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멈춤이 없는 도전

삶은
멈춤이 없는
도전

살면서 겪는 실패는 다양하다. 연애, 진학, 취업, 결혼 등 삶의 길목마다 통과해야 할 과업이 기다리고 있고, 닥치기 전까지 절대 알 수 없는 뜻밖의 시련도 매복 중이다. <보이후드>(2014),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2017), <굿바이>(2008)의 주인공은 실패를 겪고 견디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결혼에 실패하고, 출세에 실패하고, 꿈을 이루는 데 실패하지만 삶의 본질을 깨닫고 한걸음 성숙해진다.

이현경(영화평론가) 사진 각 영화사 제공

외로움에서 글자 하나만 바꾸면, 자유로움

장장 12년 동안 매년 여름 일정 기간 촬영해서 완성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보이후드>는 실제 시간이 흐른 만큼 배우들도 변화한다. 특히 아역 배우들이 성장하는 모습은 그대로 카메라에 담겼다. 이 영화에서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모두 자기 방식대로 성장한다. 등장인물 중 엄마 올리비아(패트리샤 아퀘트)는 가장 변화무쌍한 삶의 궤적을 그린다. 그녀는 23살에 덜컥 엄마가 되어 철없는 남편 메이슨 시니어(에단 호크) 대신 생계와 양육을 떠맡는다. 구형 페라리를 몰고 다니며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는 메이슨 시니어는 매력적이고 아이들에게도 다정한 아빠지만 가정을 꾸릴 만한 인물은 아니다.
올리비아는 가정을 돌보면서도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마침내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는 야무진 여성이다. 문제는 그가 제대로 된 남자를 선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낭만적인 이상주의자 메이슨 시니어와의 결혼생활에 실패한 올리비아가 선택한 두 번째 남자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을 갖춘 심리학 교수다.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올리비아에게 그는 이상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희망은 곧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그가 술을 마시면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이중인격의 소유자라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올리비아는 또 한 번의 선택을 한다. 이번 상대는 자신의 강의를 듣던 연하의 퇴역군인이다. 권위적인 두 번째 남편과 달리 자신을 존경한다던 로맨틱한 이 남성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변해버린다. 그는 올리비아에 대한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허우적대는 인간으로 변한다.

<보이후드(Boyhood)>
2014,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유니버설 픽쳐스

부지런하고 똑똑한 올리비아의 선택이 매번 실패로 돌아간 까닭은 무엇일까? 올리비아는 앞선 실패를 보상받고 결핍을 채우기 위해 다음 선택을 했다. 결핍을 채우는 선택에 급급해서 상대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다. 그가 선택한 남자들이 매번 변하는 게 아니라, 결핍에 꽂혀 그 남자들의 다른 면을 보지 못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 짐을 옮기는 아들 메이슨을 바라보며 올리비아가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다. 올리비아는 홀로 식탁에 앉아있다 울음을 터뜨린다. 반면 미래에 대한 기대에 가득 찬 메이슨은 해맑은 얼굴로 마냥 즐거워한다.
“이것이 끝인가?”, “난 무언가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올리비아의 이 혼잣말은 매우 쓸쓸하게 들리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제 그녀는 자유다. 결핍을 채워 줄 남자도 책임져야 할 자녀도 없는 독립적인 주체로 혼자 남은 것이다.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 (Brad's Status)> 2017, 마이크 화이트 감독 ⓒ영화사 진진

실수를 딛고 일어설 용기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는 청소년 아들을 둔 아빠의 성장 일기다. 아들이 아닌 아빠의 성장에 초점을 둔다는 점이 흥미로운 영화다. <스쿨 오브 락>(2004) 에 출연한 코미디 배우이자 각본가인 마이크 화이트의 작품답게 전반적으로 코믹하지만 묵직한 감동으로 마무리하는 균형감이 돋보인다. 47살 브래드(벤 스틸러)는 기부 활동을 돕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보스턴에 위치한 터프츠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아내의 직장 때문에 새크라멘토로 이주해 살고 있다.
대학 시절, 그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사랑했던 아내는 여전히 소박한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브래드는 아내와 달리 돈과 명성을 좇지 않았던 자신의 삶이 헛고생이라고 느끼면서 갈등한다. 대학 시절 친구들의 SNS를 보면서 그들의 성공을 질투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동창 닉은 할리우드 거물 감독이 되어 화려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제이슨은 헤지펀드 대표로 황당할 정도의 부자가 되었으며, 빌리는 운영하던 IT 기업을 매각하여 미녀들과 해변을 노닐고 있다. 브래드는 이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화나서 잠을 못 이룰 지경이다. 경쟁상대로 여겼던 크레이그는 백악관 공보관이 되어 TV에 등장하더니 이제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변신해서 토크쇼를 누비고 있다.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 (Brad's Status)> 2017, 마이크 화이트 감독 ⓒ영화사 진진

브래드가 친구들보다 앞선 게 있다면 일찍 결혼한 덕에 아들 트로이가 벌써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브래드는 트로이가 하버드대학교 면접을 보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자 단박에 활기를 되찾는다. 친구들이 갖지 못한 자신만의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트로이가 대학 면접 날짜를 착각하는 바람에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인맥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브래드는 재수 없는 동창 크레이그에게 전화를 건다. 예상외로 흔쾌히 도와준 크레이그 덕분에 트로이는 무사히 면접을 보게 된다. 고마운 마음에 크레이그에게 저녁을 사러 나간 브래드는 사소한 말씨름 끝에 신경질을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크레이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경쟁 심리에서 비롯된 치졸한 행동이었다. 그의 주책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버드에 재학 중인 트로이의 고등학교 선배 아나냐를 붙들고 돈을 많이 벌어 자선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길이라며, NGO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아나냐를 실망시킨다.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 (Brad’s Status)>
2017, 마이크 화이트 감독 ⓒ영화사 진진

