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L하고 HIP한 나만의 안목
이제 평론가의 권위는 예전 같지 않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지 마시라. 문학평론가 신형철, 영화평론가 이동진, 음악평론가 임진모를 아는 사람이 많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무수하다고 항변하지 마시라. 셀럽이된 지식인들이 흔하게 보이지만, 사람들이 지식인에게 원하는 것은 가르침이나 주장이 아니라 친절한 설명일 뿐이다. 그래서 어려운 말, 모르는 말, 싫어하는 이야기를 하면 안된다. 그랬다가는 누구든 비판받는다. 조용히 버려진다.
다들 누군가에게 배우면서 성장했음에도 배워야 하는 순간과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거부하는 추세다. 민주주의가 일상화된 사회이고, 권위에 대한 반감이 널리 퍼졌으며,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들 배울 만큼 배운 데다, 인터넷을 통해 어지간한 정보는 금세 학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돈과 시간이 있으면 뭐든 살수있고, 어디든 갈 수 있으며, 쉽게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에는 전문가의 권위가 존재하기 어렵다.
실제로 지금은 모두 자신의 판단과 취향을 확신한다. 경제력이 높아지고, 정보를 손쉽게 취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의 사람들은 좀처럼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하던 자신 있게 행동하고 소비 한다.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고, 끼리끼리 어울린다. 일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끊임없이 전시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이제는 외모와 라이프 스타일이 자신을 드러나게 하고 완성하는 매력 자본이다. 패션과 취미, 여행 등으로 자신이 얼마나 감각적이고 트렌디하며 개성 넘치는지 알리는 일은 날마다 수행해야 할 중요한 일과다.
소셜미디어가 없던 시대에는 자신을 전시할 수 있는 장이 적었다. 기껏해야 가까운 지인들에게 보여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소셜미디어의 시대에는 자주 만나지 못하는 지인들뿐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과시할 수 있다. 얼마나 세련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유행에 민감한지 실시간으로 드러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좋아요’ 숫자를 늘리고, 네트워킹의 범위를 확장해 셀럽에 가까워지는 일이 만인의 과제가 되었다. 현대인이 늘 분주한 이유다.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민주주의와 개인주의가 기술 발전에 맞물려 만들어 낸 변화다.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소비 능력이 늘어난 데다,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좋아 하고 열광하는 대상에 시간과 돈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었다. 전문성을 쌓고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영역에서 관심을 두고 소비하고 과시할 수 있는 사이클과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 이다. 이러한 변화는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도록 부추겼을 뿐 아니라, 모두가 자신의 취향과 욕망을 찾아 나서도록 자극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취향과 욕망을 드러내는데 솔직해지고 거 침없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인구가 많아 지며 개인주의가 확산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변화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사적인 호불호의 영역일 뿐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개인의 호불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경우가 적지않았다. 왜 그런걸 좋아하냐고, 왜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 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놀리며 압박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다들 같은 걸 먹고, 같은 옷을 입었으며, 같은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세상은 계속 변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건 유일한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고, 욕망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구입하고 향유할 수 있게 되며, 모두가 소비자의 마인드로 살아가게 되자 삶은 각자의 선택이 되었다.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구가하는지는 철저히 개인의 몫이 되었다. 그와 맞물려 누가 뭐라든 자신이 좋으면 그만이라고,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자신의 욕망대로 살다가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함께 퍼졌다. 물론 여전히 유행이 존재하고, 누군가는 타인의 관심과 스타일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도 하지만 심장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이들의 비율이 높아졌다.
