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보에와 피아노의 충만한 로맨스

오보이스트 함경과 피아니스트 손열음

지난 8월 29일 화성시 반석아트홀에서는 뜻깊은 무대가 펼쳐졌다. 화성시 시 승격 20주년을 기념하여 화성시문화재단에서 준비한 특별공연 <함경 with 손열음 듀오 리사이틀>이 열린 것이다. 티켓은 예매 오픈과 동시에 매진을 기록했다.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공연장에는 한 좌석 띄어앉기가 시행되어 객석이 줄었다고는 해도 공연예술 무대를 향한 관객들의 기다림과 기대감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오보이스트 함경과 피아니스트 손열음

함경 and 손열음

이미 세계적인 젊은 거장의 반열에 오른 손열음은 팔방미인이란 수식이 부족할 정도다. 피아니스트로서 연주 활동은 물론이고 2018년부터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예술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클래식 에세이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를 펴낸 에세이스트이기도 하고 클래식 음악방송의 진행자로 매주 시청자들을 만난다. 한 명의 사람이 어떻게 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난해에는 유명 예능방송에서 즉흥으로 모짜르트의 터키행진곡 변주곡을 연주하여 일반 대중에게 더욱 친근한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오보이스트 함경은 2017년 권위 있는 콩쿠르인 뮌헨 ARD 국제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로 우승하며 그간 다소 척박했던 한국의 목관악기 파트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20대 후반의 젊은 연주가이다. 독일 하노버 오페라 극장과 세계 정상급 악단인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에 발탁되어 오보에 주자로 활동했다. 현재는 헬싱키에 거주하며 북유럽 최고의 명문인 핀란드 방송교향악단 오보에 제2수석으로 활동하며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Abundance of Romance’(충만한 로맨스)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공연에서 함경과 손열음은 로베르트 슈만, 제랄드 핀치, 메들렌 드링, 마리아 드라니쉬코바, 세자르 프랑크 등이 작곡한 오보에와 피아노의 협주곡들로 아름답고 풍성한 무대를 꾸몄다. 두 사람은 사랑이 가진 다양한 얼굴을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감미롭게 표현해 내었고, 오보에와 피아노의 선율은 서로 대화하듯이 혹은 춤을 추듯이 무대를 메웠다. 조금 일찍 찾아온 가을에 어울리는 연주였다. 두 번째 앵콜곡인 영화 <러브 어페어> 테마를 연주하고 내려온 두 아티스트를 무대 뒤에서 만나 공연을 마친 소감을 들어봤다.

함 경(이하 함) 이 시기에 연주가 성사되는 것 자체가 저에겐 너무나 감격스러운 일이에요. 준비했던 무대가 끝나고 내려오면 항상 뿌듯함이 있지만 요즘은 그 마음이 더 각별해지는 느낌입니다.

손열음(이하 손) 저도 코로나 이후로는 무대 하나하나가 굉장히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어요. 특히 이번 같은 경우는 여름에 갑자기 코로나 확산세가 더 심해져서 공연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좀 컸어요. 하지만 이렇게 많은 청중들이 찾아와 주시고 또, 건강하고 무사하게 공연을 진행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10년째 음악동료

오보에라는 악기는 어쩐지 이름만 좀 낯익은 느낌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같은 악기들에 비해 그 형태나 음색이 쉽게 떠오르는 편은 아니다. 일반 대중들에겐 아마 영화 <미션>에 삽입된 ‘가브리엘의 오보에’가 그나마 가장 친숙한 곡이 아닐까 한다. 이번 무대는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마치 ‘피처링’을 하듯 조금은 낯선 오보에라는 악기, 그리고 함경이라는 후배 연주자를 대중들에게 소개한다는 느낌을 준다. 두 사람은 어떤 인연으로 이 같은 무대를 함께 꾸미게 되었을까.

맞아요, 피처링.(웃음) 함경 씨는 알고 지낸 지 10년 정도 되었어요. 그 시간이 저희에겐 음악적으로 성장기이고 그러다 보니 같이 자란 친구 같은 느낌도 있고, 동료의식도 좀 두터운 편이었어요. 저는 원래 앙상블, 그러니까 같이 하는 실내 연주를 워낙 좋아해서 우리도 꼭 같이 연주를 해보자고 예전부터 꿈을 꿨었어요. 게다가 저희가 지금 한국에서 같은 회사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거든요. 그런 거에 비해서는 이 무대가 좀 늦게 이루어진 편이에요. 이제 앞으로는 주기적으로 이런 무대를 가지려고 해요.

