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2022년 6월호 칼럼 / 글 정효민
위 시를 읽고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고르시오[배점 3점]
우리가 초·중·고등학교까지 12년의 교육과정을 거치며 한 번씩은 풀어본 적 있는 형태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위와 같은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문학은 답을 찾아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은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다’라는 형식의 주입식 교육이 체득되어 버린 지점도 있다. 실제로 어떤 소설가에게 교육과정에서 다루고 있는 본인의 소설 문제를 풀게끔 하였는데, 오답을 골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술과 마주할 때, 주제와 교훈처럼 정보화된 텍스트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클래식을 들으면 시대, 작곡가, 제목까지 알아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질 때도 있다. ‘1박 2일’, ‘신서유기’와 같은 예능에서도 제작진이 클래식 음악을 틀었을 때, 작곡가와 제목을 맞추면 “오~”하는 녹음된 소리가 나오고, 맞추지 못하고 오답을 외치면 “깔깔깔” 거리는 녹음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대중가요를 들을 때 우리는 이 노래의 작곡가, 제목, 장르를 먼저 고민하지 않는다. 멜로디와 가사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감상하게 된다. 노래가 내 마음에 들었으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와 노래 좋다. 이거 누가 부른 거지?’ 감동이 있으면, 찾아보게 되고 찾아보면 알게 된다. 알게 되면 애정이 생기고 팬이 되기도 한다.
음악이 아닌 시각예술을 접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 작품을 보면, 시대, 작가, 화풍을 맞추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여인을 보면서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르네상스’ 이렇게 연결 지으면 무언가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리가 현대미술을 보면서 어렵다고 말하게 되는 건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작품을 보면서 어떠한 정보를 습득해야 하는데 정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저 그림 그리고 조형물이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는지 우리는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응시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 우리는 벽면 혹은 바닥에 있는 캡션을 확인하게 된다. 그곳에는 ‘작품명’, ‘작가명’, ‘사이즈’, ‘작업방식’ 등의 정보가 적혀있다. 때에 따라,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정리된 ‘작업 노트’가 제공되기도 한다.
물론, 필자도 이러한 감상법을 많이 사용한다. 단, 작품에서 정보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접근이 아닌 느껴지는 그대로를 음미하는 시간을 가진 뒤, 스스로 어떠한 느낌을 정립한 다음에 작가 노트 혹은 설명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감상했을 때, 두 가지 중 하나를 얻어낼 수 있다.
첫 번째, 내가 느낀 점이 작가의 표현 의도와 같을 때는 작가와 대화를 나눈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내가 느낀 감정이 감동으로 변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두 번째, 내가 느낀 점이 작가의 표현 의도와 달랐을 때는 작품을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지점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생긴다. 그리고 작가에게 나는 당신의 작품에서 다른 감정을 느꼈다고 자랑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예술을 향유하면서 정보를 얻기 위한 노력으로 인해 오히려 많은 감동을 잃고 있다.
머리로 예술을 바라보려는 강박을 조금 내려놓고, 마음으로 예술을 느끼려는 진심으로 다가간다면, 예술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가나아트센터 <NOW AND EVER> & 부산현대미술관 <거의 정보가 없는 전시>
관람객들의 이러한 딜레마를 사전에 차단하는 전시가 개최되어 많은 이들로부터 호평받은 전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해, 10월 22일부터 11월 7일까지 일정으로 개최되었던 가나아트센터의 <NOW AND EVER> 전시는 박영남, 허명욱, 박석원, 오수환, 우제길, 임옥상, 김종구, 한운성 등 8명의 한국 화단 거장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심미성이나 독창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전시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제1전시장에서부터 제3전시장까지 동선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다른 전시장과는 이질적인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전시가 제공하고 있는 것은 예술가의 작품과 작가의 이름뿐이라는 낯섦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명도 작품이 시작되는 지점에 심플하게 마킹되어 있을 뿐 돋보이는 것은 단연 작품이다.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은 작품 정보가 적힌 캡션이나 리플릿과 같은 자료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작품과 작품 너머의 작가와 바로 만날 수 있게 된다. 텍스트로 대변되는 정보의 범람 속에서 의도적으로 관람객과 정보 사이에 단절을 주어 오히려 관람객이 전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효과를 준 것이다.
