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하는 몸들이 몰려온다

뉴스레터 2021년 12월호 칼럼 / 글 안희제

사진 설명을 작성하는 것은 소셜미디어 게시물이나 기사에 들어갈 사진을 고를 때도 항상 하는 일이지만, 여전히 매번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지에 담긴 시각적 요소들을 글자로 모두 옮긴 결과물은 종종 장황하고 지루하다. 감상에 걸리는 시간은 물론 사람마다 다르지만, 이미지가 다양한 요소를 한순간에 제시하는 반면, 문자 언어는 어떻게 생긴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하나 차례대로 서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미지와 문자 언어는 구조 자체가 달라서, 둘 중 하나를 다른 하나로 바꾸는 일은 서로 다른 언어를 바꿀 때, 즉 번역할 때 생기는 문제들을 똑같이 수반한다. 한국어에는 있는 표현이 영어에는 없고, 한국어로는 전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영어로는 전달하기가 어려운 경우들처럼, 번역에는 근본적인 오류나 한계가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체텍스트나 폐쇄자막, 화면해설의 작성이 모두 일종의 ‘번역’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시각을 청각으로, 청각을 시각으로 옮기는 등의 작업을 ‘감각 번역’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다. ¹

‘장애예술’에 관한 글을 쓸 때면 고등학교 때 ‘한국 문학’이 무엇인지 배울 때처럼 고민하게 된다. 한국 문학은 한국에서 쓰인 문학인가, 한국인이 쓴 문학인가, 한국에 관해 쓴 문학인가, 아니면 한글로 쓴 문학인가? 마찬가지로, 장애예술은 장애인이 하는 예술인가, 아니면 장애를 소재로 하는 예술인가?

지금의 사회는 어떤 예술 작품의 창작자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장애예술이라고 부르거나, 그 창작자를 장애예술가라고 부른다. 자신이 하는 건 장애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예술가들은 이처럼 자신 혹은 자신의 예술이 모두 ‘장애’라는 범주로 해석되거나 수렴되지 않길 바라는 듯하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적극적으로 ‘장애예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는 중요한 효용이 있다. 기존의 문화예술이 가리고 삭제한 감각과 언어들을 드러내고, 기존의 문화예술이 그 자체로 비장애인의 문화예술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장애예술’을 앞서 언급한 ‘번역’과 연결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최근 문화예술계에는 장애인 접근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영화, 연극 등에서도 폐쇄자막이나 문자통역, 수어통역, 배우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해설하는 음성해설 등이 도입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요소들이 작품을 제작한 이후가 아닌,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전반에서 고려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넷플릭스에 올라오는 작품들은 대체로 접근성이 떨어지는 작품이 먼저 만들어진 후, 그것에 음성해설과 폐쇄자막을 추가하는 형태로 사후에 보완된다. 하지만 최근 개봉한 영화 <피아노 프리즘>(2021)의 경우 화면해설을 아예 내레이션의 일부로 통합하여 작품에 녹여내고, 자막을 기본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는 작품 제작 단계부터 접근성을 고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20년 상반기에 온라인으로 생중계된 연극 <사라지는 사람들>은 농인 예술가들과 청인 배우들이 함께 만든 연극으로, 연극에 수어통역사를 배치하여 접근성을 확보하는 수준을 넘어서 연극의 ‘작품성’을 온전히 농인과 청인 모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 연극을 만든 배우들과 제작진의 인터뷰에서 ‘번역’은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키워드였다. 하나의 캐릭터를 농인과 청인이 동시에 연기하므로, 대사 또한 음성 언어와 수어로 동시에 출력되어야 했다. 하지만 수어와 음성 언어의 단어들은 일대일로 대응되지 않고, 문법 또한 다르다. 그래서 같은 대사인데 그 대사를 배우가 수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농인과 청인 사이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대사의 시간이 다른 것뿐 아니라, 대사를 표현하는 방식도 달랐다. <사라지는 사람들>의 제작 과정에 함께한 농인 배우는 ‘표정’을 두고 청인 배우들과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고 말했다. 음성 언어에서는 감정을 주로 목소리의 톤이나 크기로 표현하고, 표정은 오히려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수어에서는 손짓의 크기와 강도만큼이나 표정도 감정을 담아내는 데 아주 중요하다.

<사라지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무대를 만들어나갈 때 번역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특히 이는 단지 대사를 두 언어로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캐릭터의 감정과 상황에 대한 더 나은 해석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자 얼굴과 손을 포함해서 온몸의 리듬을 맞춰나가는 몸의 번역이기도 했다.

최근 성수동의 아트스탠드에서 상연된 <무용수-되기>는 그야말로 몸의 번역에 관한 연극이었다. 오디오 리플렛과 음성해설, 자막, 그리고 공연 전에 공연장의 형태를 직접 만지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터치투어’를 제공한 이 연극은 접근성뿐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장애인의 몸과 비장애인의 몸 사이의 차이를 다룬다.

수동휠체어를 밀며 나온 무용수 원영과 두 다리로 걸어 나온 무용수 기섭은 같은 안무 영상을 보고 이를 원영의 몸을 기준으로 재구성한다. 해당 안무를 따라 할 때 원영의 몸이 바닥에 닿는 부분을 기준으로 안무를 다시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기섭과 원영은 함께 무대에서 춤을 췄지만, 둘의 움직임은 달랐다.

기섭이 팔을 움직이며 걷는 것과 원영이 수동휠체어를 밀고 바퀴가 굴러가거나 멈춰 있는 동안 팔을 움직이는 것은 춤의 흐름을 다르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기섭이 다리를 들었다 내리는 것은 원영에게 휠체어를 올렸다가 바닥을 강타하는 움직임과 다리를 들었다 내리는 움직임으로 모두 번역될 수 있었다. 두 무용수가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다리를 움직여 조금씩 앞으로 나갈 때도 기섭은 바닥에 닿은 발이 움직임을 지탱하는 듯했지만, 몸이 하늘에 뜬 것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우아하게 움직이는 원영의 몸은 같은 춤을 추는 두 사람의 몸이 완전히 다른 무게중심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농인과 청인이 같은 캐릭터를 연기한 <사라지는 사람들>, 두 다리로 걷는 사람과 두 바퀴로 구르는 사람이 같은 안무를 한 <무용수-되기>는 서로 다른 몸에서 나오는 예술이 정말 같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같은 캐릭터, 같은 안무는 멈추지 않는 번역 과정을 거쳐서 서로 다른 소리와 표정과 몸짓과 땀으로 무대에 소환되었다. 이들의 연기는, 이들의 춤은 같지 않았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는 번역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고 하는 동시에, 완벽한 번역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번역에 뛰어들어야만 번역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최근 문화예술계에서 더욱 깊이 시도되고 있는 문화예술의 감각 번역도 마찬가지다. 장애예술, 번역의 불가능성을 끌어안는 그 예술에서 몸들 사이의 차이가 생동한다. 갈라지면서도 우아한, 번역하는 몸들이 몰려온다.

 

1) 안희제, “종합에서 대체로, 감각의 새로운 가능성: 예술 경험의 장벽을 넘어서”, arte365, 2021.8.2. (https://arte365.kr/?p=87330)

2) “ⓔ메이킹-창작과정 | 핸드스피크”, 유튜브 채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2020.12.17. (https://www.youtube.com/watch?v=XOsvGkU1skc)

글 안희제 | 2019년 2월부터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에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고 있으며, 책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