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배우는 일상의 성스러움

조현익 작가의 방

머리를 풀어헤친 나체의 여인이 날카로운 빛에 몸을 베이고 ‘믿음의 도리’라 적힌 전단지가 아파트 우편함을 가득 메우는가 하면, 다리와 얼굴이 붙은 콩순이가 해맑게 웃고 있다. 재료와 물성, 컬러와 분위기까지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작품들. 조현익 작가는 이 모든 것이 곧 ‘일상의 성스러움’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시각예술인 조현익입니다. 2005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운 좋게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네요.(웃음) 초기엔 빛을 잔뜩 머금거나 녹이 슨 철의 양면적 물성을 최대한 활용해서 사랑하는 대상을 우상화처럼 만들었어요. 철의 빛과 어둠의 이원적 상징성을 토대로 마치 제의적 의식을 치르는 제단처럼 보이는 설치 작업도 했죠. 그 후에는 신앙이나 종교에 관한 사유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맹목적인 믿음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은 육아 중 포착한 소소한 대상들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고교시절 인문계고에 다녔는데, 고2 때 미술선생님의 권유로 뒤늦게 미술을 공부해 순수미술 전공의 미대로 진학했습니다.
대학원 진학과 함께 조교생활을 병행했고, 졸업 후에는 친구와 구의동 반지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기도 하고, 양평의 산 속 작업실에서 홀로 4년간 지내기도 했죠. 그러다 2012년 무렵 한 국내 레지던시에서 만난 동료 작가이자 현재의 아내와 결혼해 두 아이의 육아를 하면서 작업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특별히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네요. 그저 끊임없이 작업에 관한 생각을 하면서 제 자신을 시험하는 환경에 몰입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온 제 작업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제가 처한 ‘지금’의 상황들을 대변하고 있어요.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일상의 성스러움’으로 함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랑에 빠지고 실연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일, 이런저런 일상 속 삶의 서사적 경험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 겪는 일이지만, 저는 이러한 삶의 순간순간이 결코 다시 오지 않는, 어쩌면 그 순간이 삶의 전부로 여겨지는 것들을 작업과 자연스럽게 연결하게 됐습니다. 단순히 ‘삶을 통해’ 소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곧 작품의 원천이자 목적이며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렇기에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들이 작업의 소재이자 대상이 되는 겁니다.

당신은 어떤 작업을 하나요?

육아와 작품활동이 밀착된, 삶이 곧 작업인 날들을 살고 있어요.(웃음) 아이들이 시시각각 행동하는 삶의 순간들 속에서 제게 울림을 주는 소재들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세부적으로는 2020년 경부터 새로운 <성화(Neo Icon)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기존의 종교적 이콘화의 개념이 아닌 일상 속의 작지만 특별한 소재를 성스럽게 부각시키고 기록하고자 기획한 프로젝트인데요, 아무래도 육아를 하다보니 그러한 상황이 많이 반영되고 있어요. 아이와 맞닥뜨렸던 순간들 중에서 인상 깊은 주제를 포착해서 그 의미를 부각시키는 작업입니다. 예를 들면, 아직 종이 접기에 미숙한 유아가 나름의 종이 접기 행위를 통해 의미를 부여한 형상과 색채를 회화로 담은 <조형연구 시리즈>와 아이가 소꿉놀이할 때 제게 차려준 특별하고 소중한 밥상을 금빛 찬란하고 원색적인 회화와 꼴라주 작업으로 만든 <만찬 시리즈>가 있어요. 아이가 해체하고 분리한 장난감들의 수난을 담은 <순교자 시리즈>와 일상의 성스러운 풍광을 담은 <가족사진 시리즈>, 그리고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일상과 사물을 회화로 제작한 <무지개 시리즈> 등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항상 느끼지만 아이들은 늘 경이로움을 보여줘요. 어른의 눈으로 볼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느 순간 새롭게 보일 때가 있거든요. 분위기 있는 무채색만 선호하던 제가 튀어서 싫어하던 원색을 다시 보게 된 것도 신기해요.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그 천재성에 감탄하게 되고, 이윽고 새로운 보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물찾기를 하다보면 문득 기억하지 않으면 그냥 흘러가버릴 매 순간이 소중하게 여겨져 반성을 하게 돼요. 소우주는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곳의 별들을 바라봐주지 않고 무심코 지나친다면 너무 서글픈 일이잖아요. 그걸 소중히 함께 바라보는 역할이 현재 제 작업의 모티브입니다.

당신의 작업실은 어떤 곳인가요?

고양시 벽제에 거주하다 2017년 봄 무렵에 봉담읍으로 이사왔어요. 화성에 산 지도 벌써 5년이 됐네요. 아내는 근처의 허름한 곳을 월세 작업실로 쓰기를 원했는데, 더 이상 온갖 그림들과 짐을 이고지고 다니기 힘들어서 조금 무리해서 넉넉한 공간의 작업실을 마련했습니다. 층고도 높고 쾌적한 작업실에 있을 때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아요.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고, 저를 늘 응원해주는 동료 작가이자 아내와 한 공간에서 작업할 수 있으니 더할 수 없이 행복합니다.
이곳에 와서 또 하나 더 좋은 건 화성시문화재단과의 인연이에요. 처음에는 화성시에 문화재단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화성시문화재단에서 지역작가들을 위한 사업과 지원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운 좋게 2020년에 이어 올해도 화성예술가활동지원(시각예술 분야) 작가에 선정돼 기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2020년엔 <화성예술플랫폼>에도 참여해 제작업실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실크스크린 판화 체험을 하고 제 작업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올해 저는 절단된 장난감에만 초점을 맞췄던 <엄마 까투리 시리즈> 이콘화(Neo Icon)의 네러티브를 좀 더 확대할 생각이에요. 만화영화 속 드라마틱한 주제와 풍경을 대형 회화와 사운드가 혼합된 설치미술로 각색하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어요. 아마 11월 경엔 화성시예술가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전시가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비록 자신이 비종교적 인간이라고 여기는 사람일지라도 감추어진 형태로 남아있는 현대의 신화나 의례에 의해 여전히 성스러움의 기억을 무의식 가운데 감추고 있다’라고 한 M. 엘리아데의 말처럼 모든 인간은 종교적이라고 생각해요. 제도화된 종교에 공감하지 못하는 저를 포함한 현대인들에게 성스러움의 기억을 되살리도록 자극하는 것은 예술이 부여받은 중요한 역할이죠. 좋은 예술가의 역할은 사소한 것들을 선택해 기억하게 하고,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에디터 최현주

포토그래퍼 김지은(시각예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