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세상에 천진난만함을 더하다

네버랜드 신드롬

제임스 매튜 배리의 동화 《피터팬》 속 웬디는 피터팬과 함께 후크 선장을 물리친 뒤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해서 동심을 버린 건 아니다. 자라나면서도 매년 피터팬을 보기 위해 네버랜드로 향하니 말이다. 동화 밖 진짜 세상을 사는 어른들도 마찬가지, 바쁜 일상 속에서도 틈틈이 ‘어른이(어른+어린이)’가 되어 천진난만함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다.


철없는 덕후에서 자랑스러운 덕후로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한다. ‘나도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그렇게 성인이 된 요즘 어른들은 스스로를 ‘어른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기성 사회가 짜 놓은 어른의 전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나이보다 젊고 개성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언제나 존재해 왔지만, 요즘에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 지난 2월, 전국 각지의 극장에는 때아닌 ‘빨강 열풍’이 불었다. 하나같이 빨간색 농구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양손에 빨간색 막대풍선까지 꽉 쥔 덕분에 더욱 강렬한 분위기를 사방으로 발산했는데, 이들의 행선지는 다름 아닌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상영관이었다. 마치 실제 생방송 경기를 응원하듯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빨간색 유니폼의 북산고를 열렬하게 응원한 이들의 정체는 ‘번듯하게 사회생활하는 평범한 30~40대’다. 1990년대 한창 연재 중이던 만화 <슬램덩크>의 페이지를 정신없이 넘겼던 앳된 청소년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스크린 속 북산고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열광하는 진풍경을 연출했으며, 한 영화를 여러 번 보는 ‘N차 관람’을 넘어 신장판 만화책은 물론 각종 굿즈까지 꼼꼼하게 사 모으는 <슬램덩크> ‘찐팬’으로 자리 잡았다.
만약 이런 일이 불과 10년 전에 똑같이 벌어졌다면 세상은 이들에게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십중팔구 혀를 차며 ‘오타쿠’라는 악평을 서슴없이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들에게는 ‘덕후’라는 한결 순화된, 개인의 취향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담긴 신조어가 따라붙는다. 아울러 이들의 N차 관람과 응원 상영회 참석, 굿즈 구매도 ‘쓸데없는 돈 낭비’에서 우리나라 소비 문화에 다양성을 더하는 ‘덕질’로 신분 상승했다. 이를 실행에 옮기는 당사자들 또한 스스로를 ‘나는 슬램덩크 덕후’라고 소개하고 때로는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슬램덩크>의 매력을 거리낌 없이 설파한다.

오늘에 머무르기를 택한 사람들

현재의 나이를 거부하며 북산고 선수들에게 열광하는 슬램덩크 덕후들의 원동력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라면, 트로트 가수들을 향한 중년층의 덕질은 ‘현재를 인정하되 더 나이 들지 않으려는 머무름의 심리’에 가깝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예인 팬덤Fandom의 진원지이자 중심지는 아이돌가수였지만, 오늘날에는 트로트 가수 팬덤의 영향력이 때때로 아이돌 가수 팬덤을 넘어서기도 한다. 중년층의 덕질이 보편화되면서 이들이 가진 지위와 재력이 엄청난 경제적·사회적 파급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위엄 있는 상사, 살림 솜씨 야무진 주부, 누군가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였던 이들은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 앞에서 나이의 통념과 일상의 책무를 훌러덩 벗어던진다.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는 10대 팬들이 그러하듯 이들도 자신의 가수에게 ‘조공’을 하고, 각종 굿즈를 구매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팬 카페에 드나들고, 음악방송에서 응원봉을 흔들며, 전국 투어 콘서트에 빠짐없이 출석한다. 나아가 이러한 덕질을 통해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한다.
한편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머무름이 관찰된다. 직장인의 영원한 목표였던 승진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적성과 이에 따른 자기계발이 직책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직책 반납을 뒤처짐으로 여겼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의식의 흐름이다.

