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이야기는 녹슬지 않는다

조각가 백열

생의 복잡한 지형도 속에서 대화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연대의 기록이다.
이 과정에서 발현된 이야기는 누군가의 삶이고 꿈이며 위로가 된다.
백열은 그런 빛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조각은 그에게 제일 자신 있는 언어가 되었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을 실체화해 당신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조형용접사 그리고 조각가

화성시 봉담읍의 한 용접공장. 그 안에 들어서니 운반기와 각종 공구, 넓은 작업대 위로 무질서하게 놓인 금속 부품들이 눈에 띈다. 더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자 조각가 백열의 작업실이 나타났다. 다른 작가와 함께 공동으로 쓰고 있는 공간이다. 수줍게 의자를 내밀며 작업실이 정리가 안 됐다고 멋쩍게 웃는 모습이 천진해 보였다.
“대학교를 졸업할 시점에 코로나로 이동 제약이 심했을 때라 작업실이 필요해졌어요. 형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게 됐죠. 이제 3년 됐을 거예요. 화성에서 작업하기 좋아요.”
백열은 이 작업실에서 조형용접사의 일을 병행하고 있다. 매일 아침 운동을 한 후 작업실로 출근해 부지런히 용접과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저녁에는 밀린 서류작업을 처리해야 한다. 자신을 무명 조각가라고 칭했지만, 요즘 들어 이곳저곳에서 전시 제안을 받고 있어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제 첫 전시가 3년 전인데 그때의 저는 정말 간절했어요. 조각가를 하고 싶은데 전시를 한 번도 못 하고 있으니 아는 카페마다 무작정 들어가 전시 좀 시켜달라고 말할 정도였죠. 다행히 공명이라는 공간에서 첫 전시를 하게 됐고, 이제는 역으로 전시 제안을 받아 작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감회가 새로워요. 돌이켜보면 그때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있어요.”
백열의 올해 하반기 전시 일정은 전주, 군산, 서울 등을 오가며 촘촘하게 계획돼 있다. 최근에는 서해랑 제부아트갤러리에서 열린 <오늘의 우리에게> 전시를 총괄 기획했고, 같은 곳에서 열린 그룹전 <파노라마>에 참여했다. 경기 미사장갤러리와 서울 ‘남산 YTN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단체전 <한국 현대 조각전>, <뭉기적>, <로드맵>, 등 활발하게 작품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삶을 건져올리는 글쓰기

초등생일 때 부모님의 모습을 그린 후 감상평을 받아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삐뚤빼뚤 서툰 그림을 보였을 때 어머니의 칭찬과 화사한 미소는 되려 큰 깨달음이 되어 돌아왔다. 내 그림이 누군가에게 기쁨이될 수 있구나, 그럼 이 길을 가봐도 좋을 것 같다고.
“막연하게 좋아했던 감정이 전공으로 이어지게 됐어요. 대학생 땐 나만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고 그 욕구를 기반으로 조각을 선택했습니다. 조각도 하나의 언어처럼 제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작가 작품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우아한 규칙’ 시리즈다.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을 재료로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규칙, 반복되는 삶의 형태를 녹여냈다. 녹슬지 않는 철로 이야기를 풀어내면, 소재의 특성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의미가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마음을 담아 작업한다.
“많은 사람이 계획된 루틴으로 일상을 보내요.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것 같지만 이 시간이 모여 하나의 서사가 되고, 빛나는 삶을 만들어 내죠. 그 점을 포착해 형상화하고 실체화해요. 원하는 것을 위한 부지런한 노력은 꾸준히 반복되어 우아한 규칙이 되고, 하나의 원이 되어갑니다. 꿈에 가까워지는 형태라고 봐요.”
청춘들의 꿈과 방황, 인생은 영감의 원천이 된다. 가족을 위해 매일 같이 출근하는 아버지, 자식을 위해 저녁마다 장을 보는 어머니, 동네 사람들을 위해 새벽부터 눈을 쓸어 담는 슈퍼아저씨까지… 백열은 저마다의 인생에 투과하는 시선의 깊이만큼 빛나는 삶의 조각들을 건져내 작품화하고 있다.
“매일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글을 써요. 꿈을 위해 열심히 사는 친구, 방황하는 친구들, 주변 사람들을 떠올리면서요. 엄청난 글은 아니에요. 저 또한 평범한 사람이고 특별한 재능을 갖지 않았지만 감사한 꿈을 품고 살아갑니다. 부딪히고 깨져도 계속 나아가야 다음이 있잖아요? 조금만 더 해보자, 한 발짝 더 가보자고 응원해 주고 싶어요.”

백열은 작업 공간에서 조형용접사의 일을 병행하고 있다.

화성시 봉담읍의 조형용접공장이 조각가 백열의 작업공간이다.

마감시간 의자를 다 쌓으면 꿈꿀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다, 3100x3100x480(h)mm, plastic chair, 가변설치, 2022

‘우아한 규칙’ 시리즈는 스테인리스 스틸을 재료로 녹슬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개화(開花), 907x907x907(H)mm, Stainless steel, 2020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

다음 시리즈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전기 기사였던 아버지는 몸이 아플 때도 가족들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했다. 당시에는 그런 모습이 의아하고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스스로가 그러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삶이 대단하고 멋있는 거였구나. 아버지가 쌓아온 하루하루가 있었기에 여기 있을 수 있고 조각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죠.” 줄곧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던 그는 대중에게 ‘같은 꿈을 꾸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백열은 꿈을 향해 달려간다. 곁에도 늘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프로듀서를 꿈꾸는 친구, 아들의 꿈이었던 아버지, 자식의 건강이 제일 행복이라는 어머니처럼 모든 사람의 바람은 소중하고 특별하다.
“천재들만 꿈을 이루는 것은 아니잖아요. 평범한 저도 꿈이 있습니다. 제 모습과 작품을 본 사람들이 나도 꿈꿀 수 있다는 것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주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조각 특성상 무게와 부피로 설치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평면 작업도 시도할 계획이다. 백열은 “내년에는 어떤 작품이 나올지 나도 모르겠다”며 싱긋 웃었다. 단단하게 내면을 쌓아가고 있는 백열은 뜨겁고도 단단하게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백열 Baek Yeol

개인전
<백열 개인전>, 남산 YTN 갤러리, 서울

단체전
<뭉기적>, 고운미술관, 화성시
<한국 현대 조각전>, MBC 호반광장, 춘천
<로드맵>, 갤러리 민정, 서울
<조각, 감성과 이성을 꿈꾸다>, 북서울 꿈의숲 미술관, 서울 등

소장
<대교 국제 조형 심포지엄>, 세계 청소년문화재단, 서울 수상

수상
<안견 미술대전> 우수상
<관악 현대미술대전> 장려상
<ART for ART 서리풀 대상전> 장려상

글 배미진

사진 박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