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한 것들에 끌리는 이유

무해한
것들에
끌리는
이유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 했던가.
도파민이 마구 터지는 고자극 콘텐츠가 문화 소비자를 휩쓰는 한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되는 무해한 콘텐츠들을 찾는 발걸음이 늘고 있다.
당신의 취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김송희 대중문화칼럼니스트

ⓒ광동제약

이유 없이
그냥 좋은 것

“너도 좋아 마시는구나?”
눈에 다 담기도 어려울 만큼 푸르게 펼쳐진 제주의 바다 앞, 낮은 돌담 위엔 바다만큼 싱그러운 배우 박보영이 생수를 마시고 있다. 그의 앞에 아장아장 걸어온 아기 인플루언서 태하가 “누나, 물 줄까요?”라며 똑같은 생수병을 건넨다. 혹시 아기가 들기 어려울까 물을 반만 채운 페트병이 찰랑댄다. 박보영과 ‘태요미’ 태하의 만남이라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삼다수 광고는 전파를 타자마자 유튜브에서 30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물론 메인 모델 박보영의 팬들도 영상을 여러 번 봤겠지만, 댓글에는 온통 태하의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광고 연기’에 대한 감탄이 가득하다. ‘태하 아기라서 물병 무거울까봐 물이 딱 한 모금 들어있음’, ‘와 진짜 한국인들이 호불호 없이 좋아하는 둘이 광고 찍었네. 너무 귀엽고 맑다’, ‘감독님이 어디까지 가라고 선 그어줬나 보네. 바닥만 보고 쫑쫑쫑 너무 귀엽다’, ‘박보영과 태하, 이 조합 생각해낸 삼다수 감다살이야’, ‘광고를 이렇게 여러 번 돌려보는 건 또 처음이네’ 등등. 위의 댓글에서 콕 집어 언급했듯이, 박보영과 태하는 특별히 그들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어려운, 호불호 없이 전 세대의 사랑을 고루 받는 광고 모델임이 틀림없다. 세대와 성별을 불문하고 모두가 사랑할 수 있는, 나쁜 이슈와 연결되기 어려운 존재. 두 사람의 공통점을 바로 ‘무해함’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
다. 깨끗한 제주에서 길어 올린 천연의 암반수를 강조하는 생수 모델로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을 것만 같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사람들은 요즘 그러한 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내가 키우지도 않는 고양이를 유튜브에서 구독하고, 애는 없지만 유튜브에서는 아기 인플루언서들을 몇 명이나 구독하며 댓글로 남의 집 아이의 무사 건강을 기원한다. 랜선 집사, 랜선 이모·삼촌을 자처하고, 가방에는 여러 개의 캐릭터 인형과 키링을 주렁주렁 달고 다닌다. 학교, 직장 등에서 시달리고 지친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은 오직 사랑스럽고 귀엽고 무해한 존재뿐이다.

ⓒtvN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대중의 취향을 가장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영상 콘텐츠의 경향성이다. 넷플릭스에서 여전히 인기 순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오징어 게임> 시즌 3지만 잔인함으로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이 시리즈 외에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의외로 말랑말랑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콘텐츠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위 광고의 주인공이었던 배우 박보영이 주연을 맡은 tvN <미지의 서울>이다. 이 드라마는 ‘위로와 힐링’을 가져다준다는 입소문을 타고 OTT 스트리밍 순위 1위는 물론이고 종영까지 꾸준히 시청률이 상승해 시청률 10%를 넘기며 화제성 1위에 등극했다.
쌍둥이 자매가 서로의 역할을 바꿔 살아 보며 상대의 괴로움을 이해하게 된다는, 우리 모두 타인의 아픔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응원하고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매우 따뜻하고 온당한 메시지를 품은 이 드라마는 끝까지 많은 시청자에게 인생 드라마라는 찬사를 받으며 ‘용두용미’를 거두었다. 이 드라마야말로 시골과 서울을 오가며 무해한 배우들이 무해한 내용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콘텐츠였다.

