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메세나의 세계
15년 전 필자가 한국메세나협회로 이직했을 때 친구와 지인들은 만날 때마다 “회사 이름이 뭐라고? 뭐하는 회사라고? 메세나가 무슨 뜻이야?”를 묻곤 했다. 회비를 납부하고 있던 회원사 직원들조차도 메세나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메세나에 대한 일반인 들의 인지도는 낮았다. 그러나 요즘 문화예술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대기업을 중심으로한 메세나 활동이 언론에서 활발히 조명되고 있다. 기업이 후원한 예술가들이 성공 궤도에 오르면서, 문화예술에 최소한의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단어가 되었다. 잘 알려진 리움미술관, LG아트센터,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롯데콘서트홀, 금호영재, 상상마당, 교향악축제 등도 각 삼성, LG, 아모레퍼시픽, 롯데, KT&G, 한화의 메세나 활동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이 밖에도 많은 기업이 이미지 제고와 홍보 효과, 예술의 창의력을 활용한 생산성 향상등을 목표로 예술 지원 사업을 진행한다. 노블레스오 블리주noblesse oblige로서 사회적 환원의 의미뿐만 아니라 고객이나 지역민, 소외계층에게 문화적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메세나Mecenat는 고대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문학과 예술을 후원한 정치인 마에케나스의 이름에서 유래된 프랑스어다. 지금은 ‘기업의 문화 예술을 지원하는 활동’을 일컫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그동안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함을 강조하는 자선과 기부의 의미가 강조 되거나 문화예술에 대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연결 지어 논의돼 왔다. 최근에는 그 의미가 점차 확산해 문화 마케팅, 문화를 통한 사회공헌 활동, 내부 문화마케팅 및 예술교육, ESG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사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수익 창출이 목적인 기업이 적잖은 예산을 써가면서 예술 사업을 후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메세나는 기업 품격을 높일 수 있는 앞선 경영전략이기 때문이다. 포드자동차 회장 윌리엄 클레이 포드 주니어는 “현대 사회에선 훌륭한 상품과 서비스뿐만 아니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위대한 기업, 착한 기업만이 살아남을 것” 이라고 말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기업의 노력중에 가장 격조있고 세련된 전략이 바로 문화예술을 통한 사회공헌 활동이다. 하늘 아래 더는 새로울 것이 없는 현대 사회에서 ‘착한 기업’, ‘문화기업’, ‘세련된 이미지의 기업’에 대한 소비자의 끌림은 더 이상 강조할 나위가 없을 정도다. 예술후원은 기업 오너의 예술적 취미생활을 뛰어넘어 기업 전체를 움직이는 주요 경영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최근 기업 평가의 화두로 떠오른 비재무적 요소인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의 중심에도 메세나가 있다.
에르메스, 샤넬, 루이뷔통, 크리스챤 디올, 메르세데스 벤츠, BMW, 아우디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글로벌 장수 명품기업들은 하나 같이 예술 지원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비용을 지불한다. 고급스러운 미술관을 짓고, 신진작가를 선정해 후원하며 유명작가와 협업하여 새로운 제품을 디자인 하는가 하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후원 하여 공연장에 고객들을 초청한다.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고객들의 눈높이에 맞춰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브랜드 충성도를 유지하려는 전략이다. 문화예술이라는 옷으로 우아하게 치장한 기업과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는 고급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메세나 활동에 있어 예술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예술가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15~17세기 이탈리아를 지배했던 메디치 가문은 메세나를 대표하는 가문이다. 메디치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수많은 예술가를 지원했고 문화, 철학, 과학등 여러 방면에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를 이어 예술가들을 전폭적으로 후원한 메디치 가문의 예술사랑은 현대 기업들에도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메디치가 여럿 있다. 지난 6월 유망한 20대 젊은 아티스트들이 삼성 문화재단의 악기 후원을 받는다는 뉴스가 모든 언론 문화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랜들 구스비와 박수예, 비올리스트 이해수, 첼리스트 한재민은 각 각 1708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1753년 산 조반니 바티스타 과다니니 바이올린, 1590년산 ‘가스파로 다 살로’ 비올라, 1697년산 조반니 그란치노 첼로를 무상으로 최대 5년간 사용하게 된다. 