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손가락이 이끄는 대로

피아니스트 다움

인터뷰 전, 재즈에 대해 떠올린 거라곤 건반 위를 자유로이 누비는 열 손가락과 서로 눈 맞춤하며 싱긋 웃는 연주자들의 얼굴뿐이었다. 다움과 만난 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겉으로 보이는 자유로움이 실은 충실하고 충분한 연습에서 나온다는 것, 재즈는 하나의 장르라기보다 연주자의 손끝에서 창작되는 선율 그 자체라는 것이다.

 

“남들보다 창작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 예술을 하고, 그중에서도 욕구가 더 강한 사람들이 재즈라는 이름 안에 남게 되는 것 같아요. 재즈는 창작의 궁극처럼 느껴져요.”

피아니스트

다움

축하드려요! ‘Introvertie-다움 트리오 재즈공연’으로 2020 화성시문화재단 지역예술활동 지원사업 공모에 선정되셨죠. 지원하신 계기가 있나요?
2018년 한국에 들어와서 작년에 앨범을 발매했어요. 앨범을 내자마자 열심히 활동하고 싶었는데 좋은 공연을 할 기회가 생각보다 많지 않더라고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공연은 음악적인 제약이 없고 좋은 울림이 있는 공간에서 준비된 관객과 만나는 것인데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차에 주위 분들이 이 공모를 추천해 주셨어요. 올해 안에 화성시에서 3회 공연을 하겠다고, 요령 없이 하고 싶은 말을 써 내려갔는데 감사하게도 제가 제안한 내용 그대로 승인해 주셨어요.

코로나19 때문에 면접 심의가 영상 자료와 유선 통화로 이루어졌다고요.
2월 말에 서류 제출하고 며칠 후에 면접이 있었는데 그게 거의 한 달 반 정도 미뤄진 것 같아요. 면접 준비하면서 영상 편집을 처음 해봤어요(웃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고요. 심사위원 앞에서 긴장하는 것보다 충분히 준비해서 촬영하는 게 오히려 저한테는 유리했던 것 같아요. 혼자 카메라 보고 말하는 게 좀 어색하긴 했지만 이상하면 다시 할 수 있으니까요. 전화 면접 때는 좀 긴장되더라고요.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웠는데 다행히 결과가 잘 나왔어요.

아직 밖에 나가기가 쉽지 않아요. 요즘 집에서 어떻게 지내세요?
합주나 레슨 이외에 혼자 하는 연습은 집에서 하고 있어요. 음악가에게는 공연도 있고 레슨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게 연습이잖아요. 일정한 일과를 반복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오전은 여유롭게 보내는 걸 좋아해서 1시간 정도 손 푸는 연습을 해요. 점심 후부터 해가 떠 있는 동안엔 꼭 해야 하는 연습을 끝내죠. 저녁에는 좀더 좋아하는 걸 연습하고 싶어서요. 남은 시간에는 공부하거나 책 읽거나 운동하고, 그렇게 지내요.

어린 시절부터 악기를 연주했다고 들었어요.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하셔서 저도 자연스럽게 음악과 가까이 지냈어요. 어머니는 결혼 전에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어서 돈을 모아 피아노를 사셨대요. 아기 때부터 집에 피아노가 있어서 악보 보는 법이나 간단한 것들은 어머니에게 배웠어요. 바이올린도 권유하셔서 두 가지 악기를 병행하면서 자랐죠. 시작은 어머니 때문이었지만 하다 보니 재미있더라고요. 가끔 연습하기 싫다고 말하면 어머니는 “하기 싫으면 그만둬도 돼.” 하셨어요. 그럼 저는 “아니 그 말이 아닌데···.” 하고 울면서 주섬주섬 가방 챙겨서 나갔어요. 저는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라 단지 ‘오늘의 연습’이 하기 싫었던 거거든요. 어머니가 참 현명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 걸 조련이라고 하나 봐요(웃음). 어릴 때 어떤 아이였어요?
제 앨범명 [Introvertie]가 ‘내성적인’이라는 뜻인데요, 어릴 땐 정말 사회성이 떨어졌어요. 친구와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하고 뭔가 주어지면 거기에만 몰두했어요. 다행히 자라면서 그런 성향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서 음악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나 기억나는 게, 아버지가 저한테 스케치북을 하나 쥐여주시면 한 자리에 앉아서 스케치북을 다 넘길 때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너무 집중해서 오줌을 쌌다고 하더라고요.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웃음)?