ⓒ언더월드

유튜브 영상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인기 급상승 동영상’ 순위에서도 고양이를 주제로 한 콘텐츠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송하빈이 운영하는 ‘언더월드’ 채널의 주인공들은 송하빈이 아니라 그가 아내와 함께 키우는 고양이 춘봉, 첨지다. 얼마 전 ‘황칠복’이라는 아기 고양이까지 입양해 세 마리 고양이의 집사가 된 이 채널의 구독자는 140만여 명이다. 고양이는 영상 촬영이 쉽지 않은 동물 중 하나다. 개처럼 활동이 많거나 리액션이 크지 않고 종일 잠을 자거나 웅크리고 있는 정적인 동물이다. 웃기거나 극적인 장면을 뽑아내기 쉽지 않은 고양이를 데리고 송하빈이 ‘쇼’를 벌이는 것이 이 유튜브 채널의 핵심이다. 고양이들은 가만히 있고, 그 옆에서 고양이 아빠 코미디언이 쉴 새 없이 떠든다. 개냥이에 가까운 춘봉이와 대답을 잘하는 고양이 첨지가 아빠가 옆에서 뭐라고 떠들든 들은 척도 안 하고 웅크리고 있다. 영상의 댓글들도 ‘고양이들에게 이상한 것
시키지 않고 채널 주인이 혼자 떠드니까 맘이 편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동물이 스트레스 받지 않는 환경에서 영상 제작을 위해 고양이를 괴롭히지 않고 인간이 재롱을 떠는, 이 무해한 제작 환경이 시청자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셈이다.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장면으로 확 시선을 붙들어 놓는 콘텐츠보다 마음 편하게 누구나 깔깔거리며 밥친구(식사하며 틀어 놓는 영상)하기 좋은 <핑계고>시리즈와 같은 영상 조회수가 200만을 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핑계고> 시리즈는 유튜브 영상 중 유독 분량이 긴 편이다. 대부분의 토크 유튜브가 10분 내외로, 일명 ‘엑기스’만을 담아 영상을 만드는 반면 핑계고는 길게는 2시간에 가까운 영상들도 있다. 그런 영상들을 사람들은 집중해서 보기보다는 청소, 설거지, 식사 등 집안일을 하면서 일상 BGM으로 틀어 놓는다. 흘려들어도 하등 문제없는 무난하고 쓸데없는 수다들. 그런 무해한 음성 토크를 들으며 마음 편하게 보내는 주말이야말로 제대로 휴식을 즐기는 방법이 된 것이다. 

ⓒ빅이슈코리아

무난한 게 아니라 무해한 취향입니다

대단한 스타나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귀여운 것을 보면 마냥 지지하고 지갑을 열고 싶어 한다. 나는 수년째 잡지 <빅이슈코리아>를 만들고 있는데 ‘최고심’과 같은 캐릭터나 일러스트레이터 ‘빵이’의 그림이 표지를 장식할 때, 유기 동물이나 동물 유튜버가 표지에 등장했을 때 뭇 스타가 표지에 등장할 때보다 판매율이 높을 때도 있다. 특정 스타 표지는 해당 스타의 팬들만 구매한다면, 위와 같이 귀여운 캐릭터나 동물 표지는 훨씬 폭넓고 다양한 독자들이 구매한다.

이들은 모두 누구나 맘 편히 볼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근 잡지의 표지는 <스킵과 로퍼>라는 일본만화가 장식했는데, 이 표지를 진행하면서 만화 출판부와 미팅할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코어 팬덤이 있는 만화들과 달리 <스킵과 로퍼>는 청춘 만화로 다양한 10대 캐릭터들이 꿈과 미래, 사랑을 고민하며 성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때문인지 만화의 충성 독자층의 연령대도 10대부터 40대까지 매우 폭넓다고 한다. 만화를 활용한 MD 상품 역시 몽글몽글 하니 귀엽고, 색도 파스텔톤이라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아이들도 자기 방에 장식할 수 있는 아이템들이 많아 구매율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우리는 시간을 쪼개 쓰며 매일 경쟁에 쫓긴다. 잠시 정신을 놓았다가 구멍이 생길까봐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하는 하드보일드한 업무, 취업 준비, 공부에 시달린다. 한국 사회 대다수가 쫓기듯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열심히 살아서 무언가를 이룩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뛰지 않으면 뒤처질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때문이다. 내 삶도 지치고 힘든데 콘텐츠에서까지 피가 낭자하고 머리를 써야 하거나 감정이 휘몰아치는 스토리라면 집중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그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한 아이들이나,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고양이와 강아지, 그리고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며 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편안한 대화를 나누는 무해한 영상을 찾아본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또 마음 편한 그 존재들이 사람들의 마음이 휴식을 향하도록 돕는다. 그렇게 무해하고 귀여운 것이 또 한 번 우리를 구원한다.

<화분> Vol.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