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택트 문화예술 시대

접촉 말고 접속으로 소통

“답답하지 않으세요? 콧바람을 쐬고 싶은가요?” 요즘 가장 흔하게 주고받는 인사말이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 안에 머물러야 건강을 지킬 수 있다니, 누군가를 만나고, 듣고, 생각하며 머릿속을 환기해야 건강해지기 마련인데 안전을 위해 접촉하지 말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 말인가.

여기 한 가지 역설이 또 있다. ‘생과 사가 오가는 시점에 예술이 무슨 소용이냐?’는 따가운 시선이다. 인류가 탄생한 시점부터 늘 일상 속에 함께 존재한 것이 문화예술인데 바이러스 역풍 앞에서 예술은 한순간에 ‘쓸모없는 노리개’, ‘사치품’으로 전락했다. 문화예술계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타격을 받은 것이다. 관중을 잃은 예술가들은 당장 일자리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위기는 또 다른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언택트

예술을 재정의하다

한 장소에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공연·전시를 하던 그동안의 문화예술 향유 방식을 뒤엎을 묘안으로 언택트Untact 방식이 떠오르고 있다. 접촉을 뜻하는 ‘컨택트Contact’에 부정의 의미인 ‘언Un’을 합성한 신조어다. ‘접촉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접촉하는 방법을 바꾼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뮤지컬의 묘미는 배우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받고 감동을 나누는 데 있다. 그림의 묘미는 캔버스 위에서 물감이 어떤 질감으로 표현됐는지 직접 보고 색을 확인하는 데 있다.발레의 묘미는 무용수들의 역동적인 근육 움직임을 눈으로 감상하는 데 있다. 이 모든 것은 내 눈으로 보고, 듣고, 만져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게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지만 막상 해보고 나니 그 속에 장점이 보인다. 

언택트는 전염병이 불러온 어쩔 수 없는 트렌드가 아니라 언젠가 맞닥뜨리게 될 시대 흐름이었다. 다만 전염병 때문에 조금 빨리, 우리에게 다가온 것뿐이다. 또, 국내 최초로 대구문화예술회관이 관중 없는 온라인 콘서트를 시도했다. 3월 2일부터 <DAC on Live> 공연을 현장 관람객 없이 대구문화예술회관 SNS 채널에서 라이브 중계로 진행했다. 예정된 공연을 온라인으로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온라인 전용 공연을 따로 제작한 것이다. 국악, 오페라, 뮤지컬 댄스 등 다양한 장르가 온라인 무대에 올랐다. 관객은 공연에 참여한 예술가들을 격려하고 실시간 대화창에서 의견을 주고받는다. 10회 공연만 계획돼있었지만, ‘재미있다’, ‘힘이 난다’, ‘위로가 됐다’는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10회 공연을 추가로 편성했다. 예술이 가진 본연의 힘, 치유 효과가 빛을 발한 순간이다.

찾아가는 콘서트와

AR 전시

<DAC on Live> 공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이 시기에 힘들어하는 지역 예술가들을 섭외하되, 기관이나 에이전트 소속이 아닌 전업 프리랜서 예술가들에게 우선 기회를 줬다. 위기에 놓인 지역 예술가들은 수입원이 생겨 좋고, 오랜 방콕 생활로 우울감에 빠진 시민들은 오랜만에 활기를 찾아서 좋다. 이후 지역 공공 공연장을 중심으로 ‘언택트 예술’이 유행처럼 퍼져 나갔다. 관람객을 공연장으로 불러들이는 방식이 아닌 도심 속 아파트 단지로 찾아가는 콘서트가 자연스러워졌다. 극장은 차 안에서 영화를 보는 드라이브인Drive-in으로 대체됐다. 공연에 이어 전시 영역까지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이 파고들었다. 몇 개월 사이 공연 생리는 급변했다. 카메라 한 대로 공연 실황을 보여주는 것에서 카메라 여러 대로 다양한 각도를 담아내는 기술로 진화했다.