독특한 아이였네요(웃음).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나서 뒤늦게 재즈를 시작했다고요. 어떤 매력에 끌렸나요?
일단 제가 생각하는 재즈는 어떤 장르라기보다는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방식이에요. 재즈 연주자들은 작곡가가 표현하는 방식과 연주자가 표현하는 방식을 모두 아울러요. 제가 아는 대부분의 재즈 연주자는 자기가 쓴 곡을 연주해요. 남의 곡이라도 즉흥 연주를 하니까 그것도 하나의 작곡이라고 볼 수 있죠. 학교 다니면서 클래식 작곡을 할 때는 직접 쓴 곡을 연주자들에게 줄 때도, 남의 곡을 연주할 때도 채워지지 않는 게 있었어요. 재즈는 그 부분을 충족해 주는 음악이에요. 음악 하는 데 제약이 없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남들보다 창작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 예술을 하고, 그중에서도 욕구가 더 강한 사람들이 재즈라는 이름 안에 남게 되는 것 같아요. 재즈는 창작의 궁극처럼 느껴져요.

창작 욕구를 따라 재즈로 옮겨간 거군요.
옮겨 갔다기보다는 클래식에서 배운 내용과 재즈를 접하면서 습득한 것들을 합쳐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제 음악 세계를 설득력 있게, 견고하게 만들어 가는 게 최종 목표거든요. 그렇지만 스스로 음악가로서의 위치를 파악해야 하니까 좋은 재즈 음악가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려움은 없었나요?
연주자들 간의 호흡 방식이요. 클래식 앙상블에서는 비트보다는 서로의 소리와 호흡을 듣고 가요. 제가 1, 2, 3, 4로 간다고 해도 옆 사람이 중간에 다른 호흡으로 들어온다면 같이 맞춰야 하죠. 재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클래식보다 비트가 일정하게 가는 편이에요. 처음에는 그게 좀 음악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숙련되지 않은 연주자와 합주할 때는 소리를 안 듣고 너무 칼박으로 가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박자감이 정확한 사람도 필요하지만 서로의 소리를 더 들어주 는 사람과의 호흡이 아직까지는 저에게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이런 어려움은 계속해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죠.

반대로 더 유리한 점도 있었을 것 같아요.
빌 에반스Bill Evans나 키스 자렛Keith Jarrett처럼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두 재즈 피아니스트 모두 좋은 클래식 연주자였어요. 그런 걸 보면 클래식 이력이 절대 나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앞서 말한 어려움도 클래식과 재즈의 차이에서 온 게 아니라 재즈를 늦게 접했기 때문일 거예요. 그 두 사람은 10대 초반에 시작한 반면 저는 20대 중반에 시작했으니까요.

어디선가 재즈는 곡 자체보다 연주하는 사람의 감각과 표현력이 더 큰 역할을 한다는 말을 보고, 무척 자유롭지만 그만큼 연주자의 책임감이 따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든 음악이 다 그렇지 않을까요? 클래식 곡도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서 전혀 다른 느낌이 나오니까요. 자유로움과 책임감이 따르는 지점이 다른 것 같아요. 클래식에서는 내 마음대로 노트를 바꾸거나 틀리면 안 돼요. 재즈는 연주자가 노트 자체를 선택한다는 면에서는 자유롭지만 그만큼 화성과 리듬, 음형이나 선율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도록 많이 연습해야 해요. 연주자의 음악성과 기술적인 능력, 화성에 대한 이해도가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죠. 어떤 예술이든 요구되는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연주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무언지 궁금해요.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솔직하게 연주하는 것.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과하게 현란한 연주를 하지 않고 제가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거요.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무대에 서면 잘하고 싶잖아요. 연습량 이상을 보여주려고 하다 보면 오히려 연주가 안 좋아지는 경우가 있어요. 있는 그대로의 저를 보여주고 싶어요. 지금도 그렇게 말하려고 노력 중인데 잘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웃음).

