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승규(페렙 대표)
코로나19 거리두기가 풀리면서 오랜만에 지역축제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지역주민들에게는 소통과 화합의 장이 되어주고 관광객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하는 지역축제가 올곧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본격적인 축제 시즌을 맞아 우리나라의 지역축제에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더 발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문화체육관광부 집계에 따르면 한해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지역축제의 수는 코로나19 이전 1,004개로 집계되었다. 이는 민간이 개최하는 축제를 제외하고 정부와 지자체가 주최 또는 지원하는 축제의 연간 개최 수다. 혹자는 이러한 수치를 앞세워 경제적 이득이 크지 않은 적자 축제들이 지역 곳곳에서 지방재정을 축내고만 있다고 폄하하며 축제 공화국이란 비아냥 섞인 말로 축제 무용론을 주장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축제는 경제적 이득만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축제의 역사와 기원, 그리고 유수한 축제들이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운영되는지 살펴본다면 축제의 개최 목적과 궁극의 가치 지향점이 경제적 이득이 아닌 지역 공동체의 강화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준비 과정에서 지역 공동체 내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이 일상에서 증진되면 지역사회 전체 구성원의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효과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 축제는 하나의 동질적 문화 생활권을 가진 지역민들이 규합하고 화합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사회적 장치란 뜻이다. 또한, 개인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지역민들이 지역에 대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통해 공동체성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러한 축제의 공동체성 증진과 강화는 축제 기간보다는 축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다. 이는 관람객 수, 관광객 수, 경제 유발효과 등의 정량적 수치를 중요시하는 우리들의 결과 중심적인 축제에서는 쉽사리 얻어지기 어려운 과정 중심 축제의 이상적 모습이다.
과정 중심의 축제는 축제의 매력도를 높이는 중요한 시스템이다. 축제를 보러 가는 관람객들은 지역민들이 오랜 시간 지켜낸 전통 의례와 전통 놀이가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된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뒤섞으며 펼쳐내는 축제의 일탈과 비일상적 집단 행위에 큰 감동을 받는다. 여기서 관람객들이 감동하는 것은 소수 전문연희자의 화려한 쇼 또는 많은 돈을 들여 쌓아 올린 화려한 무대가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시민들이 스스로 지켜내고 쌓아 올린 그 지역만의 공동체적 놀이가 그 중심이다.
이러한 축제들은 애초부터 관광객을 유치해 관광 수입의 도구로 삼고자 만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시민들 역시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축제를 돈을 주고 소비하거나 돈을 받는 일거리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 다수의 우리나라 축제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시민들이 축제에 직접적, 자발적으로 참여해 축제 자체에서 즐거움을 꾀하려는 목적의식을 머리로는 이해하나 우리의 축제 현장에서는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축제도 이제 그저 매년 하는 연례행사라는 의무감에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구호처럼 외치는 지역경제활성화라는 허물을 벗고, 실질적으로 축제를 통해 함께 삶을 영위하는 지역문화공동체 놀이로서 강한 유대감과 소속감을 갖고 이를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사회적 행복감을 경험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를 두고 사회인류학자 빅터 터너는 축제를 ‘리미날리티(Liminality)와 코뮤니타스(Communitas)의 창조’라고 말했다. ‘리미날리티’는 집단적 놀이를 통한 흥분, 전율, 일탈, 해방감, 신명 등의 감정을 말하며, ‘코뮤니타스’는 리미날리티를 함께 경험하는 공동체 안에서 일체감, 동료애, 동질성을 갖게 해주는 축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말이다.
축제는 산업화와 정보통신의 발달로 점점 강화되는 개인화 과정에서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거의 유일하게 남은 고차원적 사회 공동체 놀이다. 축제의 목적은 단순히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회적 행복 추구에 있다. 축제 개최의미와 필요성은 주민 행복 추구만으로도 충분하며, 개최 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오로지 축제를 통해 지역사회 구성원의 행복을 추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판가름만이 중요할 뿐이다.
