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트 코리아》 공저자가 말하는 공간력
요즘 ‘힙플레이스’로 손꼽히는 서울 성수동에는 특색있는 소비공간이 많아졌다. 온라인 편집숍인 29CM도 성수동에 오프라인 스토어 ‘이구성수’를 마련했다. 소비자들과 스킨십을 하고자 온라인에 머물지 않고 오프라인으로 진출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오프라인 스토어에서는 흥미로운 모습이 관찰된다.
제품을 ‘진열’하지 않고 예술작품처럼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29CM에 입점된 다양한 브랜드를 소개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브랜드 소구를 위한 팝업 공간을 운영한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는 작은 덴마크를 주제로 덴마크의 주요 리빙 브랜드를 소개하는 큐레이션 쇼룸을 마련했다. 브랜드 ‘프리츠한센’의 대표작품을 활용한 설치 작품을 선보이거나 브랜드 역사를 소개하기 위해 ‘작업실 공간’을 테마로 한 전시를 진행한 것이다.
이구성수는 오프라인 소비공간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옷가게인지 갤러리인지 헷갈리는 이곳뿐만 아니라 성수동에는 형형색색의 팝업 공간이 즐비하다. 2023년 9월 현재에는 주마다 50개 내외의 팝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패션·식품·유통은 물론, 금융사에서 공공기관에 이르기까지 업종을 막론하고 소비자를 사로잡기 위한 콘텐츠를 가득 채운 공간을 열고 있다.
새로운 공간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면서, 공간을 ‘팝업Pop-up’시키는 것만으로는 새로움을 줄 수 없게 되었다. 공간을 화려하게 꾸며도 잠시 시선을 끌지만 이내 사라지는 불꽃놀이처럼 볼거리에 그치게 된다.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과 메타버스 같은 제3의 공간까지 등장하면서 소비자를 사로잡기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제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머물게 하는 힘, ‘공간력’을 가진 공간이 주목받는다. 소비 공간이 공간력을 갖추기 위해 변화하는 양상을 세 가지로 소개하고자 한다. ‘매거진화’, ‘테마파크화’, ‘피지털화’가 그것이다.
소비공간의 첫 번째 변화는 ‘매거진화’이다. 종이 매체에 비유하자면 카탈로그에서 매거진으로 소비공간의 성격이 변화한다. 카탈로그의 경우, 상품을 소개하고 구매를 돕기 위해 가격과 스펙 등 제품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반면, 매거진은 구매보다는 소비자들에게 감각적인 이미지를 중심으로 소구하며 브랜드 경험을 전달하려 한다. 소비공간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의 소비공간은 구매가 일어나는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구매 대신 ‘경험’에 초점을 둔다. 다만 2D인 종이 잡지와 다르게 공간은 오감을 총동원하는 방식으로 경험을 설계한다.
LG전자에서 세 차례 진행한 ‘금성오락실’ 팝업 공간도 그러했다. 과거 전자제품 회사에서 팝업 공간을 진행한다면 제품 진열대와 할인판매 이벤트가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팝업 공간에서는 ‘구매’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소비자들이 자연스럽게 제품 경험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LG전자의 옛 이름 ‘금성’에서 느껴지듯이, 옛날 감성을 요즘에 맞게 재해석하는 ‘뉴트로new+retro’ 트렌드에 맞춘 이 공간은 전자 오락기가 가득했던 옛날 오락실을 콘셉트로 했다. 흥미로운 것은 시끄러운 전자음과 함께 오락실의 분위기를 돋우는 색깔 화려한 게임 화면을 LG전자의 OLED TV로 채운 것이다. 특히 화면을 곡면으로 구부릴 수 있는 ‘올레드OLED 플렉스’ TV로 즐기는 레이싱게임을 마련한 것이 소비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남다른 몰입감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거진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구독’이라는 형태로 매달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인터뷰 기사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오프라인 소비공간 역시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츠를 채워서 소비자를 유혹한다. 공간이 플랫폼화되는 것이다. 여의도에 위치한 더현대 서울은 백화점 특성상 임대 매장을 자주 변경할 수는 없지만, 핫한 브랜드를 팝업으로 유치하여 트렌디한 감성을 이어간다. 대규모 공간을 확보한 유통점만이 아니라 작은 가게에서도 팝업 형식으로 콘텐츠를 업데이트한다. 성수동에 위치한 GS25 ‘도어 투 성수’점은 매장 입구 부분을 다양한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하는 팝업 공간으로 운영한다. 덕분에 오가는 소비자들은 어떤 재미있는 콜라보가 진행 중인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공간이 제공하는 콘텐츠는 다양한 형태를 띌 수 있다. 서두에서 소개한 이구성수에서는 남성 패션을 주제로 전시를 진행하는 동시에 남성 고객들을 초청하여 패션 인플루언서의 스타일링법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마치 잡지 구독자들이 매달 어떤 콘텐츠가 실렸는지 기대하는 것처럼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를 다채롭게 마련하는 것은 끊임없이 공간을 찾게 하는 매력으로 작용한다.