손열음 씨가 함께 해주셔서 저는 너무 영광이고 행복한 무대였어요. 음악적으로 손열음 씨에게 받는 에너지나 영감이 너무 많아서 함께 연주할 때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지난 해에 모던 오보에 소품집 [타보]를 함께 작업했다. 함경의 데뷔 음반인 [타보]에는 20세기와 21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이 담겨 있다. 원래는 앨범에 수록된 곡들로 공연을 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공연이 1년 반이나 미뤄지면서 함경은 [타보]와는 완전히 다른 색깔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완성된 것이 ‘로맨스로 충만한’ 이번 공연이다.

오보에가 가진 여러가지 음색 중에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면에 어울리는 로맨스를 이번 공연에 담아 보고 싶었어요. 가장 먼저 세자르 프랑크의 소나타를 염두에 두고 다른 곡들을 프로그램을 했어요. 오늘 연주된 작곡가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점이 있어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의 의미를 아는 작곡가임과 동시에 그 사랑을 잃어버리는 게 어떤 의미인지 또한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거예요. 그러한 요소들이 많이 묻어 있는 작품들을 하나로 묶어서 무대를 만들어 봤습니다.

2부를 장식한 세자르 프랑크의 곡은 원래 바이올린 소나타지만 오보에와 피아노를 위해 편곡된 버전으로 연주되었다. 프랑크는 오랜 친구이자 당대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이자이의 결혼선물로 이 곡을 작곡했고, 결혼식 당일 이자이가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랑이 품고 있는 격정과 희열이 아름다운 멜로디에 담겨 있는 곡이다.

제럴드 핀치는 독일에서 유학할 때 영국인 은사님이 소개해준 작곡가예요. 처음 핀치의 곡들을 알게 됐을 때 음악적인 충격을 받기도 했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곡이 있었구나 하고요. 핀치는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어서인지 작품의 분위기 자체가 회상적이고 많은 슬픔을 담고 있어요. 사랑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장 큰 고통을 주기도 해요. 핀치는 그런 의미로 선곡을 하게 되었죠.

각자의 음악관과 개성이 뚜렷한 두 연주자가 함께 음반을 녹음하고 리사이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혹시 음악적인 이견은 없었을까?

이견이랄 것이 너무 없었어 가지고.(웃음) 피아니스트로서 저는 정말 많은 사람들과 작업을 하게 되는데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이 편하지는 않아요. 함경 씨는 본인의 주관이 뚜렷하지만 제가 그 부분에 일단 공감을 하고, 그래서 그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잘 이해가 되는 그런 아티스트라서 함께 작업하기가 너무 편해요. 이런 호흡으로 앞으로도 계속 음반과 무대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저희 둘 다 음악적으로 상대에게 보여주면서 함께 맞춰가는 스타일이에요. 손열음 씨가 자신의 해석을 그때 그때 보여주면 저도 그에 반응해서 제가 생각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리허설이 진행되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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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준 ‘일상’

국내와 해외를 오가다 보니 손열음은 자가격리를 5번, 함경은 2번 경험했다고 한다. 지구를 덮친 ‘잠시 멈춤’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고 있는 이 시기,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던 음악가들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연주를 못하니까 답답하긴 하죠. 그래도 정말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이렇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어요. 매일 환경이 바뀌고 늘 다른 사람을 만나니까 ‘일상’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거든요. 하노버 집에도 2주 이상 머물러본 적이 없어요. 코로나 시작하고 두 달 반 정도를 한 곳에 머무르며 같은 패턴의 하루하루가 쌓이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청소를 엄청 좋아해요. 남는 시간에는 하루 종일 쓸고 닦고 밥하고 치우고 또 밥하고 그렇게 지냈어요.

갑자기 생각할 시간과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어요. 저는 영화를 엄청 봤어요. 그동안 못 봤던 영화를 하루에 서너 편씩 봤으니까요. 영화는 정말 원 없이 봤네요.

코로나19로 인해 클래식을 비롯해 여러 공연 무대가 크게 위축되었다.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든 시기이지만, 예술가들만이 느끼는 어떤 지점도 있을 것 같다.

