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축된 공연계를 위한 현장 실험

랜선 공연이 아닌 길 위의 공연으로

코로나19로 오프라인 공연이 불가능해지면서 다양한 장르의 ‘랜선 공연’이 등장했다. 그런데 천편일률적인 공연 중계 방식이었다. 새로운 예술적 성취를 도모하지는 못했다. 비교적 안전해진 지금은 아웃도어 활동과 연계해 ‘길 위의 공연’을 도모해 볼 시기다. 예술이 코로나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기회다.

신선함과

진부함의 사이

청년들과 섬 여행을 많이 떠나곤 했다. 보성 장도의 마을을 지나갈 때였다. 일행 중에 큐레이터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이장님이 찾아와서 통사정했다.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는 왜 벽화가 없는지 자주 물어 난감하다며 저렴하게 벽화를 그려줄 화가 좀 소개해 달라고. 그때 뒤에 있는 청년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와! 이 마을은 소박해서 좋은 것 같아. 벽화가 없어서 정말 좋다.”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이 벽화로 관광객을 불러 모은 이후, 전국의 작은 마을이 벽화에 시달렸다. 벽화마을처럼 첫 시도는 신선하지만, 모방이 늘면서 진부해지는 것들이 있다. 랜선공연도 마찬가지다. 초기에는 코로나19를 극복할 수 있는 묘안으로 부각되었지만, 너도나도 따라 하면서 이제는 진부한 예산 소진 방식이 되었다. 신선함과 진부함이 이렇게 교차했던 이유는 랜선 공연이 단순히 온라인 중계만 한다는 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공연을 디지털화할 때 어떤 새로움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관한 고민이 부족했다. 관객이 객석에서 직접 볼 수 없으니 온라인 중계로 보게 한다는 사실에서 어떻게 기술적 새로움을 더해 관람자에게 창조적 경험을 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길 위의 공연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답을 요구한다. 그 답을 찾으면 그것이 바로 혁신이다. 최근 ‘길 위의 공연’을 여러 번 시도했다. 코로나 시기에 가능한 여행은 아웃도어 여행이고, 이런 여행에서 기획해 볼 수 있는 시도는 버스킹이었기 때문이다. 여행도 귀하고 공연도 귀했기 때문에 이 둘의 결합은 확실히 시너지가 있었다. ‘예술이 있는 여행’은 관람자뿐만 아니라 예술가에게도 의미가 있다. 예술의 장소성, 예술가와 감상자의 관계성, 예술 창조의 맥락성이라는 관점에서 몇 가지 화두를 던져주었다. 특히 이제 막 무대 위의 주인공으로 홀로서기를 하는 청년예술가들에게 예술이 있는 여행은 예술 활동의 마중물이 되어 주었다. 때로는 훌륭한 무대가 훌륭한 예술가를 만들기도 한다. 자연이 만든 무대가 그렇다. 자연의 무대를 쓰기 위해서는 공간을 무대로 재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눈을 크게 뜨면 세상 모든 곳이 무대로 읽힌다.

무대에 맞는 아티스트를 캐스팅하면 자연이 준 축복을 공연에 담아낼 수 있다. 자연이 만들어준 무대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함께 여행을 해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감상자와 예술가의 관계가 형성되는데 이는 예술가에게 큰 힘이 된다. 예술가와 관계가 맺어지면 감상자는 그의 퍼포먼스를 훨씬 집중해서 보게 된다. 자녀의 유치원 공연에 집중하는 부모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여행을 통해 관계가 맺어지면 낯선 장르에도 주목하게 된다. 관계성은 평범한 사람을 예술로 이끄는 중요한 힘이다.

