해요. 노래 한 곡에서 네 마디 혹은 여덟 마디마다 하나의 감정이 담기는데, 같은 감정을 반복하면 재미없으니까 가장 재미있는 부분을 도입부에 넣어 호기심을 유발하고 운율과 리듬이 맞도록 모아줘야 하죠. 가장 중요한 건 스토리예요. 스토리를 쭉 적고, 그 안에서 재료를 뽑아 쓰고 장면별로 편집해야만 구체적인 노래가 나올 수 있어요.

곡에 가족 이야기도 많이 나와요.
노래를 만들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가족이에요. 그만큼 지금 제 삶에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죠. 가족들이 제 음악에 관심이 없기는 하지만요. 제 노래 들으면 “요즘 이런 노래안 돼~” 그래요(웃음).

마음으로는 응원하실 거예요. 곡 작업은 어떤 식으로 하세요?
노랫말이나 멜로디 중 어떤 게 먼저 떠오르는지에 따라 작업 순서가 달라져요. 제 노래 중에 ‘용을 잡는 기술의 달인’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어느 날 강연하고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데 지하철이 길잖아요. 그래서 용이 떠오르고, 무용지물이라는 사자성어가 연달아 떠올랐어요. ‘아, 나는 음악적으로 무용지물이구나, 한때는 잘나갔었는데, 한때는 내가 용을 잡는 달인이었는데.’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죠. 이렇게 의식의 흐름을 따라 곡이 써지기도 해요.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을 해소하기도 할 것 같아요.
감정 해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림, 골프, 테니스처럼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좋은 건 내가 뭔가 만들고 있다는 성취감이죠.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라는 직업이 곡 쓰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나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고통과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럴 때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는지 알기 때문에 한 인물을 만들어내기 수월하다는 게 좋은 점이에요. 반대로 노래를 하기 때문에 의사로서는 마이너스가 많아요. 환자가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을 때 굳이 가수에게 가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저 사람 가수인데 진료를 제대로 보겠어?’라고 의심하실 수 있죠.

정신건강의학과를 선택하신 이유는 뭔가요?
사람을 이해하고 심리를 더 알고 싶었어요. 저는 사실 의사가 될줄 몰랐거든요. 어쩌다 보니 의대까지 가서 가장 의사 같지 않은과를 골랐어요. 그리고 정신과 의사가 왠지 멋져 보였어요. 정신과 의사 중에 내면에 상처가 있는 사람이 많아요. 고통과 슬픔, 괴로움의 근원이 어떻게 치유되는지 궁금했어요.

생각과마음의원이라는 병원 이름은 무척 직관적이고 따뜻해요.
병원에서 소아·청소년 ADHD와 반항적인 성향을 가진 아이들 진료를 보고 있어요. 병원 이름을 ‘정신과’라고 하면 아이들이 오기 싫어하니까 아내가 좀 더 부드러운 이름으로 하자고 해서 지었어요. 둘러보시면 병원 곳곳에 감정이 없는 그림들만 걸어두었어요. 이미 자극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더 자극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그저 평온한 상태만 있는 중립적인 그림들을 골랐죠.

저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은 처음 와봤는데 그림 하나를 걸 때도 환자들을 배려하는 곳이군요. 99년에 개원했는데, 요즘은 그때보다 인식이 많이 좋아졌나요?
아쉽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정신과는 아직 혐오 기관이기 때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찾아오시는 분들의 수는 비슷해요. 마음의 감기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상담센터, 한의원에 갔다가 정 안 되면 찾는 곳이 이곳이에요. 고정관념은 잘 바뀌지 않는 것 같아요.

안타깝네요. 이곳에서는 주로 상담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ADHD나 강박증은 상담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약을 처방해요.

이 직업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거죠. 환자들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보람이 커요. 인간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는 점도 좋고요.

환자에 대한 의무감도 많이 생길 것 같아요.
상담은 대부분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요. 그 근원을 찾아서 해소하거나, 해소할 수 없을 만큼 깊다면 피해 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거죠. 그걸 실행해 옮기려면 동기가 필요해요.동기를 주는 친절한 선생님, 그게 의사의 역할인 것 같아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만큼, 받고 싶어 하시는 만큼 드리려고 해요. 한쪽이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서로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거든요. 분명 그분들이 해내야 하는 몫이 있으니까요. 세상을 구하는 슈퍼맨이 아니라 현실적인 의사로서 임해요.

음악가와 의사, 무엇으로 있을 때 마음이 더 편한가요?
예전에는 의사가 더 편했는데 지금은 둘 다 괜찮아요. 가수는 남들에게 평가받는 직업이잖아요. 옛날에는 제가 못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늘 오디션 보는 사람처럼 긴장하면서 무대 위에 올라갔어요. 그런데 지금은 저를 보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찾아오시니까 그런 긴장은 사라졌어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어디서든 불러주시면 공연하러 나가야죠. 병원에서 도망칠 수 있는 기회잖아요(웃음). 참, 지금은 칼럼 쓴 것들을 모아서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어요. 아마 여름이나 가을쯤 나오지 않을까싶어요. 바보같이 살 필요 없이, 남들이 시키는 거 할 필요 없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려고 해요.

글 이다은

사진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