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를 위한 지속 가능한

밈만 골라낼 순 없을까

눈 뜨기 싫은 아침 친구에게 카카오톡으로 받은 이미지 한 장이 마음을 풀어준다. 이미지 속 가수 이애란은 “(회사에) 못 간다고 전해라” 하며 <백세인생> 노래를 부른다. 차마 실행할 순 없어도 마치 실행한 듯한 통쾌함이다. 직장 상사에게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들었을 땐 ‘작작해요’라는 자막이 붙은 연예인 이미지를 동기와 주고받는다. 점심 시간 가수 비의 “1일 3깡은 해야죠”라는 너스레를 퍼 나르며 깔깔대고 웃는다. 풍자와 유머, 조롱과 웃음 그 어딘가에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어느 방송에서 나온 연예인의 말 한마디, 커뮤니티에 올라온 재미있는 한 문장, 영화에서 만들어진 효과 있
는 캡처 한 장. 이것들이 사람들에게 퍼지고, 이를 보는 사람은 이를 또 복제해 퍼뜨린다. 그야말로 끊임없이 자가 복제를 일으키는 ‘밈(meme)’ 시대에 살고 있다.

온라인, SNS 만나
폭발적 의사전달 수단으로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이 주창한 ‘밈’이 현시대에 이렇게 흥할 것이라 예상했을까. 1976년에 출간된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처음 등장한 밈은 간단하게 ‘비유전적 문화요소’다. 관습, 건축, 종교 등 인류가 축적해 온 수많은 문화유산은 대부분 모방하고 복제하며 전달됐다. 이때, 그 모방이나 복제 거리가 되는 문화 단위가 바로 밈이다. 요즘 말로 쉽게 표현하면 온라인이나 SNS에서 복제되는 이미지, 영상, 댓글 등의 콘텐츠다.
밈은 요즘 시대에 갑작스럽게 태어난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영화나 TV에서 생성된 콘텐츠들은 패러디라는 이름으로 온라인에서 놀이거리로 일찍이 존재했다. 온라인과 SNS를 만나 폭발적인 활용도를 갖게 됐다. 2015년대까지만 해도 ‘짤방’이 대부분이던 밈은 유튜브가 보편화되면서 이미지에서 영상으로 영역을 넓혔다. 일부 인터넷 게시판에서 확산되던 밈이 댓글로 점차 확산되고,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부터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 망 서비스로, 이젠 카카오톡과 틱톡 등 누구나 쉽게 접근 가능한 일상으로 들어왔다. 과거 소수 네티즌끼리 깔깔대며 소비했다면, 이제는 TV 광고와 주식을 넘나들며 경제, 문화계까지 뒤흔들고 있다. 선조들의 경험과 선견지명으로 탄생한 적절한 풍자와 위트가 속담이라면 밈은 댓글과 이미지,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21세기형 속담, 비유이자, 하나의 의사전달 수단이 된 것이다.

사라진 맥락 속 불편한 진실

이용자나 전문가들은 밈 현상을 굳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서로 낄낄대고 즐기고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기 때문이다. 밈 편집으로 유명한 김성하 프로듀서는 언
론과의 인터뷰에서 “밈에는 ‘나 이거 아는데’란 정서가 묻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밈 콘텐츠는 단순히 소비되는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다. 밈으로 파생되기 전 모태는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자의 제스처나 연설이 이후에 밈으로 파생된 사례는 수없이 볼 수 있다. 이명박 전대통령이 유세 과정에서 외친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여러분”, 고승덕 변호사가 서울시교육감 후보 시절 외친 “미안하다”는 수년이 흐른 지금도 유명한 밈으로 쓰인다. 이러한 희화 속에는 권력가의 거짓말이나 과장된 표현을 조롱하는 통쾌함이 담겼다. 하지만 모든 물질은 복제되고 변조되면서 본질이 희미해진다. 밈이 가졌던 맥락의 힘 역시 사라지고 복제만 남는다. 밈의 힘은 맥락이며, 그 맥락 속에서 복제된다. 김성하 프로듀서는 패러디와 밈의 차이로 ‘맥락의 차이’를 꼽기도 했다. 그러나 변조를 거듭하는 순간 처음의 맥락은 사라진다. 사라진 맥락 속에서 윤리적 문제는 따질 수조차 없다.

한때 유행한 ‘~노’체가 대표적이다. 게임, 4컷짜리 만화에 확장되고, 유아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본떠 함께 쓰이며 새로운 옷을 입는다. 댓글과 SNS 등에서는 어미에 ‘노’를 붙인 화
법이 유행처럼 번졌다. 알고 보면 노체의 본질은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의미였다. 전 대통령의 성에서 가져온 이 화법은 일간베스트, 디시인사이드, 메갈리아 등 특정 사이트
에서 사용하면서 무수히 복제되고 변조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애초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사용하는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유행만 남고 윤리는 사라진다. 윤리성이 사라진 밈은 일
상에서, 아이들의 언어에서 사용되고 퍼진다. ‘신박하다’, ‘재밌다’로 시작한 퍼나르기가 잘못된 정보의 확대 재생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때 트위터는 이런 잘못된 정보가 확대 재생산되면서 ‘믿거트(믿고 거르고 보는 트위터)’라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그 자체로 유쾌한
지속 가능한 밈이 필요

여성 폄하ㆍ혐오 틀에 갇힌 밈도 복제되며 유행처럼 쓰인다. 지난해 미국에서 유행한 ‘캐런밈(Karen meme)’이 대표적이다. ‘캐런 밈’은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항의 시위와 맞물려 백인 특권을 조롱하는 상황을 비유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캐런은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백인 중년이 아닌, ‘백인 중년 여성’의 대명사가 됐다. 1960년대 미 인구의 80%는 백인이었던 탓이다. 백인 중년
여성이 대중의 손가락질을 받을 때는 늘 캐런 밈이 소환됐다. 복제와 변조 속에서 인종 우위 의식 비판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성차별적 명칭만 남았다. 굳이 멀리 찾을 필요도 없다. 한국에서도 ‘김여사’, ‘맘충’이 여성을 겨냥한 조롱적 표현, 재미로 쓰였었다. 밈의 틀에 갇힌 비하와 혐오는 애초의 본질적 문제를 사라지게 한다. 재미와 무의식 속 무한 반복에서 윤리적 문제를 따질 길은 더더욱 없다. 지난 2017년 미국 소설가 앨리너 그래이든은 데뷔작 <밈: 언어가 사라진 세상>에서 모든 기억과 소통을 밈이라는 스마트 기기에 맡기는 세상을 그렸다. 엉뚱한 신조어가 기존의 언어로 바뀌어가고 치명적인 언어 바이러스가 발병해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지금도 특정 키워드, 특정 내용이 담겨 있는 곳에는 맥락과 상관없이 반사적으로 밈이 달리고 놀이가 오간다. 소설로 그린 디스토피아가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좀 덜 심각하고 밈 그 자체와 유쾌함에만 집중할 방법은 없을까. 지속 가능한 밈을 위해 고민해 볼 시점이다.

글 정자연 (경기일보 문화체육부 차장) 경기도 문화소식과 문화정책 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