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에서

작가 김현진과의 산책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고 누가 만들어 놨는지도 모르는 곳. 이름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대신 부르는 모든 소리가 이름이 되는 장소. 사람들이 그저 스쳐 지나는 언덕을 한 사람은 잊지 않고 종종 찾아간다.

봉담읍 와우리

선택이 늘 중요한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선택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고 또 그것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름과 성별, 태어난 곳과 자란 곳. 몇 가지만 생각해 봐도 그렇다. 의식과 취향이 모양을 갖춘 후에 우리는 이름을 새로 짓기도 하고 성별마저 새롭게 인식하기도 하지만, 또 고향의 정의도 다시 내려보지만, 그 모든 것의 배경은 ‘선택하지 못한 것’으로 채색돼 있기 마련이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들이 끝끝내 나를 관통하고 있다니, 그런 생각에 한편으로 답답하고 또 한편으로는 묘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김현진 작가는 화성시 봉담읍 와우리에서 유년을 보냈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듯 부모님이 살던 곳이 그에게도 고향이 되었다. 등하교를 하며 지나던 길,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하던 장소, 달리기를 하던 구간이나 넘어져서 무릎이 까진 길. 그곳의 풍경은 자연스럽게 그의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을 것이다.

내가 지나던 길

“등하교를 위한 제일 빠른 길이 있었어요. 지나온 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는데요. 정확한 길 이름은 모르지만, 지도에서 찾아보니 ‘임광3차중문’이라는 버스 정류장이 나오네요. 성인이 되고 나서는 일상에서의 환기가 필요할 때 한 번씩 찾아가곤 했어요. 반려견과 함께 들르기도 하고요. 와우리에서 하늘을 가장 넓게 볼 수 있는 곳이어서 공군이 에어쇼를 할 때 한참 앉아서 구경하던 추억도 있어요.”

그가 알려준 언덕에 찾아가 보니, 언뜻 작은 꼬마가 서 있는 풍경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 커버린 내 눈에는 허름한 집 몇 채와 오래 자란 나무들이 보일 뿐이었다. 군데군데 재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그곳은 이제 마을이라는 작은 이름도 붙이기 어색했다. 등 뒤로 빼곡하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 내는 긴 그림자들이 하루에도 몇 시간이나 그곳을 그물처럼 덮고 있을 것이다.

시간은 금세 오후 4시가 되었다. 하굣길을 가득 채우는 학생들 무리를 멀리서 바라보다가 나는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골목이 시작되니 멀리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였다. 자고 있다가 놀라는 고양이들과 사람 손길이 닿은 작은 물건들이 차분한 생기를 느끼게 했다. 집 안에서와 다를 바 없는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싫다고 해서 내가 허탈하게 웃었더니, 할머니들이 놀리듯 따라 웃었다. 이 풍경들은 나의 것이 아니었지만, 잠시 그의 기분을 상상해 볼 정도가 돼 주었다. 또 한편 내 유년의 골목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일게 하기도 했다. 잠시 상상한 것만으로도 그 장소들이 얼마나 변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누가 나를 그곳에 데려다주면 나는 그 장소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 운 좋게 장소들이 거의 변하지 않았더라도, 사는 동안 내 머릿속의 오래된 기억들이 변해 버려서 일치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별히 좋았다는 날을 기억하기보다는 그곳에서의 풀과 바람, 언덕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바쁜 삶을 바라보고 즐기며 돌아갔던 날들을 기억해요.”

김현진 작가도 어쩌면 유년의 기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직 없어지기 전의 풍경, 현재 삶과의 대비되는 그 분위기를 느껴보려고 이곳을 찾는 게 아닐까. 그런 것이라면 친구가 아니라도, 서로 얼굴을 모르더라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사라져 가는 이 마을이 커다란 정류장처럼 느껴졌다.

풍경이 그림이 되는

과정

“어느 할아버지가 언덕까지 식탁 의자를 가지고 나오셔서 해 지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사색을 즐기던 모습이 기억나요. 그게 이곳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에요. 그 풍경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죠.”

고양이가 더 없나, 혹시나 내가 앉으면 다가와 줄 녀석들은 없나 살피며 걷고 있을 때, 한 노인이 거짓말처럼 의자를 가지고 나와 길 한쪽에 나를 등지고 앉았다. 나는 멈춰 서서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1분 정도의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멀리서 봤을 때와는 또 다르게, 그 풍경은 작지 않았다. 내 마음이 액자가 되어 그 순간을 소중히 여겨서일까. 풍경은 그림처럼 프레임 안을 꽉꽉 채웠다. 골목 끝까지 걸어갔다가 마을 입구로 되돌아가는 길에 봤더니, 멀리서 할아버지가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가 앉아 있던 짧은 시간. 아파트 그림자가 마을을 가리지 않는 시간. ‘잠깐’이라는 것은 여러모로 유년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현진

단국대학교에서 조소를 공부했다. 대체로 작가의 삶과 주변에 대한 이야기를 작업으로 옮긴다. 삶의 어우러짐을 표방하듯 작가와 작품, 관객의 어우러짐을 연결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김현진 작가의 작은 소망이다.

글·사진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