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점의 나라에서> 안무가 정영두
마침표와 따옴표가 만나 태양이 되고, 물음표와 느낌표가 모여 나무가 된다. 쉼표와 대시가 돌격을 하고, 세미콜론은 괄호의 방에 갇힌다. 이 무슨 알쏭달쏭한 말일까? 아트북 ≪구두점의 나라에서≫는 가능한 일. 무용작품 <구두점의 나라에서>는 책에서 튀어나온 구두점들이 걷고 구르며 관절을 움직여 멈춤과 비킴, 숨김과 놀람을 표현한다. 5월 5일 화성아트홀에서 선보일 <구두점의 나라에서>.
정지된 기호들에 표정과 움직임을 불어넣는 정영두 안무가를 만났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또 공연 전문가들도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빠른 시간에 매진돼서 놀랄 정도였어요. “1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피아노 2대의 라이브 연주가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조화를 잘 이뤘다” “책에 나오는 구두점들이 무대에서 구체적으로 느껴져 마치 살아있는 구두점의 나라를 보는 것 같다”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일상적인 무용과 다르지만 뭔가 설명을 하려하지 않고 형태나 움직임 자체만으로 시각적인 쾌감과 청각적인 쾌감을 느꼈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억압적인 일상만 존재하는 건 아니구나, 이런 공연을 충분히 감각적으로 즐길 시간이 필요했구나, 하는 걸 느꼈죠. 덕분에 힘을 많이 얻었습니다.
사실 여러 고민들이 있었어요. 작품 성격상 어린이와 청소년만으로 대상을 한정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또 현실적으로 어린이·청소년 타킷의 무용 작품이 드문 게 사실이기도 하거든요. 어린이·청소년이란 타이틀을 붙이지 않으면 학부모님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고, 어린이·청소년이란 타이틀을 붙이면 ‘저건 어린 친구들이나 보는 건가’라는 선입견 내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이런고민 끝에 지난해 <구두점의 나라에서>를 무대에 올리고 나선 대상을 특정 연령층으로 한정 짓지 말자고 했죠. 전 연령층, 특히나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작품이니 <구두점의 나라에서>는 그냥 ‘무용 작품’으로 지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트북 ≪구두점의 나라에서≫를 처음 본 건 2016년 쯤이었습니다.
보자마자 너무 좋아서 책을 가지고 작품을 한번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음악하는 작가들과 춤추는 작가들이 의기투합했고, 당시 보림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노란우산’이란 카페에서 처음 공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재작년에 국립현대무용단에서 ≪구두점의 나라에서≫로 공연을 하고 싶다며 연락을 해온 거예요. 7년 전에 이미 한번 공연을 한 적도 있고, 마음속에 여전히 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아있어서 기쁘게 작업했습니다.
이 책이 저한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론서처럼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해석할 필요 없이 조형적으로 그냥 재미있다는 점이었어요.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조금씩 다른 배리에이션들이 있고, 모든 페이지들이 조형적으로 너무 훌륭해요. 그냥 어느 페이지든 펴서 테이블에 올려만 놓아도 시각적으로 완벽한 것이
지요. ≪구두점의 나라에서≫에 그림책이 아닌 아트북이란 말을 붙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보림출판사에서 내는 콜렉션 시리즈 중 하나란 것만 봐도 아주 특별하죠.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해 한권 한권 수작업으로 만들었고, 그래서 에디션도 있습니다. 시가 가진 줄거리가 있고, 그것을 통해 그림이 나오긴 했지만 저는 이 책을 무용작품으로 만들 때 시의 내용에 얽매이지 않고,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집중했어요. 이 선들은 왜 여기에 연결했을까, 이 점과 저 선들 사이엔 왜 끊김이 있을까, 이 높이에 이 구두점들을 배치하다니, 이 정도였으면 정말 이상했을텐데 하면서 그 조형적인 아름다움과 구성을 즐겼습니다.