관객들이나 저희나 모두 이런 무대를 감사하게 여기게 되었달까요. 공연이 굉장히 절박하고 절실하다는 것을 서로 간에 느끼는 시간이 된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어떤 면에선 감사해요.

사람들에게 음악이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저부터가 항상 다른 음악이나 미술, 영화나 책 같은 예술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으니까요. 요즘 같은 시기에 예술이 하나의 탈출구 같은 역할이 되었으면 해요.

무대의 다양성을 꿈꾸며

손열음은 2018년부터 강원도에서 열리는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단순히 이름만 내거는 것이 아니라 공연 기획, 연주자 섭외, 행정 업무, 프로그램북 작성까지 일일이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 음악제는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전석 매진으로 진행되었다. 본업인 연주로도 스케줄이 꽉 차있을 법한데 대체 어떤 동력으로 예술감독의 책임을 이끌어가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두 가지일 것 같은데, 하나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이 한국에서 다양한 무대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예요. 인기곡들은 굉장히 자주 연주되는 반면에 어떤 곡들은 전혀 알려지지도 않고 연주되지도 않거든요. 또 무대 같은 것도 많이 봐오던 것들 위주로 구성이 되곤 해서요. 해외에서는 정말 ‘별의별’ 무대들을 접하게 되는데요, 우리 관객들에게도 그런 경험을 선사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제일 큰 동력인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음악가들이 음악제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에 고무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런 보람이 있구나’ 하고 느낀 것이에요. 저도 늘 초대를 받아 연주하는 입장이어서 그런 생각은 못했는데, 무대를 만들어서 누군가를 초대하고 보니까 그 분들이 무대에서 에너지을 얻는 모습이 제게 다시 힘이 되는 부분이 많아요.

올해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주제는 ‘산 ALIVE’이었다. 손열음이 직접 페스티벌 콘셉트를 잡았다.

산은 한국에서 가장 아이코닉한 풍경이라고 생각했어요. 해외 여러 곳을 다녀도 어디에 가든 산이 보이는 이런 나라는 흔치 않더라고요. 흔히들 강원도 하면 산을 더 떠올리고, 저도 강원도 사람이라 항상 가깝게 느끼고 있었죠. ‘산’을 말하다 보니 ‘살다’, ‘살았다’의 활용형이기도 해서 코로나 시대와 조금 잘 맞는 기분이 들었어요. 지금 우리가 아무 것도 못 하고, 죽은 것은 아닌데 산 것도 아닌 것 같은 상황에서 같이 얘기해 볼 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 단어를 쓰게 되었어요.

함경은 2018년 네덜란드의 세계적 명문 RCO에서 나와 핀란드로 옮겼다. 평단원에서 제2수석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본인의 소리를 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되어 설렌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떤지 궁금했다.

행복지수가 많이 높아졌어요. 핀란드 사람들은 굉장히 수용적이고 또 타인을 도와주려는 성향이 강하거든요 그래서 제 색깔을 마음껏 펼쳐도 동료들이 많이 지지해주는 편이에요. 특히 다른 나라의 오케스트라에 객원으로 나가 보면 그 분위기가 정말 북유럽과 핀란드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것이구나 하는 걸 많이 느낍니다.

아직 팬데믹이 종식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 각국의 공연계는 차츰 기지개를 켜고 있다. 함경은 곧장 헬싱키로 돌아가서 오케스트라 시즌을 시작할 예정이다. 손열음도 9월 중에 두바이, 러시아, 네덜란드 등에서 공연이 계획되어 있다. 끝으로 시 승격 20주년을 맞이한 화성시민들에게 인사를 부탁했다.

저는 화성이 두 번째인데 올 때마다 좋은 기운을 받고 가는 것 같아요. 공연홀도 훌륭하고 관객분들도 너무 좋아서 다음 공연 기회가 또 빨리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반석홀에서 처음 연주해 보았는데 너무나 따뜻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또 다른 연주로 시민분들을 찾아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오보이스트 함경

2017년 뮌헨 ARD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1위 없는 2위)하며 한국 관악주자들이 가지 못한 최초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 네덜란드 명문 RCO를 거쳐 핀란드 방송교향악단에서 오보에 제2수석으로 활동 중이다.

피아니스트 손열음

2011년 차이콥스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준우승을 하였고, 로린 마젤, 네빌 마리너, 발레리 게르기예프 등 세계적인 거장들과 협연하였다. 뛰어난 통찰력과 한계 없는 테크닉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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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인보

사진 남윤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