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뉴스레터 2021년 8월호 칼럼 / 글 허명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들,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달콤해 보이는 제목에 달콤하지만은 않은 남녀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연상의 여인과 젊은 남성의 복잡한 심리를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냈다. 소설의 제목으로 독자들은 이야기의 결말을 눈치 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목에서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의 사랑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소설의 제목이 물음표가 아니라 말줄임표로 마무리되어 더욱 여운을 남긴다. 1961년, 작품은 흑백 영화로도 만들어지는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음악이 인상적이다. 브람스 교향곡 3번의 3악장이 등장하는데, 음악은 멜랑꼴리한 늦가을 정취를 효과적으로 대변한다. 작품의 제목처럼 이 음악 역시 말줄임표로 끝난다. 조용히 저 멀리 사라지듯 음악이 마무리 된다.

 

가을은 브람스의 계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리고 다시 이 문구가 유효한 계절이 돌아왔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브람스의 계절이다. 우리가 가을에 브람스의 작품을 즐겨 듣는 건지, 브람스의 작품을 듣다 보니 어느새 가을이 와있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브람스의 음악이 가을의 정서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왜 가을은 브람스의 계절일까?

 

첫 번째로는 브람스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애상적인 정서 때문이다. 물론 브람스가 느끼는 감정은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브람스는 완벽한 형식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감정보다는 형식의 완결성에 무게를 두어 작품을 작곡해 나갔다. 그런 까닭에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은 20년에 걸쳐 작곡되기도 했고, 또 발표되기도 직전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폐기처분한 음악들도 많았다.

 

브람스에게 가장 중요한 건 형식이었다. 브람스 음악이 어렵게 느껴지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떠오르는 감정과 그것을 담는 표현수단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생긴다. 감정은 쉽사리 드러나지 않고 형식 안에 갇혀버린다. 라흐마니노프처럼 감정을 가득 실은 멜로디로 우리에게 어필하지 않는다. 브람스는 슬픔을 참으려 애쓴다. 우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 참고 또 참는다. 하지만 그렇게 슬픔을 절제하려는 노력이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더욱 슬프게 들린다. 우는 얼굴보다 울음을 참으려는 얼굴이 더 슬픈 것처럼. 가을과 어울리는 멜랑꼴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두 번째로는 클라라 슈만과의 사랑이야기 때문이다. 브람스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브람스가 평생을 연모했던 클라라 슈만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그녀는 브람스의 음악인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브람스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클라라 슈만을 존경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하지만 클라라 슈만은 스승의 아내였기 때문에 운명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이었다. 클라라 슈만은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다. 로베르트 슈만 역시 브람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브람스를 세상에 알리기도 했고, 그가 음악에 전념할 수 있게 지원해준 스승이다.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에 성공한 슈만 부부의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결국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을 마음 속에 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다. 그녀를 향한 마음은 겉으론 표현할 수 없었지만, 음악 속에서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기도 했다. 이런 고독한 사랑이 가을의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로베르트 슈만이 사망한 후에도 브람스는 그녀의 곁을 맴돌며 평생 그녀를 돌본다. 브람스는 죽기 직전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이 평생을 사랑했던 건 클라라 슈만 단 한사람 뿐이었다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1897년 브람스는 사망한다. 클라라 슈만이 사망한 그 다음 해다.

 

가을에 들으면 더 가을 같은 작품들

 

브람스는 교향곡 1번, 2번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의 성공으로 늦은 나이에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브람스는 다양한 관현악 작품들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4개의 교향곡은 그가 이룬 창작의 절정이었다. 특히 브람스의 마지막 교향곡인 4번은 가을에 정서와 가장 가깝다.

 

브람스 교향곡 4번은 교향곡 3번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85년에 완성되었다. 이 뒤로는 최후의 관현악 작품인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주 협주곡만 남겨둔 시점이었다. 교향곡 4번은 전반적으로 어두운 작품이다. 빛바랜 색깔을 띠는 이 작품은 처연하고 희망적이지 않다. 곡이 시작하며 등장하는 1주제는 마치 한숨을 쉬듯 내뱉어진다. 브람스는 깊은 슬픔을 지닌 음악을 형식에 가두려 시도하지만, 눈물은 그 틈으로 새어 나오고 만다.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브람스 교향곡 3번의 3악장 역시 가을을 불러올 음악이다. 이 작품은 브람스의 음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음악이다. 특유의 처연한 정서로 여러 매체에 활용된 음악이며, 특히 유명 일본 드라마인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작품이 등장해 더욱 유명해졌다. 후반부에 호른의 연주로 첫 주제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이 작품의 클라이막스다.

 

협주곡으로는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떠올릴 수 있다. 브람스는 평생 2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다. 1번은 브람스가 청년 시절 작곡한 작품이다. 작품은 1854년부터 착수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그 해는 로베르트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하고 브람스가 클라라 슈만을 돌보던 시절이다. 모든 악장이 매력적이지만, 특히 2악장 아다지오는 애수에 차있고, 누군가를 위로 하듯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젊은 시절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에게 편지를 쓰며, 이 작품의 2악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는 지금 2악장에 막 착수했습니다. 이 아다지오 악장은 당신의 아름다운 초상화가 될 것입니다.”

 

브람스의 소품들

 

브람스의 소품들은 또다른 매력이 있다. 거대한 관현악 작품들과는 달리, 브람스의 작은 소품들에서는 브람스의 목소리를 보다 가까이서 들어 볼 수 있다. 피아니스트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스스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브람스는 피아노를 통해 자신의 독백을 남겨두었다. 그 중에서도 말년에 작곡된 피아노 소품들이 브람스의 원숙한 기법들이 드러난다. 브람스 세 개의 간주곡 op.117, 여섯 개의 피아노 소품 op.118, 네 개의 피아노 소품 op.119이 그 작품들이다. 모두 브람스 인생 최후반부에 위치하며, 브람스가 가진 생각들이 예술적인 형태를 갖추고 흘러나온다. 노년의 브람스에게 악기는 피아노면 충분했다. 피아노는 브람스 음악인생의 시작이자 마지막을 함께 했다.

 

브람스는 피아노 작품을 작곡할 때도 피아니스틱한 텍스추어가 아니라 오케스트럴한 텍스추어로 작품을 구성했다. 피아노로 연주되는 작품이지만, 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키는 기법들로 작곡한 것이다. 여러 성부들은 각각 다른 악기가 되어 노래한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서는 보다 사색적이고 시적으로 작품이 변화했다.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진 소품은 op.118 중 두 번째 작품인 간주곡이다. 클라라 슈만에게 헌정되었으며, 브람스 피아노 작품 중 특히 사랑받는 작품이다. 작품에 귀를 기울이면 브람스의 시간이 펼쳐진다. 브람스의 마음은 음표로 바뀌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비록 절제되고 화려하진 않지만 따뜻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초월하고 포용한다. 깊은 생각에 잠기는 가을처럼.

허명현(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