가나아트센터의 전시 사례처럼 관람객에게 최소한의 정보만을 제공하여 예술 향유자들의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전시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소소하게 존재했다. 하지만 현재 기획 자체를 블라인드에 두고 여러 가지 모험 중인 전시가 있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거의 정보가 없는 전시>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4월 1일 금요일부터 시작된 이 전시에서 관람객들에게 제공되는 정보는 ‘작업 방법’, ‘작품 크기’ 정도밖에 없다. ‘작가명’, ‘작품명’, ‘제작 연도’, ‘작가 및 작품 설명’은 확인할 수 없다. 오롯이 작품과 작품을 바라보는 나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 지점에서 재밌는 상황들이 발생하게 된다. 지인들과 함께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은 이 작품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본 후, 옆 사람과 각자가 상상한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하나의 작품은 각자의 스토리로 재탄생되고 확장된다. 비슷한 것을 떠올린 사람들끼리는 연대감을 서로 다른 것을 그려낸 사람들끼리는 다양성을 느끼게 만들어 준다.
혼자 전시를 관람한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아이맥을 통해 실시간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통해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평을 남기거나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추측의 글을 남길 수도 있고 예술가가 되어 직접 제목을 붙여볼 수도 있다. 이 과정은 모두 온라인에 아카이빙되며, 작품 옆에 붙어 있는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인식하기만 하면 실시간으로 내가 쓴 글과 다른 관람객이 쓴 글을 읽어 볼 수 있다.
이 전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간결하다. 예술의 본질은 예술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대중을 만나 관계를 맺을 때, 완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제공된 정보를 통해 작품과 예술가를 만나는 것도 관계 맺기의 일환이지만, 이것은 간접적인 관계에 그쳐질 가능성이 높다. 작품을 내가 살아온 세계와 내가 정립한 가치관으로 바라보고 내 방식대로 해석해 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비교해보는 것이 직접적이고 진정한 관계 맺기라고 생각한다.
부산현대미술관은 7월 4일 월요일에 <거의 정보가 없는 전시> 각 작품의 정보를 공개할 예정이다. 캡션에 블라인드 되어 있던 정보들을 공개하는 형식이 될 텐데, 상상력을 동원해 작품을 재해석한 관람객들을 다시 한번 미술관으로 발걸음하게 하는 좋은 마케팅으로써의 효과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관람객들이 온라인상에 등록해놓은 작품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피드백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때 예술가들이 느낄 희열과 감동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블라인드가 주는 미술의 감동
<복면가왕>이라는 프로그램을 다들 아실 것 같다. 2015년에 방송을 시작해 지금까지도 주말 저녁 시간을 책임지고 있을 정도로 꾸준한 팬덤을 유지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방송될 수 있었던 것은 ‘블라인드’가 주는 궁금증과 호기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름만 들으면 모두가 아는 가수지만 얼굴이 가려졌을 때, 오히려 그 가수의 발성과 창법이 더 도드라져 들리고, 가수인 줄 알았던 참가자가 코미디언일 때 익살스러운 그 사람의 삶 뒤에 숨겨져 있는 슬픔의 정서를 발견하는 전율을 느끼게 된다. <놀면 뭐하니?>의 ‘MSG 워너비’와 ‘WSG 워너비’ 또한 블라인드에서 오는 예술의 본질을 잘 분석하여 기획된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문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독립서점에서 ‘도서명’, ‘저자’, ‘책 표지’, ‘출판사’ 등의 정보는 가리고 책방지기의 북 큐레이션, 책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 좋을 독자 등만 제공하여 판매하는 기획이 등장했다. 대형출판사의 광고(온라인 서점 메인화면 노출, 오프라인 매장 메인 매대 진열 등)나 책 표지 디자인 등에 가려진 본질적인 책의 내용을 강조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NOW AND EVER>와 <정보가 거의 없는 전시>의 개최가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졌다. 미술계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블라인드 전시의 형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작가와 작품에 익명성이라는 새로운 술어를 강제로 부여함으로써 예술계를 구성하는 각 구성원에게 주어진 역할의 장벽을 파괴하고 기존 예술계 논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 한다는 <정보가 거의 없는 전시>의 기획 노트처럼 새로운 시도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에는 정답이 없다. 최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습득한 후, 만나게 되는 예술의 감동이 분명 존재하지만, 필자는 단지, 예술 그 자체를 먼저 경험하는 것의 감동도 무척이나 크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예술에는 틀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다름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을 통해 무수히 많은 다른 것 중 ‘블라인드가 주는 미술의 감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 더 예술을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는 태도로 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관람객이 미술관과 전시의 주변인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작품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상상에서 기인한 이야기를 다시 작가에게 전달하여 동시대 미술의 순환을 일으키는 매개자가 되기를 바란다.
정효민
글 쓰는 문화예술기획자. 연수문화재단 예술진흥팀에서 문화사업 및 예술창작공간 ‘아트플러그 연수’를 운영하고 있다. 에세이 작가로도 활동하며 <마드리드 0km> 발간하고, <코로나 19를 감각하는 사유들>, <지금, 이곳의 삶에 머무는 법>에 참여했다.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며 직·간접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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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효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