영화에서 보면 연주자들이 단상도 없는 작은 바에서 관객과 마주보며 연주하기도 하잖아요. 실제로 관객과 어떻게 소통하려고 하나요?
완성도 있는 연주와 준비된 관객이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쌍방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겉으로 봤을 때 시끌벅적하다고 무조건 소통이 잘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어도 전달되는 게 있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음악적으로 더 여물도록 노력하는 것까지고, 그다음엔 관객분들의 몫인 것 같아요.

재즈에 대해 알건 모르건 들으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맞아요. 얼마 전에는 클럽에서 연주를 하는데 바로 앞자리에 앉아 계신 관객분이 크게 소리 지르면서 대화하시는 거예요. 겉으로는 그런 모습이 자유롭게 보일 수 있지만 저는 자유롭게 연주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물론 이런 분위기를 선호하는 연주자도 있겠지만요. 그때 ‘내 연주가 아직 설득력이 없구나.’ 하고 속상해했죠.

한 명의 관객으로서 저도 꼭 새겨 둬야겠네요. 다움 트리오 이야기를 해볼게요. 프랑스 현지에 원년 멤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귀국 후에 멤버를 새로 구성한 건가요?
네. 프랑스에 거의 10년 정도 살면서 학생 때는 공부하고 이후에는 공연하고 그랬어요. 앨범 녹음도 현지 멤버들과 했고요. 국내에서도 새로운 팀을 결성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앨범을 현지 멤버들과 녹음했기 때문에 팀 체제까지 요구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객원 형태로 가고 있어요. 지금 함께 하는 콘트라베이시스트와 드러머는 제가 지인을 통해 먼저 연락한 분들이에요. 귀국 무렵에 한국 음악가들을 잘 몰라서 영상을 많이 찾아보고 호감 가는 분 중에서 연락을 드렸죠. 제 음악을 보내드리고 다행히 좋다고 하셔서 함께하게 됐어요.


연주자 간에 신뢰가 있어야 완성도 있는 음악이 나올 것 같은데, 그런 신뢰를 어떻게 다져가나요?
재즈 뮤지션들은 모두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이 고민할 거예요. 연주자 간의 신뢰는 함께하는 세월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연주 자체를 인정하는 마음에서 나와요. 그러려면 먼저 스스로 자기 연주를 받아들여야 해요. 자기 연주가 맘에 안 들면 상대방을 탓하게 되거든요.

음악 활동 하면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없어요?
다행히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있어요. 좋은 공연을 하고 싶은 것 외에 그냥 제가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죠. 그건 항상 채워지지 않는 것 같아요.

재즈 외의 장르의 도전해보고 싶기도 한가요?
꼭 하고 싶다기보다는 기회가 된다면 하고 싶어요. 그런데 제 분야에서 잘하는 걸 해야지, 괜히 다른 걸 건드렸다가 결과물도 별로고 그 분야에 있는 분들에게 피해를 드릴 것 같아 우려되는 마음도 있어요. “절대 안 해!” 이건 아니고요(웃음). 예전에 드라마 음악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오히려 연주자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되었어요. ‘이 곡 내가 연주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었거든요. 이 장면에 이런 느낌의 곡을 너무 길지 않게 이런 악기를 써서 만들어 달라는 디테일한 요구가 있죠. 그걸 만드는 건 다른 재능인 것 같아요. 저는 너무 어렵더라고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구체적인 계획보다 큰 그림만 그려놓고 그때그때 하는 편이어서 일단 이런 좋은 공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지원금이 나오면 대관부터 홍보, 기획까지 직접 해야 해요. 재즈 공연은 원래 작곡가가 연주자와 공연 기획자 역할도 하거든요. 해오던 일이라서 크게 부담은 없지만, 3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조금은 걱정돼요. 첫 공연을 7월로 계획 중인데, 할 일이 많네요(웃음).

글 이다은

사진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