브래드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내레이션과 그의 속물적 행동은 너무 직설적이어서 관객이 민망할 정도다. 친구들을 노골적으로 질투하고, 아들이 잠든 사이 아나냐 일행을 만나기 위해 호텔을 몰래 빠져나가는 모습에서 성숙한 어른의 면모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브래드가 그토록 부러워한 친구들도 알고 보면 모두 어두운 이면이 있었다. 헤지펀드로 큰돈을 번 제이슨은 감옥에 갈 위기이고, 하와이에서 미녀들과 살고 있는 빌리는 술과 약물에 절어 살고 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브래드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자괴감을 느낀다. 하지만 뜻밖에도 트로이는 아빠를 위로해 주고, 그에 힘을 얻은 브래드는 “그래, 나는 살아 있어”라며 스스로를 격려한다. 살아있다는 건 과오와 허물을 만회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죽음에 닿을 걸 알면서도 나아가는 것

<굿바이>의 주인공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는 도쿄의 오케스트라에 첼리스트로 입단하나, 재정난으로 악단이 해체된다. 다이고는 다른 악단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아내를 설득해 고향인 야마가타로 향한다. 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겨준 집은 있지만 당장 취직을 해야 할 형편이다. 마침 고액 연봉에 초보도 환영한다는 구인 광고를 본 다이고는 면접을 보러 간다. ‘여행 도우미’라는 문구와 NK에이전트라는 회사명을 보고 막연히 여행사라고 생각했던 다이고는 그곳이 납관(시체를 관에 넣는 일)업체라는 사실을 알고 기겁한다.

<굿바이(Departures)> 2008, 타키타 요지로 감독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주)팝엔터테인먼트

경우에 따라선 꿈을 접는 일이 홀가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이고는 대출까지 받아 산 첼로를 중고로 넘기면서 마치 어딘가에 묶여있다 풀려난 느낌을 받는다. 다이고에게 첼로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상징하는 물건이라 할 수 있다. 다이고는 아버지의 권유로 첼로를 시작했지만 첼로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렸다.
다이고는 늘 아버지에 대해 냉정하게 이야기하지만 정작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첼로는 30년 동안 놓지 못하고 있었다. 다이고는 고독사한 노인의 처참한 시신을 수습하는 것으로 작업 신고식을 치른다. 그리고 일을 하면서 서서히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된다. 아내에게 비밀로 한 채 일을 계속하던 다이고는 결국 아내에게 들키고, 아내는 다이고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한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동네 친구까지 자신의 직업을 모욕하자 다이고는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망자의 마지막 여행길을 정중하고 엄숙하게 준비해 주는 회사 사장의 모습을 보며 다이고는 점차 감화된다. 자신의 일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유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이고는 마음을 굳힌다. 영화에는 여러 차례 염습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치 종교 의식을 거행하듯 절도 있는 동작으로 담아낸 것이 인상적이다.
죽음만큼이나 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음식이다. 다이고가 구더기 낀 음식물 사이에 방치된 악취 진동하는 시신을 수습하고 온 날,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아내는 닭 육회를 식탁에 내놓는다.

낮에 본 장면들이 떠오른 다이고는 헛구역질을 하다 이내 울면서 아내를 끌어안는다. 영화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될 때마다 음식을 먹는 행위가 이어진다. 다이고가 사직을 결심하고 사무실에 간 날 사장은 식사를 하고 가라고 붙든다. 그리고 화로에 구운 복어 정소(精巢)를 먹으며, 미안스럽게도 맛있다고 말한다. “생물은 다른 생물을 먹고 살아간다”는 사장의 말은 인간 삶의 본질을 담고 있다. 삶과 죽음이 궁극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나의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생물의 희생이 뒤따른다는 사실이다.
다이고는 어린 시절 쓰던 첼로 케이스를 오랜만에 꺼내는데, 거기서 신문지에 싸인 커다란 돌덩어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다이고의 아버지가 집을 나가기 전 부자가 주고받았던 ‘돌 편지’이다. 자기의 마음을 닮은 돌을 주워 상대방과 교환하는 것이 돌 편지라고 알려주면서 아버지가 다이고에게 줬던 돌이다. 영화 끝부분, 다이고는 객지에서 홀로 사망한 아버지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게 된다. 그리고 꼭 쥔 아버지의 주먹 안에 든 작은 조약돌을 발견한다. 과거 아버지와 교환했던 자신의 돌이다. 자신의 마음은 이처럼 작은 조약돌이지만,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그 커다란 돌덩이만큼 크다는 걸 깨달으며 다이고는 아버지와 화해한다.
우리는 흔히 ‘도전’을 어려운 과업을 설정하고 그를 완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마라톤 완주를 목표로 세우고 마침내 해냈을 때 도전에 성공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특별한 사건보다는 반복되는 일상으로 채워진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고 또 비슷한 내일이 기다리는 속에 가끔씩 예외의 순간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영광스러운 결실을 맺는 순간도 있지만, 참담한 실패를 마주하는 순간도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인생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깊은 허방에 빠지곤 한다. 실패에서 무사히 탈출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