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도 삶은 흐른다네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1980년 사강수산물시장 거리ⓒ 화성시청 포토갤러리

사강沙江. 오래전 마을 어귀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어 강을 이뤘던 곳이다.
유난히 모래가 많은 지역이라 하여 사강리라 불렀다.
바닷길이 막히면서 사강의 풍경은 바뀌었고, 번성했던 옛 영광을
기억하던 주민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삶의 여정을 실은 배 그리고 서해

서해는 지역민들의 귀중한 터전이었다.
싱싱한 해산물이 넘실대는 보물창고였고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은 임금에게 진상되는 명품이었다. 오늘날 육로로 연결된 대부도, 제부도, 어섬, 우음도 등의 서해도서는 오래전만 해도 바다로 분리되어 있었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사강시장에서 구매했다. 특히 사강 우시장에서 소를 산 후 배에 태워 섬으로 돌아가는 게 보통의 일상이었다.
온갖 해산물을 팔던 어시장도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간척사업과 함께 사강시장을 비롯한 서부 일대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해안 연안을 육지로 개간하는 간척사업이 진행되었고, 1987년에 시작된 시화방조제 공사는 바닷물의 흐름을 틀어막았다. 먼저 1988년에 화성과 대부도를 잇는 선감·불도·탄도방조제가 들어서며 아래쪽 바닷물을 막았고, 1994년 오이도와 대부도를 잇는 시화방조제가 들어서면서 화성 서북쪽, 송산면 연안으로 향하던 물길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뒤이어 2003년 우정읍과 서신면 일대에 화옹방조제가 건설되며 아래쪽 바닷길마저 막히자 화성 일대의 지형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사강시장

하늘에서 내려다본 사강시장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사강

이에 따라 사강의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본래 섬이었던 어도, 형도, 우음도 등은 육지가 되어버렸고 어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버렸다. 연달아 대부도가 육로로 이어진 뒤 안산시로 통합되면서 화성시로 향하는 선박은 사라졌다.
화성 대신 시흥과 안산으로 향하는 대중교통이 이 자리를 대체했다.
서해 연안에 분포되어 있던 염전 또한 바닷물이 끊기자 문을 닫았다.
사강시장의 주 고객층이었던 소금밭 일꾼들도 떠났다. 이렇듯 사강시장을 이용하는 인근의 주민 대다수가 외부로 유출됨과 함께 기존 주민들이 고령화에 접어들면서 시장의 활기도 점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사강시장은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 사강시장 상인회와 주민협의체,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가 함께 협업하며 낙후시설 정비, 도시재생 우수사례 학습, 홍보 프로그램 창안 등 다양한 방면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사강시장 오일장

사강시장 오일장

화성을 대표하는 장터, 푸짐한 인심은 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사장시장은 발안, 조암, 향남과 함께 화성을 대표하는 4대 시장으로 공고히 자리하고 있다. 서해와 인접해 삼국시대부터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주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당시 1,000여 명이 군집한 만세운동의 배경이 됐다.
시대를 거치며 세를 키워온 사강시장은 오늘날 총면적 32만 8,680㎡에 달하는 전통시장으로 성장했다. 시장에는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잡화와 식재료, 의류 및 기타 상가들이 입점해 있다. 인근 해역에서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을 판매하는 회 센터 거리가 있어 주말마다 주민들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특히 오일장(2·7일)에는 다양한 시장의 먹거리는 물론 시장 상인들의 인심까지 맛볼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사강은 독립운동가의 마을이다. 오늘날 사강 거리를 거닐다 보면 이곳저곳 눈에 띄는 안내판들이 많다. 독립운동가의 생가터를 알리고, 후손들이 기억해야 할 공간을 표시한 이정표이다.
허전했던 마을 벽면은 각각의 의미와 개성을 담아 조형물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 ‘역사를 기억하는 거리’는 선대의 용기에 감사함을 표하고, 지역의 애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독립운동의 고장, 사강에서 처절하고도 치열했던 민족의 역사를 마주하기를 바란다.

ⓒ 이호승

* 참고문헌 《사강 : 마음을 사는 시장》

* 참고문헌 《사강 : 마음을 사는 시장》 ⓒ이호승

글 편집실

사진 박성환·조형기·이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