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알고 싶은 마음

뉴스레터 2022년 1월호 칼럼 / 글 도란

 

 

시각을 갖추기만 한다면 즉시 감상할 수 있는 게 미술이다. 미술은 ‘보는 것’만으로 즐기고 관찰하고 해석하고 상상하고 그다음을 만들어갈 수 있다. 팬데믹이 찾아오기 전까진 수도권 내에서 여러 전시회를 누볐다. 물론 지금도 방역지침만 어기지 않는 한 미술작품을 보는 자유는 우리에게 충분하다.

미술작품을 보기 위한 조건은 앞에서 말했듯이 시각 하나면 된다. 시각만 주어진다면 공평하게 작품을 볼 수 있는 보편 속에서 나는 가끔 궁금한 게 있었다. 출판시장에는 미술작품을 해석하는 다양한 미술 도서가 시시각각 등장하고 있었다. 인기도 굉장하다. 다양한 분야와 직업에 소속된 사람들이 책을 통해 자기만의 해석을 공개하고 소중한 취향으로 작품을 소개한다. 책과 책을 쓴 사람 모두 작품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각만 갖추면 되는 보편의 미술 세계에서 왜 타인의 해석이 궁금해지는 걸까? 미술관에 입장하는 횟수보다 간혹 미술 도서를 읽는 횟수가 더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두 시각을 보유한 자들의 보편 속에서 말이다.

짐작해보건대 ‘미술’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조금 쑥스러워지는 쪽이라면 미술에 입문하고 싶어서 혹은 미술을 잘 모르지만 앞으로 잘 알고 싶어서 정도의 이유를 들 것이다. 미술이라는 게 시험을 쳐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평가받고 수준을 가름할 만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술이 풍기는 신성함 덕분에 타인 앞에서 미술을 잘 모른다며 쑥스러워한다.

미술에 문외한은 아니지만 자신의 감상과 해석을 타인의 해석과 교차시키고 싶어 미술 도서를 읽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았나. 시각과 사전지식을 활용해 작품을 감상하긴 했는데 ‘좋다!’라는 느낌 이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 말이다. 이 단순명료한 감상이 맞는 건지, 뭔가 더 파악해야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질 때 서슴없이 책을 집어 드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여기서 새로운 의문이 하나 더 파생된다. 우리는 미술작품을 볼 때 자신만의 시선으로 감상해야 할까, 타인의 시선도 함께 받아들이는 게 좋을까? 내 눈으로 본 날것의 감상만이 진짜일까, 다양한 시선과 사전지식으로 감상하는 게 더 가치 있을까? 이러다 보면 다시금 첫 의문으로 되돌아간다. 우리가 미술 도서를 읽는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다.

아마 우리가 미술 도서를 읽는 이유는 어떤 ‘눈’을 갖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됐을 터다. 대개 아름다움을 보는 눈일 것이고 선호하는 장르에 따라 공포를 보는 눈이나 냉정함을 보는 눈일 수도 있겠다.

미술을 감상하는 다수의 이유가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 거라면 미술 도서를 찾는 이유 역시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탐닉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의 반영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미술을 알고 싶고, 잘 아는 사람이 되고픈 순수한 욕망이 생긴다. 전혀 이상할 데가 없는 그 마음들은 시중에 나온 미술 도서에 찬미를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의문에 꼬리를 무는 나 역시 미술 도서를 좋아한다. 기억에 남는 책을 꼽는다면 이세라 작가의 <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와 손철주 작가의 <사람 보는 눈>이다.

이세라 작가는 기상캐스터로 활동한 방송인으로 인생의 어느 시기를 지날 때 자신을 비추고 위로해준 작품들을 책에서 조명한다. 저자는 기상캐스터라는 직업의 특수성으로 인해 종종 힘겨웠던 순간들이 있었고, 그럴 때면 애정하는 작품을 떠올렸다. 또 작품을 빚어낸 예술가의 삶과 애환에 공감했다.

이 책을 읽을 때 여성으로 살며 도저히 허물 수 없었던 어떤 벽을 마주한 나의 과거를 떠올리곤 했다. 이세라 작가가 소개하는 작품에는 내가 아는 작품도 모르는 작품도 있었다. 아는 작품에서는 공감을, 새로운 작품과 작가를 알아갈 때는 희열을 느꼈다. 미술 도서로부터 얻을 수 있는 탐닉의 일종이었다.

ⓒ《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 나무의철학

 

아르테미시아는 1639<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을 그린다. 한 손에 팔레트를 끼고 과하게 몸을 튼 채 그리는 일에 집중하는 자신을 그 자체로 그림이라 명한 것이다. 그림을 통해 현실을 견뎠던, 오직 그림으로 살았던 이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 이세라

 

그런가 하면 우리 옛 그림을 소개하는 손철주 작가의 <사람 보는 눈>은 깜짝 놀랄 만한 변화를 안겨준 책이다. <사람 보는 눈>은 사람을 그린 옛 그림을 소개하고 인물의 풍상과 속내를 들려주며 초상화의 힘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서양의 그림은 해석하고 찬미하며 미를 흡수하느라 급급하지만, 선조들이 그린 옛 초상화나 임금의 어진 등을 볼 때는 어쩐지 뜨뜻미지근한 대중의 태도를 되짚어볼 수 있었다.

나 역시 우리 옛 초상을 보면 기껏해야 옛날 사람들은 못생겼다느니, 지금과 미의 기준이 다르다느니 가벼운 감상밖에 못 했다. 하지만 <사람 보는 눈>을 완독한 다음 날 아침엔 눈 뜨자마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달려갔다. 오랫동안 드나들며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림들을 찬찬히 살펴봤고, 박물관 직원에게 질문도 하고 궁금한 작품을 찾아보는 등 새로운 시도도 해봤다.

ⓒ《사람 보는 눈》, 현암사

 

솜씨 좋은 이한철은 초상을 모사하면서도 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무엇을 살렸는가. 우선 얼굴 주름을 엄청 강조했다. 이마에 고랑이 파이고, 눈두덩은 자글자글하고, 볼살은 처지고, 턱은 겹겹이다. 공들여 그린 주름살 때문에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이웃 영감처럼 낯익다.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은 따로 있다. 턱수염 위를 눈여겨보자. 깨알만 한 점 하나. 바로 사마귀다. 14세기의 충신은 아득해도 사마귀가 있는 노인은 확 다가온다. 포은의 체취가 정겹다. 초상의 오래가는 힘이 여기에 있다.” – 사람 보는 눈, 손철주

 

미술 도서를 읽기 전과 후의 나는 분명 달랐다. 읽은 후에 나의 시선에는 미학의 꺼풀이 덮이고 판단이 세심해지고 호기심이 증식했다.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작품과 더불어 미술 도서를 향한 따사로운 시선을 빚어냈다. 그러니 미술을 잘 알든 모르든, 미술관에 몇 번을 갔든 상관없다. 미술을 탐닉하고 싶은 순수한 이여, 읽고 보고 행복해지자.

 


도란

6년차 프리랜서 작가이자 에세이스트. <여자 친구가 아닌 아내로 산다는 것>,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 <아이 없는 어른도 꽤 괜찮습니다>, <다시 쓰는 반려일기>를 썼다.

글 도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