이들에게는 취향이라는 방패가 있다. 이 방패는 촌스럽다는 조롱이나 이상하다는 비판 정도는 거뜬히 막아낸다. 취향은 자신의 감각과 판단에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자신감 정도가 아니라 범접 불가능한 오라Aura를 불어넣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향이라는 방패를 꺼내 들면 남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어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아무리 유명한 곡이나 드라마, 음식도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덕분에 사람들은 마음 편히 각자의 기호와 관심대로 소비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평론가의 권위가 떨어진 것은 이러한 변화의 귀결이다. 평론가라고 해서 모두의 감각과 판단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평론가들에게는 대체로 동일하게 수렴할 수 있는 판단과 감각이 존재한다. 그것이 안목이고, 평론가의 안목은 권위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안목은 취향이라는 방패를 뚫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사람은 모두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한 사람을 분석하고 호명할 때, 그 사람의 집단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판단했다. 어떤 젠더이고, 어떤 세대인지, 어느 지역 출신이고, 어떤 계급인지 분석했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탓이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정체성이 그의 모든 감각과 판단을 규정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모순적이고 불합리하며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읽고 여러 번 보아도 빠져들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다른 이들이 다 싫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무언가가 있다.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감각은 논리적이지 않다. 감각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다. 집단주의 문화가 강했던 시절에는 다들 음식점에서 같은 메뉴로 통일하듯, 다른 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곤 했으며, 자신의 감각에 잘 맞지 않아도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장이 변화했다. 문화가 중요한 상품으로 등극하고, 라이프 스타일 시장이 성장하며, 스마트 기기를 활용할 수 있게 된 후에는 문화가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등장 했다. 향유하는 태도 역시 달라졌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작품과 결과물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부터는 같은걸 보고 듣고 느낄 필요가 없어졌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들이 좋아하는 무언가에 열중한다. 이용하는 플랫폼도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유튜브에 빠져있고, 어떤 이는 넷플릭스에 열광하며, 어떤 이에게는 여전히 서점과 음반가게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설레게하고, 감동을 주는 대상이 겹치지 않는다. 친구 사이에도 다른것을 본다. 가족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가까이 있는 지인보다 멀리 있는 같은 팬클럽 회원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선택의 과정에서 전문가의 도움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지만,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여전히 입소문의 힘이 강력해도, 다른이들이 입 모아 칭찬한다고 내 마음을 흔들지 않았던 무언가를 어쩔 수 없이 호평하는 일은 드물다. 내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억지로 다른 이의 선택을 따라가지 않아도 세상 어딘가에 나를 만족시키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문화산업의 경쟁이 더 치열 해질 수밖에 없다. 향유자의 한정된 지출과 시간을 끌어내는 기획과 마케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절대강자는 없다. 한번 관심을 끌더라도 인기는 영원하지 않다. 너무 많은 작품과 결과물이 쏟아지는 데다, 접속하기 쉬워졌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상황은 향유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을지 모른다.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무한정 늘어났으며, 방식도 간편해졌고, 아무도 가로막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심장이 이끄는 대로 찾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지금 사람들은 생계, 건강, 가족, 노후 문제 등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가지만, 잠시나마 고통을 유예하거나 외면할 수 있도록 돕는 콘텐츠가 수두룩해졌다. 그러면 된 것일까. 수많은 대상 가운데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즐기면 되는 것일까. 예술가와 전문가의 권위가 줄어들었으니, 자신의 기호와 취향을 마음껏 표출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일까.
취향의 시대에도 살펴봐야 할 부분이 없지 않다. 각자 자신의 취향과 판단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세계를 만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거나, 자신의 몰이해와 편협함을 교정할 기회를 놓치고 있을지 모른다. 좋아하는 무언가만 즐기겠다고 문을 걸어 잠그는 이에게 다른 제안을 해봐야 듣지 않으려나. 그래도 세상에는 재미있고 새롭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고 말해보고 싶다. 지금 좋아하고 사랑하는 무언가를 처음부터 좋아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고, 처음에는 이상하고 어렵게 느껴졌던 무언가를 뒤늦게 좋아하고 아끼게 되기도 하지 않았는지 살펴보자고 얘기해보고 싶다. 취향을 존중하지만, 누구의 취향도 고정불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부수면서 오늘의 자신이 되었다.
취향을 키워가는 일과 안목을 만드는 일은 다른 일이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에 열중하면서 다른 이들의 취향과 평가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더 많은 즐거움을 만날 수 있고, 자신이 보지 못한 관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 좀처럼 완벽해질 수 없는 경험과 판단의 오류를 수정하거나 뒤집을 수 있다. 자신의 기호와 취향에만 머물러서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의 수많은 변종을 놓치기 마련이다. 다른 외모와 성격으로 살아가는 나의 삶이 진실하듯, 다른 이들의 판단도 진실하다.
무엇보다 삶은 계속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안목은 그 변화를 기쁘게 수용하고 아우르는 태도이다. 세상의 수많은 존재마다 다양하게 존재하는 가치와 노력을 고르게 찾아내고 존중하려는 마음이다. 그러니 다른 표현과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만나고 두루 사랑하는 여유를 키워보면 어떨까. 그러다 보면 다른 취향의 이유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넓고 깊은 안목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쌓아놓은 안목의 망원경으로 더 많은 취향을 찾아내면 어떨까. 열린 마음과 자유로운 태도는 삶을 더 다채롭게 해줄 것이다. 더 많은 깨달음의 기쁨을 줄 것이다. 그 행복을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지 않나.
글 서정민갑(대중음악의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