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점으로의 커다란 여행

시인 휘민과의 산책

주변의 세계가 무한히 넓게 느껴지기도 하고 좁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세계가 줄어들고 확장하는 것일 수도, 내 마음의 변화일 수도 있다. 코로나 확진자가 연일 발생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시기의 특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여행하지 못하는 시기’는 곧 세계의 작아짐을 뜻하는 것일까? 시인 휘민과의 대화 속에서 생각지 못하게 얻은 몇 가지 위로를 여기에 옮긴다.

바다가 있는

도시

“이사 온 이듬해 여름, 서해 풍랑경보 문자를 받고 놀라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제가 사는 곳은 기산동이라 바다를 떠올릴 수 없는 곳인데 그런 문자를 받고 나니 신기했어요. 아, 이 도시에 바다가 있구나. 어쩌면 이곳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곳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2015년 겨울부터 화성에서 지내게 된 휘민 작가는 이사한 지 반년이 지난 어느 날,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새로 인식하게 된다. 근처에 바다가 있다는 소식이, 딱히 바다를 찾아 헤매지 않던 사람에게도 마음의 변화를 가져다준 것이다. 메시지 속에 있던 바다라는 단어는 그 자체의 본질보다도 커다란 힘이 있던 게 아니었을까. ‘넓고 깊다’는 상투적인 의미를 벗어나, 화분에 주는 물처럼, 위축되어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한 컵의 물로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 휘민 시인은 그 무렵부터 화성시에서 지내는 다른 작가들과의 교류 지점도 스스로 찾고 또 자신의 작품 속에도 화성을 등장시켰다고 말한다.

“지난해 여름, 한국작가회의 화성지부(화성작가회의)가 만들어지면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어요. 현재는 20여 명의 회원이 함께 활동하는데 그분들 덕분에 화성이 점점 좋아져요. 매달 모여서 시 합평도 하고 화성 지역 곳곳을 탐방하면서 즐겁고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거든요.”

도서관 3층의

노트북실 2번 자리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 시인에게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물었다. 그는 제부도나 용주사, 당성, 궁평항처럼 지역의 명소를 말하지 않고, 나로서는 처음 듣는 장소를 말했다. 지도 위에 손가락으로 짚어 말하듯,자신이 살고 있는 작은 영역 중에서도 더 작은 곳을 일러준 것이다. 병점도서관 3층, 노트북실의 2번 창가 자리. 시인의 얘기를 듣고 직접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나는 혼자서 외딴곳을 여행하는 기분을 느꼈다.언어나 문화가 이질적인 기분을 주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정확히 말하면 지금 당장은 나 말고 찾아갈 사람이 없는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떨리게 했다.

시인이 말한 자리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기분 좋은 시시함을 느꼈다. 이런 작은 아름다움들로 생활을 채우고 있을 시인을 생각하니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정보 없이 나 혼자 이곳에 왔다면 과연 지금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시인의 앉아 있는 모습이 겹쳐져 보이던 자리. 나는 비록 시인과 동시에 한곳에 있지 않았지만, 그랬기에 시인이 본 것을 똑같이 봤다는 착각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이런 여행을 늘 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창가 자리에 도착해서 그가 적어준 설명을 읽었다. 그 자리에 관한 묘사들은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내 앞의 풍경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도서관이 곧 문 닫을 6시 무렵의 노트북실. 나는 2번 자리에 앉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상상하며 잠깐 동안 뒤쪽에 서 있었다.

“도서관에서 제일 좋아하는 자리는 도서관 3층에 있는 노트북실 2번 자리예요. 그 자리에 앉으면 공원의 굴참나무들이 한눈에 들어와요. 봄부터 겨울까지 변화하는 숲의 모습을 관찰하는 일도 재미있어요.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에는 미세하게 달라지는 나뭇잎의 색깔을 볼 수도 있어요. 책이나 노트북을 들여다보다가 한 번씩 창밖의 굴참나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숲을 곁에 둔 도서관은 흔치 않을 것 같아요.”

시집이 있는

카페 구름공장

병점도서관에서 차로 10분가량 이동하면 닿을 수 있는 카페 ‘구름공장’은 휘민 시인이 병점도서관을 나와서 종종 찾는 곳이라고 했다. 정남면 보통리저수지 근처, 나무와 황토로만 지은 돔형의 작은 건축물. 이곳은 이덕규 시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직접 선별해 놓은 시집들을 읽으며 커피와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카페 공간보다 더 넓은 마당에는 단정하게 가꾼 나무들과 잔디 그리고 걸터앉아 쉬기 좋은 의자와 원두막이 있었다. 그곳에서 끝나가는 여름 더위를 느끼며 차가운 음료를 마시고 있으니 아주 먼 곳으로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화성은 취재를 위해 자주 찾은 곳이고, 또 구름공장 근처는 그중에서도 많이 지나다닌 곳인데 전혀 와본 적 없는 곳 같았다. 내가 사는 동네, 심지어 내가 늘 지내는 집에서도 가끔 이런 기분을 느끼곤 한다. 가구들의 위치를 바꾸거나 창문을 닦는 일, 자주 쓰는 물건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공간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이다. 휘민 시인이 글자로 적어준 여행의 지도에 그런 힘이 있었다. 바깥쪽이 아닌 안쪽을 보게 하는 힘. 스쳐 지나가게 두지 않고 들여다보게 하는 힘. 아직 의미 받지 못한 것에 의미를 주는 힘. 그런 힘이 있다면 내 주변의 풍경들을 재배치하고 끌어당길 수 있지 않을까. 세계를 커지게 하거나 작아지게 하는 요소는 늘 바깥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 그게 시인 휘민에게 받은 위로였다.

휘민

충북 청주 출생. 시집 《생일 꽃바구니》,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와 동화집 《할머니는 축구 선수》 등을 펴냈다. 현재 화성과 서울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면서 동국대, 숭실사이버대, 한국교통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글·사진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