낮아지고 평등해진

예술의 문턱

관객은 ‘비대면’이라는 연결 방식이 꽤 똑똑하고 흥미롭다고 말한다. 비싼 좌석에 앉아야만볼 수 있던 연주자의 표정을 내 집 안방에서 고화질 텔레비전으로 즐길 수 있다니. 기술은 차별이 없다. 인터넷이라는 기본 조건만 충족하면 누구에게나 공평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영국에 사는 할아버지든 홍콩에 사는 유학생이든 접속만 하면 같은 문화를 즐길 수 있다. 예술의 문턱이 한층 낮아지고 관객과의 접점이 넓어졌다. 대면은 친밀하고 소셜은 친밀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80년대 이후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온라인 대면이 이미 익숙하다.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상하 계급이 없다. 닉네임에 ‘님’을 붙여 서로 예의를 갖춘다. 이렇게 상호존중, 수평에 기반을 둔 관계가 오히려 견고하다. 문화예술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비대면 방식인 온라인 스트리밍으로도 충분히 소통이 가능하다.

친절한 예술 

투명한 예술

전시의 경우, 작가의 해설을 영상으로 담아 그림과 음성을 함께 제공한다. 현대미술은 작가가 어떤 의도로 만든 것인지, 이것이 세 살 아이의 낙서인지 억대 몸값의 유명 화가가 그린 그림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여기에 작가의 해설이 곁들여지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에 요즘 새로운 전시 방식은 난해한 현대미술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특히 일정한 기간 무대에 올랐다가 사라지고 마는 연극이나 뮤지컬을 영상으로 제작해 제공하면 원하는 만큼 반복 재생이 가능하고 공연장의 제약에서 자유롭다. 

언택트가 거스를 수 없는 추세라는 건 우리 모두 잘 안다. 하지만 대면의 생생함이 그리운 것은 사실이다. 예술을 담는 그릇으로써 온라인 매체는 하나의 대체재일 뿐 현장을 완벽히 대체할 수는 없다. 공연의 생명은 뭐니 뭐니 해도 현장성이다. 예술 수요자에게는 배우의 숨결, 땀 한 방울조차 공감의 대상이 되는데 비대면 콘텐츠는 온전히 교감하기 어렵다. 게다가 아직 공연 콘텐츠 온라인 스트리밍 시장은 유명 단체가 독식하고 있다. 비대면 공연이 대중화된다 해도 티켓 파워가 상당한 일부 스타 배우에게만 기회가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지금 가장 혼란스러운 사람은 예술가 당사자들이다. 아직까지는 이 소통 방식이 낯설고 불편하다. 급변하는 생태계 변화에 문화예술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예술가는 예술만 잘하면 되는 시대는 지났다. 촬영, 편집, 업로드, 미디어 소통 능력까지 고루 갖춘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한다. 창작 활동과는 별도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기술을 배워야 도태되지 않는다. 정글 같은 문화예술계에 숨을 이어가기 위한 필수 요소다. 동시에 다양한 예술 장르를 영상으로 어떻게 담아낼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오페라, 연극, 뮤지컬, 발레, 클래식, 사진 등 예술 장르는 다양하다. 각자 특성이 다른데 현재 기술은 콘텐츠를 천편일률적으로 기록하기 바쁘다. 장르 특성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사이버 공간의 이점을 살릴 대책이 절실하다. 앞으로 갈 길이 아득하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콘텐츠가 먹힐 것인가’만 고려하면 된다. 그동안 고품격 문화예술에 익숙해진 대중은 눈이 높다. 그곳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상관없이 양질의 콘텐츠에는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고, 부족한 콘텐츠에는 과감히 등을 돌릴 것이다. 까다로운 대중의 입맛을 맞추는 일, 문화예술계가 풀어야 할 숙제다.

클로이 리

 

인문·문화·예술 칼럼니스트. 질문하고, 경청하고, 기록하며 16년째 기자라는 업을 이어오고 있다. 미국에 거주하며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소개하고 있다. 관찰하면서 문장을 모으고, 가끔은 그럭저럭 괜찮은 문장을 쓰는 기쁨에 산다.

글 클로이 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