이미 축제전문가를 비롯한 지역 관계자들은 시민의 행복 추구 관점에서 시민주도형, 참여형 축제에 대한 지향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하고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 축제를 기획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이러한 목적의식은 무력화되거나 예산, 준비기간, 시민과의 소통 등 절차상의 어려움 등으로 시도조차 못 하고 여전히 외형적 성장 부풀리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렇다 보니 매년 전통성, 연속성, 시민 주도성 없이 일회성 형태의 이벤트로 화제와 이슈 거리를 찾아서 관람객 모으기에만 치중하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임시처방만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축제의 주인이자 축제를 만들어야 할 주요 구성원인 지역민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있으며 주인 없는 축제에서 외지 사람들은 흥미도 감동도 얻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지역민들의 참여나 축제에 대한 만족감, 행복감 없이 그저 지역경제 활성화란 명목으로 인기가수와 화려한 무대, 수많은 홍보부스와 먹거리 텐트로 외형적 치장만 갖춘 축제는 경제적 득실을 떠나 그저 쓰레기와 교통체증 등 사회적 불편만 증가시킨다. 이는 즐겁고 행복한 긍정적 단어가 되어야 할 축제를 지저분하고 너저분한 술판, 요란하게 귀를 자극하는 시끄러운 음향 소리에 사람만 북적거린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축제는 이제 지역경제활성화라는 그저 듣기 좋고 허울 좋은 말로 포장되어 수개월 안에 뚝딱 만들어지는 인스턴트 같은 축제가 아니라, 지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여하고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축제의 수혜자가 지역민 스스로가 되는 공동체 놀이로서의 순수한 축제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오히려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순기능을 끌어내는 매력적이고 경쟁력 있는 축제를 만드는 최선의 방편이다. 또한 세대를 거쳐 가며 축제가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면 과연 어떤 형태, 모습을 갖추는 것이 ‘시민주도’로 만들어지는 좋은 축제일까? 그 궁금증을 풀어줄 해외 축제 사례를 소개한다.
첫째는 누구나 한 번쯤 보거나 들어본 적 있는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이다. 축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그 이름과 명성을 익히 잘 알고 있을 만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축제다. 천주교 문화권의 유럽에서 시작된 카니발 문화가 유럽의 식민지 시대 노예무역과 함께 넘어가서 시작된 리우 카니발은 유럽문화와 현지 문화 그리고 아프리카 문화가 뒤섞여 카니발의 종주국인 유럽보다 더 화려하고 거대한 규모의 세계 최고의 축제로 발전했다. 리우 카니발의 성장과 유명세의 중심에는 카니발의 핵심인 삼바 공연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커뮤니티, ‘삼바스쿨’이 있다. 리우데자네이루 최초의 삼바스쿨은 1928년 등록된 ‘데이샤 팔라르(Deixz Falar)’로, ‘삼바 퍼레이드경연’에 참가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삼바스쿨은 해를 거듭할수록 지역민들을 규합하는 공동체 커뮤니티의 성격이 강해졌으며 거리에 방치된 빈민가 아이들에게 문화예술교육의 장으로 기능하기 시작해 현재 리우데자네이루에만 200여 개가 존재한다. 이렇게 지역에 포진된 삼바학교는 축제를 계기로 만들어지고 운영되지만, 축제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는 지역민의 일상적인 문화예술공간이자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두 번째 사례는 스페인의 ‘탐보라다’이다. 탐보라다는 19세기 산 세바스티안을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가 북을 두드리며 행진하는 모습을 보고, 여성들과 요리사들이 침략자를 조롱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양동이와 주방 도구를 두드린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축제의 유래에 따라 탐보라다는 산 세바스티안 사람들을 뜻하는 도노스티아라스(Donostiarras) 약 15,000여 명이 100여 개의 밴드로 나뉘어 24시간 동안 도심 곳곳을 돌아다니며 드럼을 친다. 이때 축제의 중심에 서 있는 도노스티아라는 전문 연주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코프라디아스(cofradías, 형제회), 에르만데다스(hermandades, 자매회), 투르바스(turbas, 군중), 쿠아드리야스(cuadrillas, 분대), 페냐스(peñas, 집단) 등의 이름을 가진 민간 협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협회는 세대와 세대를 이어 축제가 존속될 수 있도록 시민들을 조직하고 북을 치는 연희를 전수하는 중요한 시민 조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조직을 통해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강한 소속감을 갖게 된다. 심지어 이민자들마저 수용하여 사회에 자연스럽게 통합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 창구도 되어준다. 축제는 이들을 빼고서는 만들어질 수 없으며 시민들은 진정한 축제의 주인공으로서 존재한다.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헤아릴 수 없는 산 세바스티안의 사람들이 마을 광장에 모여 북소리에 맞춰 한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광경이다. 여기에 관객은 없다. 광장에 모인 모든 시민이 축제의 주인공이다.
