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이름

뉴스레터 2021년 10월호 칼럼 / 글 조이한

한나 히르쉬-파울리(Hanna Hirsch-Pauli, 1864-1940): 아침식사 시간, 1887. 캔버스에 유채, 87x91cm,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스웨덴

 

 

거장의 솜씨다.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 그 누구와 비교해도 전혀 빠지지 않는다. 눈은 쉴 새 없이 그림의 구석구석을 훑는다. 색채의 향연! 점점 뜨거워지는 아침 햇살을 피해 정원의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둥근 식탁이 차려졌고, 하녀가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식탁에는 은으로 된 식기와 티팟, 도자기와 유리로 된 그릇이 빛난다. 냅킨이 은으로 된 고리 안에서 얌전히 말려있고 작은 유리잔 안에 빨간 꽃 한 송이가 몇 개의 꽃봉오리와 함께 꽂혀있다. 햇빛은 식기의 표면과 하얀 린넨 식탁보 위에서 너무나 다양한 뉘앙스의 색으로 퍼져나간다. “그림자는 검은색이 아니”라는, 인상주의자들이 했다는 그 말이 이 그림에서 확인된다. 땅에, 나무 의자 위에, 흰색 린넨 식탁보 위에, 다양한 재질의 그릇 위에서 보라색, 노란색, 초록빛, 파란색, 분홍색과 갈색의 섬세한 조합으로 떨리듯 조응하는 물감들의 춤을 보고 있자면 그저 입을 벌리고 탄식처럼 감탄사를 내보낼 수밖에 없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이란 말인가!

 

작가를 찾아본다. 한나 히르쉬-파울리? 들어본 적이 없다. 미술사 책에서 그런 이름은 본 기억이 없다. 이 그림은 1864년생인 그녀가 23살에 그린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그 나이에 고전미술의 정수라는 ‘피에타’를 만들었다. 우리로 치면 대학 졸업작품을 할 나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스웨덴의 화가다. 그녀가 태어난 1864년부터 스웨덴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여학생을 막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남자들만 미술을 배울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해, 한나가 미술을 배우고 싶어 했을 때는 스웨덴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여전히 여성 입학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예를 들면 런던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는 1890년이 되어서야 겨우 여성을 받아들였다. 파리, 뮌헨, 베를린은 1차 대전 이후다. 미술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누드 데생을 여자들이 한다는 것이 자연에 반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여성의 도덕적 결함이 된다는 게 이유였다. 남자들은 누드 모델과 한 방에 있어도 되고 오히려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 여겼지만, 여자는 안 된단다. 그런 말이 그토록 오랫동안 설득력을 지녔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스웨덴 여성들은 매우 이른 시기에 여성 교육의 혜택을 본 셈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뛰어나서 생긴 일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스웨덴은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중 하나이고 성평등 지수가 최상위권에 속하지만 19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콜레라가 창궐했고 굶어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 19세기 말경 약 백만 명이 넘는 남자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미국이나 다른 국가로 이민을 떠났다. 그 바람에 여자들의 노동력이 투입되지 않으면 나라가 무너질 위기였다. 국가는 할 수 없이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직업을 통해 독립할 수 있게 해줘야 했다. 어부지리로 얻은 자유였다. 하지만 이 자유의 기회를 여성들은 놓치지 않았고, 다시는 그 자유를 잃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게 19세기 후반부에 갑자기 스칸디나비아 국가 출신의 여성 화가들이 대거 등장한다. 말 그대로 ‘느닷없이’, ‘봇물 터지듯’ 훌륭한 기량의 여성 화가들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이유가 법적으로 막혀있던 교육 기회가 여성들에게 열리게 되면서라는 건 금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스웨덴은 앞에서 언급했듯 1864년에, 덴마크는 1888년에 여성의 입학이 허가되었으며, 핀란드는 1866년에 공립학교법을 개정하여 소녀도 소년과 동일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이 여성들은 자국에서 미술 교육을 마친 후에 파리와 뮌헨, 베를린 등으로 유학을 떠났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여성도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파리는 가장 인기 있는 도시였다.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는 여전히 여성을 받지 않았지만 아카데미 줄리앙과 아카데미 콜라로시 같은 사립 아카데미에서는 여성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진이 교육에 참여했고 그들의 커리큘럼을 따랐기에 남성에 비해 많은 교육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점만 감수한다면 어쨌든 공부를 계속할 수는 있었다.

 

이들은 파리와 뮌헨, 베를린에서 공부를 하고 그곳 살롱전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낸 후에 자국으로 돌아와서 후배 여성 예술가들의 교육을 맡기 시작한다. 19세기 말이 되면 이제 여성이 여성을 교육하는 단계에 이른다. 매번 남자 교수들만 보면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 모델을 발견할 수 없었던 젊은 여성들은 이제 공적인 분야에서 롤모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1870년에는 여자도 25살이 되면 자기 앞날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법이 통과된다. 그때부터는 결혼을 할지, 혼자 살면서 직업을 선택하여 독립적인 삶을 꾸릴지를 본인이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그전까지는? 여자는 자기 의사대로 삶을 꾸릴 수 없었고, 결혼을 하건 하지 않건 독립된 개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여성들의 의사는 전적으로 그들의 아버지나 남편이 대신한다. 이 시기에 북구 여성들의 예술계 진출이 늘어난 것에는 교육 기회 말고도 높아진 여성 인권이 있었다. 덴마크에서는 1915년부터, 독일에서는 1918년부터, 네덜란드에서는 1919년부터, 스웨덴에서는 1921년부터 여성에 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18세기부터 시작된 격렬한 투쟁의 결과였다.

 

한나 히르쉬-파울리는 아카데미에서 만난 에바 보니에(Eva Bonnier, 1857-1909)라는 또 다른 여성 미술학도와 함께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콜라로시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둘은 스튜디오를 공유하고 서로의 그림을 그려주며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1880년대 당시 파리에는 백 명이 넘는 북유럽 국가의 여성 예술가들이 유학을 하고 있었다. 이 여성들이 결혼 대신 독신 생활을 선택하고, 여성 동료들과 같이 살면서 겉으로 보기에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것은 결국 사회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여성 예술가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작업하고 살롱전에서 메달도 따고 인정도 받아도, 커다란 공공 주문은 늘 평범한 재능의 남성 예술가들에게 집중되었고 전시회 기회도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다 전시회를 하게 되어도 여성 미술가의 작품은 찾기 힘든 통로의 구석 자리에나 배치되었다. 작품을 보고 감탄하지만 작가 이름을 보고 여자라는 게 밝혀지면 판매로 이어지지 않았다. “천재는 남자”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었고 로자 보뇌르처럼 이미 공공연하게 성공한 여성 예술가는 ‘예외’로 치부되었으며 미술관에서도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은 구입을 꺼렸다. 그리고 그녀들의 이름은 금방 잊혀졌다. 미술사는 여성 예술가의 이름을 책에 기록하지 않았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미술사 서적으로 인정받는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 여성 미술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책이 작가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어 전 세계 언어로 번역 출판되면서 독일어 번역본 출간을 앞두고 캐테 콜비츠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언젠가 나는 아동 대상 미술가 전기를 제안 받고 캐테 콜비츠에 대해서 쓰고 싶다고 했을 때 편집자는 ‘잘 모르는 작가라서 출판할 수 없다’는 답을 보내왔다. 2008년의 일이다.

조이한 (아트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