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길이면 어때요

흔들리듯 춤을 추듯

종종 목적도 방향도 없이 헤매고 싶을 때가 있다. 이 길이든 저 길이든 상관 않고 발길 가는 대로 흔들리듯 걷고 싶은 그런 날. 가끔 막다른 길에 다다라도 빙긋 웃고 돌아 나갈 여유가 깃든 날, 가볍게 열어보기 좋은 이달의 리스트!

BOOK

헤매는 산책법
《산책하는 사람에게》, 안태운, 문학과지성사, 2020

“오늘은 하루 종일 가만히 있었어. 왠지 움직일 수가 없었으므로 내내 누워 있었지. 몸을 뒤집어 겨우 엎드려볼 수는 있었는데,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지?  나는 어떻게? 갑자기 이런 물음이 떠올라서 이상했다.”

– 안태운,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지?> 중에서

헤매기 좋은 장소로는 아무래도 침대가 제격일 것 같다. 가장 편안한 보금자리에 바로 누워 천장과 마주하거나 옆으로 누워 벽을 보면서 가고 싶은 대로 흘러가기. 헤맴 중에서도 가장 간단하고 편안한 헤맴이 아닐까. 주로 휴일에 일어나는 이 헤맴은 어떤 이에겐 게으름이라 요약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에겐 팔자좋다는 말로 수렴하기도 하지만, 헤매는 사람은 안다. 살아가는 데 이 멍한 헤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고단한 한 주를 보내면 헤매는 일이 다디단 보상처럼 느껴진다. 일주일을 애써 보낸 나에게 주는 오롯한 시간. 그러나 코로나19로 산책조차 기껍지 않을 때, 문득 책장에 쌓아둔 책 중 한 권이 시야에 들어왔다. 안태운의 《산책하는 사람에게》. 떠돌지 않아도 떠도는 느낌을 줄 것 같아 꺼내 보니 뒤표지에 이런 문장들이 쓰여 있다. “산책하면서 / 나는 내 기쁨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나는 내 슬픔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산책하면서 / 나는 내 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나는 내 상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산책하면서 / 나는 내 그리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멀리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헤매도, 저쪽으로 헤매도 괜찮다는 주문 같다.

《산책하는 사람에게》 안에는 갖은 날들이 있다. <하루>도 있고, 그토록 원하는 <휴일>도 있다. 사계절이 모두 녹아 있고, 마당이나 호수도, 숲도 있다. 개중에서 특히 좋은 건 산책이라는 단어와 풍경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고, 귀여움을 잘 아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다. <귀여움을 잘 아는 친구에게> 같은 제목을 읽고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안태운의 시집을 읽으며 실컷 헤매다 보니 하루가 훌쩍 갔다. 하루의 끝에 서서 밑줄 그은 한 대목을 옮긴다. 오늘의 헤맴이 가치 있다고 여기게 해준, 그런 귀여운 문장이다. “우리가 건강했으면 좋겠어. / 우리가 건강했다는 걸 기억하길. /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건강하길. / 귀여운 걸 발견하게 되면 아 귀여워, 하고 그러길. / 그래, 아, 멀리 웃으면서. / 무언가를 쳐다보면서.”

MOVIE

부유하는 감정 그대로
<멋진 하루>, 2008

ⓒ <멋진 하루>

“네가 나랑 있는 동안 행복한 줄 알았는데 헤어지자고 말할 때 너 정말 행복해 보였어.”

영화를 보고 난 뒤 기운이 빠져 드러눕고 싶을 때가 있다. 대개 감정 몰입이 잘되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한껏 느끼게 하는 영화들이 그렇다. 주연이 울면 나도 울고, 조연이 우스우면 나도 웃고, 작품이 여운을 남기면 그 안에서 한참을 헤매고. 이렇게 흠뻑 빠져서 보고 나온 영화도 좋지만, 가끔은 마음이 힘들지 않은 편안한 영화를 찾게 된다. 모처럼 찾아온 여유에 함께하기 좋은 그런 영화들.