수억 원~수십억 원에 달하는 역사적인 악기를 연주 한다는 것만으로도 연주자에겐 큰 영광이 다. 삼성문화재단은 1997년부터 명품 현악기를 무상으로 대여해주는 사업을 진행 하고있다. 악기 대여뿐만 아니라 악기 보험료를 지원하고 정기적으로 악기 점검도 무상으로 해준다. 현재 카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인 바이올리니스트 오주영과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캐서린 심을 시작으로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 김지연, 신지아, 클라라 주미 강, 김봄소리, 비올리스트 김상진, 이화윤, 리처드 용재 오닐, 첼리스트 백나영, 문태국, 제임스 정환 김, 이 원해 등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계를 대표하는 연주자 20여 명이 후원받았다. 삼성문화재단뿐만 아니라 금호문화재단, 벽산엔지니어링도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아티스트가 경제적 부담 없이 연주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무상 악기 대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금호문화재단은 우리나라 클래식 발전에 가장 큰 조력자로 평가받는다. 2000년 이후 세계적 콩쿠르를 휩쓴 수상자들은 대부분 ‘금호영재콘서트’를 통해 데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클래식 영재를 후원하는 가장 큰손으로 알려진 금호문화재단은 금호악기은행을 통해 수억 원의 악기를 제공하거나 항공권을 지원하는 등 클래식 영재들이 세계무대에서 실력을 뽐낼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금호문화재단이 지금까지 발굴한 음악 영재만 1,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 ‘시벨리우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첼리스트 최하영, 그리고 한국 클래식계의 중심을 받치고 있는 피아니스트 김선욱, 손열음, 조성진, 선우예권,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 고故 권혁주, 첼리스트 고봉인, 이정란, 그리고 최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성악 부문 우승을 차지한 바리톤 김태한도 ‘금호영재’ 출신이다. 며칠 전 들려온 소식도 반갑다. 금호영재 출신 트럼페터 이현준이 함부르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오케스트라인 함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으로 임용되었다는 것이다. 수십 년 전부터 조용히 기업 후원을 받고 무럭무럭 성장한 음악 영재들이 이제는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어 한국의 위상을 넓히고 있다. 세계를 빛내고 있는 K-클래식 뒤에 기업들의 숭고한 메세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최근 기업들은 유망한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문화를 통한 사회공헌 사업을 진행하고 임직원을 참여시키기도 한다. 창의적 인재를 원하는 기업에서 예술의 원천인 독창성과 창의성을 직원들에게도 접목하려는 의지 때문이다. 기업이 주최하거나 후원하는 공연에 직원들과 그 가족도 초청하고, 예술교육 사업이나 사회공 헌활동에 직원들을 참여시킨다. “단 한 사람의 창의적 인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강조한 미국 애플사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자기 창의력의 원천을 미술에서 찾았다. 미술은 더 이상 특별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도, 교양서적 속 그림 상식이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와 상상력이 끊임없이 샘솟는 ‘창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메세나 활동은 비단 대기업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중소기업도 메세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메세나 협회에서는 2006년부터 중소·중견기업 이 예술단체를 지원할 때 1대1 매칭그란트 방식으로 추가 지원해주는 ‘예술지원 매칭펀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에는 150여 커플(기업:예술단체)이 매칭되어 추가 창작 지원금을 받았다. 정부나 지자체, 기업, 기관등에서 운영하는 예술지원 프로그램을 잘 활용한다면, 지원 기업도 수혜 예술단체도 더 많은 창작 기회를 얻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지역민들은 더 많은 예술향유의 기회를 갖게 될것이다. 지역에 기반한 기업이 그 지역 예술가와 단체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지역 문화예술 발전은 요원한 것이다. 경기도 화성시에서도 본보기가 될 만한 메세나 기업이 나와 화성의 문화예술 발전을 넘어 화성시 발전에 기여하기를 기대해 본다.
기업의 예술 지원 및 협력을 돕는 비영리 사단법인 한국메세나협회에서 회원사와 기업을 대상으로 예술의 아름다움과 예술후원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메세나대상, 메세나 콘서트, 예술포럼 등 다양한 회원사 서비스 사업을 기획, 진행하고 있으며 언론에도 활발히 기업 메세나 활동을 홍보 하고 있다.
글 주순이(한국메세나협회 경영기획팀장, 경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