일상과 재미를 접붙이다

무엇보다도 요즘 어른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아이처럼 재미있게 놀고 싶어 한다.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끈 포켓몬빵 띠부띠부실 모으기의 시작에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심리가 자리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이상으로 스티커를 모으는 과정 속에서 재미와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이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는 방법은 포켓몬 캐릭터와의 접점을 늘리는 일이며, 사람들은 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올 초 서울의 한 호텔은 포켓몬 캐릭터를 활용한 객실 패키지를 출시했는데 테마룸 1박 투숙, 포켓몬 한정판 어메니티 증정 등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빵에서 나오는 작은 스티커가 굿즈 모으는 재미, 여러 방법으로 캐릭터를 즐기는 기쁨으로 연결된 셈이다. 이른바 ‘신사 스포츠’라 불리며 비교적 진지한 운동으로 분류됐던 골프도 재미를 추구하는 어른이들 앞에서는 명랑한 운동으로 변화한다. 이들은 자세 교정과 근력증강을 통한 비거리 늘리기와 타수 줄이기 대신 필드의 청량한 분위기와 그곳에서의 산책 같은 이동, 동행한 이들과의 담소와 추억에 집중한다. 승부 대신 재미를 택한 덕분에 골프는 명랑해질 수 있었으며, 이른바 ‘명랑골프’는 11월 현재 동명의 해시태그를 붙인 SNS 게시물이 60만 개를 넘어섰을 정도로 수많은 ‘골린이(골프+어린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어른이들은 자칫 추레해질 수 있는 상황도 재미로 반전시킨다. 코로나19, 국제 정세 등으로 인한 경기 불황이 계속되다 보니 되도록 돈을 아끼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직장에 도시락 싸 가기, 하루 지출 0원 만들기, 걷기 운동으로 교통비 줄이기 등 나름대로의 도전 과제를 설정하고 수행하는 일종의 게임과 같은 방식으로 지갑을 닫는다. 이것이 바로 요즘 MZ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무지출 챌린지’다. 돈 아끼기에 ‘챌린지’라는 재미있는 형식이 붙은 이상, 절약은 이들에게 궁상맞은 일이 아니라 지출을 줄이면서 소소한 재미까지 즐길 수 있는 일상 속 놀이다. 어른이들이 얼마나 재미에 ‘진심’인지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송가인을 응원하는 팬클럽 ©송가인 인스타그램

송가인을 응원하는 팬클럽 ©송가인 인스타그램

호텔 서울드래곤시티가 포켓몬 코리아와 협업해 조성한 포켓몬스터 테마방 ©서울드래곤시티

호텔 서울드래곤시티가 포켓몬 코리아와 협업해 조성한 포켓몬스터 테마방 ©서울드래곤시티

어른이들이 만들어 갈 ‘다이내믹 코리아’

돌아감, 머무름, 놀기 등 지금껏 살펴본 어른이의 세 유형은 ‘네버랜드 신드롬’이라는 말로 통합할 수 있다. 동화 《피터팬》의 주요 배경인 네버랜드에 간 아이들은 늙지 않는다.
이를 요즘 나이 들기 거부하는 어른들의 경향성에 빗대어 만든 신조어이자 사회적 현상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회의 유년화’는 특정한 일부 집단의 취향이 아닌, 남녀노소를 불문한 우리 모두의 사고방식이자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네버랜드 신드롬의 근본적인 원인은 ‘기대수명 증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구나 환갑잔치를 챙기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거의 챙기지 않는다. 예전에는 환갑까지 살면 장수한 것으로 간주해 잔치를 벌인 반면, 오늘날에는 특별한 질병이나 사고가 없다면 누구나 환갑 이상의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인간의 수명이 100세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속속 나오고 있는 상황. 수명의 증가는 곧 청춘의 범위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던 어른의 전형적인 틀을 빠르게 허물어트리고 있다. 이제는 10~30대는 물론 60~70대도 청춘을 부르짖는다. 이처럼 어른에 대한 정의가 혼란을 겪고 있기에, 젊음과 어림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회의 유년화가 성인의 미성숙함을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차피 우리 사회가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것보다 긍정적인 면을 최대한 활용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네버랜드 신드롬은 우리 사회에 역동성과 개성을 부여하는 데 일조했다. 어른으로서 감당해야 할 힘든 일들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어차피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활기차고 즐겁게 살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러한 마음가짐에 배움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식과 지혜를 잘 버무린다면, 네버랜드 신드롬은 우리 사회에 역동성을 더하는 긍정적 방정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글 강진우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