영화 <멋진 하루>의 중심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러나 가슴이 찢어질 법한 이별 장면이나 심장이 터질듯한 설레는 장면도 없고, 약이 오를 듯한 알콩달콩한 서사도 없다. <멋진 하루>의 얕은 리듬은 천천한 마음으로 지켜보기에 적당한 강도다. 그렇다고 줄거리가 심심한 것도 아니다. 연인 관계였던 남자를 만나 가장 먼저 하는 말이 “돈 갚아.”이니 과연 심심해질 틈이나 있을까. 병운과 희수는 헤어진 연인 사이다. 1년 전 희수에게 350만 원을 빌리고는 잠적한 병운. 병운이 자주 가는 경마장 구석구석을 뒤져 그를 찾아낸 희수는 병운이 쓴 차용증을 꺼내 보이며 당장 돈 갚을 것을 요구한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병운은 그때부터 아는 여자들을 찾아다니며 조금씩 돈을 모아 희수에게 야금야금 갚기 시작한다. 그가 한 푼 두 푼 모으는 여정을 함께하게 된 희수는 병운의 여자관계를 연달아 목도하고, 350만 원을 받아내기 위해 그 모습을 참고 지켜보며 하루를 함께한다. 1년 전에는 연인 관계이던 둘의 관계가 어쩌다 채무자와 채권자가 되어버린걸까.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은 화려한 위기 상황이나 극적 반전 같은 게 없어 잔잔한 마음으로 보기에 편하다. 불편한 감정이 들지 않아 굳이 집중해서 보지 않고 틀어만 두어도 좋다. 몰입해서 봐도 좋지만 몰입해서 보지않아도 좋은 영화라는 의미다. 러닝 타임 동안 복잡한 마음과 멀찍이 거리를 두고, 희수와 병운의 작은 감정을 헤아리다 보면 사위에 여유가 깃드는 건 시간문제. ‘멋진 하루’라는 타이틀이 성큼 다가온 듯하다.

MUSIC

외롭고도 사랑스럽게
‘그게 다 외로워서래’, 김목인, 2013

“그게 다 외로워서래 그가 집에 간다 하고 또 다른 데 간 것도 이 시간까지 남아 귀를 기울이는 것도 그게 다 외로워서라네 모두가 끄덕끄덕 …… 아 사랑스러운 사람들 외로워서 사랑스러운 사람들”

가끔 마음이 방황할 때가 있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다 커서 사춘기라도 온 걸까. 그럴 때 텅 빈 마음을 채우려 발길을 이리로, 저리로 움직이곤 하는데 아무리 떠돌고 움직여봐도 통 이유를 모르겠다. 그때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문득 귓가에 꽂힌다. “그게 다 외로워서라네.”

외로움의 종류도 천차만별이어서 무엇의 부재로 생겨나는 건지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가족이 멀리에 있어서일 수도 있고, 친구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애인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혹은 너무 많아서 그 안에서 진정한 내 사람을 찾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사람 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때 책을 읽듯 한 자 한 자 조곤조곤 읊는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다. “그 외로움이란 건 말야 여자친구와도 무관한 것 술을 마셔 봐도 춤을 추어 봐도 블루스에라도 사로잡혔나? 남자들은 자신들이 외로워서 그렇다는 것도 모르고 저기 저렇게 모여 낄낄대며 좋아죽겠대”

김목인의 ‘그게 다 외로워서래’를 한 자 한 자 곱씹어 듣고 나니 이 외로움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이유를 몰라 방황했는데, 곰곰 생각하면 방향이 정확한 외로움이 어디에 있나 싶고. 가끔은 외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이유 없이 기쁠 때도 있는 거지. 기쁨과 행복엔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데 왜 우리는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라면 이유를 찾기 위해 골몰하는 걸까. 가끔은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느껴주는 게 좋을 때도 있다. 김목인의 ‘그게 다 외로워서래’를 흥얼거리며 외로움도 이럴 땐 친구처럼 느껴진다며 살짝 웃음 지어본다. 방향을 모른 채 어쨌든 함께 걷는 친구. 이걸로 든든하니 이대로도 좋구나.

글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