즉흥성이 가진 힘

다음으로 주목할 부분은 예술 창조의 맥락성이다. 예술의 특성은 즉흥성이다. 여기서 즉흥성은 제멋대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즉흥성이 힘을 가지려면 맥락에서 나와야한다. 단지 가창자와 연주자의 기분만을 반영한 즉흥성이 아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맥락과 공연 장소의 특징을 알고 난 뒤 나오는 맥락은 힘이 세다. 이런 교감적인 무대는 예술가에게 창조의 힘을 준다. 코로나 와중에 길 위의 공연을 여러 편 연출했다. 남원동편제마을에서, 문경 단산 활공장에서, 함평만의 바다 데크 위에서 장소 특정 예술을 시도했다. 이 무대에 올라 합을 맞추며 <지리산 카르멘>을 구성한 공연자들이 순창의 방랑싸롱과 제주올레축제에서 이를 변형해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몇 번 마중물을 채웠더니 기회가 제 발로 걸어오기도 했다. 어느 날 한국예술종합학교 이동연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예종케이아츠크리에티브에서 주관하는 남원 동편제마을 국악거리축제와 평창 계촌마을 클래식축제의 예술감독인 그가 버스킹 여행을 연출해 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랜선 축제이지만, 실외에서 버스킹 공연을 몇 번 할 예정이고, 이를 수행하며 관람할 여행자들을 조직해 달라는 것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여행자들을 조직했다. 하지만 날씨는 모든 계획을 앗아갔다. 예정된 무대에서 예정된 시간에 이뤄진 공연은 한 편도 없었다. 비와 바람을 피해 평창과 남원의 이 언덕 저 언덕을 넘나들었다. ‘신발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꿔 신으면서’라는 브레히트 시의 구절이 떠오를 정도로 ‘신발보다도 더 자주 무대를 바꿔가면서’ 이뤄진 클래식과 국악의 ‘비긴 어게인’ 버스킹 여행을 즐겼다. 여행을 통해 무대 밖 지휘를 한 셈인데,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갑자기’에서 

배운 것

여행은 말 그대로 쪽대본 여행이었다. 폭우 때문에 공연 장소와 시간이 수시로 바뀌었고 지체되기 일쑤였다. 공연 관람이 여행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다른 일정을 모두 이에 맞춰 조정해야 했다. 공연 장소가 바뀌면 가려던 음식점을 바꿨고, 일정이 늦춰지면 근처의 좋은 카페를 섭외해 잠시 쉬었고, 공연이 지연되면 우리끼리 자리를 펴고 국악과 클래식에 관한 ‘알쓸신잡’ 수다를 떨면서 기다렸다. 결과적으로는 변화무쌍한 스케줄 덕분에 여행 연출력을 기를 수 있었다. 폭우로 예약했던 숙소마저 문을 닫으면서 잘 곳마저 사라지기도 했다. 가려고 했던 여행지와 식사하려고 했던 맛집도 공연 일정이 변동되면 포기해야 했다. 다행히 여행자들이 그런 불편한 사치를 기꺼이 감당해 주어서 의미 있는 여행을 연출할 수 있었다. 기자들에게는 그런 원칙이 있다. 기획을 배신해야 좋은 기획기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기획대로 된 기사는 좋은 기사가 아니라 평범한 기사일 뿐이다. 현장에서 포착한 사실이 새로운 진실을 들려줄 때 이를 포착한 기사는 훌륭한 기사가 된다. 현장의 진실을 바탕으로 기획을 배신할 때 좋은 기획기사가 나온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계획은 계획일 뿐이다. ‘천시(기후)’와 ‘지리(지형)’와 ‘인화(참가자)’를 반영해서 그때그때 유연하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날씨가 맑을 수도 있고 흐릴 수도 있고, 지형이 험할 수도 평탄할 수도, 사람들이 지쳐 있을 수도 기운생동할 수도 있으니, 그에 맞춰 일정을 바꿔가야 한다. 평창과 남원의 버스킹 여행이 그랬다. 한예종이 기획한 공연답게 최고의 라인업으로 구성된 공연이었다. 이 여행에 내가 얹은 ‘인간의 한 수’는 클래식 지휘자와 국악평론가를 공연 해설가로 캐스팅한 것이다. 소리꾼에게 고수가 필요하듯이 좋은 공연에는 좋은 해설가가 필요하다. 이들은 낮의 공연에서 느낀 감동을 더욱 절절하게 풀어주었다. 덕분에 우리가 감동을 받은 지점이 어디에 연원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길어지면서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 아웃도어 활동을 권장한다. 혹시나 하는 우려에 대놓고 야외 활동을 하라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이미 전국의 산과 들은 인파로 가득차 있다. 그곳에 예술을 얹어보면 어떨까? 덮어놓고 랜선 공연만 하지 말고. 예술이 코로나를 치료해 줄 수는 없지만 잠시 잊게 해줄 수 있지는 않을까?

고재열

 

여행감독이자 재미로재미연구소 소장. ‘사람들은 여행에서 다르게 만난다.’는 생각으로 기자에서 여행감독으로 전업했다. 여행을 통한 네트워크 공유를 목적으로 여행자 플랫폼을 구축해 다양한 여행을 기획하고 있다.

글 고재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