소비공간의 두 번째 변화는 ‘테마파크화’이다. 테마파크는 시·청각은 물론, 공간 안에서의 모든 활동에 공간의 테마, 즉 세계관이 반영된다. 네덜란드의 ‘드 카스De Kas’라는 온실 레스토랑은 ‘오전에 수확하여 오후에 먹는다(HARVESTED IN THE MORNING, ON YOUR PLATE IN THE AFTERNOON)’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레스토랑의 요리는 물론, 준비 과정부터 공간구성에 이르기까지 ‘로컬’과 ‘지속가능성’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먼저 레스토랑 건물은 1920년대에 지어졌으나 사용하지 않는 온실을 식당으로 개조한 것으로 낮에는 식사하며 주변 온실에서 기르는 작물을 볼 수 있고 저녁에는 밤하늘 별을 볼 수 있다. 식재료 역시 주변 온실에서 재배하는 것이라 직원들이 작물을 돌보고 수확하는 장면도 마주치곤 한다. 방문객들은 식사를 넘어서 세계관을 경험하고 가는 것이다.
테마파크의 또 하나 특징으로 ‘연예화entertainment’를 들 수 있다. 소비공간에서도 재미와 즐거움을 지향하는 것이다. 뉴욕의 백화점 ‘쇼필즈Showfields’는 제품이 아니라, 말 그대로 쇼show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입점한 브랜드들은 각자의 공간을 테마룸처럼 꾸며놓고 마치 공연을 하듯 정해진 시각마다 소비자들에게 제품을 활용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이때 각 브랜드를 담당하는 직원들은 배우 혹은 공연가가 되어 브랜드 가치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소매유통과 판매원의 정의도 변화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비공간의 세 번째 변화는 ‘피지털화’이다. ‘피지털Physital’이란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Physical’과 ‘디지털Digital’의 합성어로, 오프라인 공간에 디지털 기술을 입혀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변화를 일컫는다. 특히, 디지털을 활용한 새로운 경험 중 하나는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없애는 ‘심리스seamless’한 경험, 즉 편리함의 극대화이다. ‘발란’과 같은 패션 매장에서 도입하고 있는 모바일 앱 연동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매장에 방문할 때 앱을 통해 실시간으로 매장 내 재고를 확인할 수 있으며 옷을 입어보는 과정에서는 스마트 거울에 자신이 등록해놓은 계정 정보가 반영되어 피팅을 돕는다. 번개장터에서 선보인 ‘BGZT랩’에서는 매장에서 명품 중고를 구매할 때 정품 여부를 확인하고 소유권을 인증할 수 있도록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워런티 서비스’를 제공한다. 소비자는 구매 시 상품의 QR코드를 스캔하기만 하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피지털화는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는 방식으로도 활용된다. 스포츠 브랜드 ‘인터스포츠Intersport’에서는 매장 곳곳에 디스플레이를 배치했다. 각종 스포츠 영상을 재생하여 스포츠에 대한 동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전신 크기의 디스플레이와 런닝머신을 활용하여 실제 러닝을 즐기는 상황을 구현해놓기도 한다. 소비자들은 추천받아 고른 신발을 신고 뛰는 체험을 할 수 있다. 피팅룸을 재미있게 활용하기도 한다. 전술한 ‘발란’ 매장에서는 소비자들이 직접 피팅룸의 조명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사진찍기를 즐기는 2030 소비자들의 경험을 고려한 것이다. 공간은 이제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공간에 정답은 없다. 다만 소비자에게 그곳에 방문해야만 하는 이유, 대체 불가능한 경험을 제안해야 할 것이다.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 공저자.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졸업하고 소비트렌드 연구자로 일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소비자와 시장’을 강의하며 소비자와 시장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탐구한다.
글 권정윤(서울대 소비자학과 박사,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 공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