끝으로 소개할 축제는 네덜란드의 ‘코르소 준데르트’이다. 화훼 산업국가로 오랜 명성을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의 꽃 축제로 대형 플로트카를 꽃으로 장식하고 도심을 행진한다. 이 축제의 핵심인 플로트카는 수개월의 디자인 작업부터 시작해 꽃차를 장식할 꽃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과정, 플로트카의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꽃을 장식하는 과정, 마지막으로 플토트카가 도시의 광장으로 행진하는 과정까지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라는 준비기간이 소요된다. 그 모든 과정은 시민들의 참여로 이뤄진다. 플로트카는 준데르트 20개 마을에 분산 설치된 햄릿이라는 텐트에서 각 마을을 대표하는 플로트카를 만들어 경연하는 방식으로 준비된다. 약 5~6개월의 과정을 걸치는 플로트카의 제작과정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한다. 주민이라면 누구나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데 꽃을 따서 선별하고 운반하는 작업은 노인들이 맡고, 트러스 구조물에 올라가 플로트카에 꽃을 장식하는 역할은 젊은 사람들이 담당한다. 플로트카 작업에 참여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햄릿 앞마당에서 식구들과 함께 가벼운 피크닉을 즐기기도 한다. 이들에게 축제는 플로트카를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벌써 시작되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축제의 공동체성 강화란 기능은 이 과정에서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여 만든 20개의 플로트카는 햄릿에서 출발하여 거리의 광장으로 행진하는데 그 규모와 예술성은 시민들이 만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고 웅장하다. 자발적 시민의 힘이야말로 최고의 축제를 만드는 힘이란 것을 일깨워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나라는 1995년 지방자치제 도입 이후 지방자치단체가 지역경제활성화란 이름으로 경쟁적 또는 선심성 공약으로 축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축제가 전체 1,000개의 축제 중 800여 개에 이른다. 즉 10개 중 8개는 불과 30년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인 축제들이 수백 년을 이어온 것과 비교하면 아직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걸음마 단계의 축제들이다. 이런 걸음마 단계의 축제들이 올곧게 성장하여 제대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지역축제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에 대한 처음 출발지의 고민을 다시 되짚어야 할 때다. 조금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에 대한 답을 찾고, 그 답을 시민들과 공유하고, 축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시민들과 함께해야 한다. 이제 값비싼 조명과 음향으로 치장된 무대에 더 값비싼 유명 가수들을 섭외해 치러지는 관광 소비형 축제를 지양하고 축제의 무대에 시민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축제 시민들을 양성하고 조직하는 일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시민중심, 시민주도, 시민행복을 추구하는 공동체 놀이로서의 축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시민들의 공감과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지속가능한 축제 생존 방법의 유일한 수단이다.
인문, 사회, 역사, 문화, 예술이 총망라된 살아있는 지역문화유산의 집약체인 축제를 여행하는 축제 탐험가. 축제기획사 페랩의 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