사실 말이나 글은 그 자체가 갖는 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공연에서 배우가 지는 해를 바라보며 “저 해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 반성하라고 하는 것 같아”라고 말하면 그 장면을 문장화된 느낌으로 이해합니다. 그와 달리 해의 밝기나 나뭇잎의 펄럭임을 말이 아닌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면 보는 이들은 각자 개별화된 감각과 텍스처로 그 순간을 기억하겠죠. 추상예술인 무용에 어떤 의미나 이해라는 조건을 들이대면 오히려 영원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 순간 멈춰 서서 차창 밖을 보는 건 그 장면이 색감이나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인데, 바로 그 순간이 어떤 사물을 완벽히 이해한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시간과 공간 속에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이 바로 무용입니다. ‘손을 왜 뻗었어?’ ‘그게 무슨 의미야?’ 라고 묻는 대신, 몸이 만드는 운동성과 조형의 아름다움을 그 순간 느끼고 간직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책을 무용작품으로 옮기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음악이었어요. 무곡의 형태로 피아노를 떠올렸고, 클래식, 국악, 음악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오신 신동일 작곡가님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피아노 2대가 연주하는 총 17곡의 완성도 높은 음악이 마치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듯한 느낌으로 무대를 가득 채우게 됐죠. 다음으론 블랙박스 형태의 극장에서 무용수들이 1시간 동안 춤출 수 있는 무대와 의상을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무용수들이 살 수 있는 음악과 무대를 먼저 결정했죠. 그런데 사실 이건 국립현대무용단이 아니면 굉장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감사하게도 곡이 빨리 나와서 석달 동안 매일 음악을 들으면서 리듬을 몸에 익혔어요. 지난 해 첫 공연을 앞두고 연습에 들어가기 전엔 저 혼자 리서치를 해서 조안무하고 무용수 한 분 모시고 2주간 2~3작품을 먼저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엔 2, 3일에 한 작품씩 안무를 끝냈고, 일주일에 4번 모여 최소 2곡 이상을 연습했어요. 저의 스트레스는 물론이고 무용수들도 정말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책은 정지되어 있지만 무용은 움직이잖아요. 그리고 음악은 시간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자유로운 무용수의 몸을 음악이라는 시간 위에 얹지 않으면 그냥 다 흐트러집니다. 그렇게 되면 굳이 작곡을 할 필요도 없이 즉흥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음악이라는 구조 안에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마치 작곡을 하듯 섬세하게 얹어야 해요. 동시에 아트북이 가지고 있는 아주 독창적인 유쾌함을 무용수들이 각자의 움직임대로 순간순간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합니다. 동작을 제가 다 만들어주지 않고 콘셉트를 주고 무용수들이 직접 만들어오게 한 건 그 때문이었어요. 그걸 제가 정리해서 움직임을 완성해가는 공동창작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책 자체가 워낙 단단하고 완성도가 높은데다, 유명하기도 해서 자칫 움직임이 재미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어요. 무용이 책과 너무 달라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너무 똑같아도 이상할거란 생각도 들었죠. 그런데 무용은 무용, 책은 책인데 책과 똑같이 할거면 굳이 무용을 만들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 책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지문, 또는 무늬는 남기 돼 스토리에 얽매이지 말자, 그리고 책으로 읽었을 때와는 다른 무용의 장르적 즐거움을 주자고 결심했죠.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움직여? 이런 재미들, 그리고 다리를 저렇게 두 개 뻗으니까 저런 그림이 나오네, 그런 걸 즐길 수 있게 하자, 그래서 가능하면 시각적으로 그 다음에 청각적으로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아주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게 힘들기도 했고, 또 나름 재미도 있었어요.
<구두점의 나라에서>는 3개의 장르를 관객의 느낌대로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맛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하나는 춤을 떠나 그냥 눈 감고 피아노 연주만 들으셔도 좋아요. 굉장히 연주를 잘하시는 분들이고 또 사실 2대의 피아노가 연주하는 신동일 작곡가님의 곡을 17곡이나 듣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라이브 연주의 떨리는 진동을 느낄 수 있고, 또 중간중간 끊어지는 짧은 곡들을 즐기는 맛도 아주 좋죠. 또 하나는 눈으로만 즐기셔도 좋아요. 하나의 장면이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라 20장 가까운 장면이 다양한 구성으로 펼쳐져서 시각적으로 절대 지루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무대에 꾸려진 전시만 보셔도 좋습니다. 저 뒤에 피아노가 있고 무용수가 등장하고 거기에 또 조명들이 비추면 마치 살아있는 전시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어느 쪽으로든 자유롭게 즐기시면 됩니다.
부모님들이 교훈적으로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이 작품에서 넌 뭘 느껴야 돼,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어라고 하는 게 얼마나 억압이에요. 오히려 아이들이 훨씬 더 넓은 해석력을 갖고 받아들이거든요. 메시지라는 억압에서 벗어나야지만 사실은 진짜 메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나만의 밥상 차리는 법, 나만의 책상 정리하는 법이 있듯이 누구나 본인만의 구성법이 있어요.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을 즐기거든요. 그것을 즐길 수 있으면 그건 또한 굉장히 고차원적인 감각을 지닌 겁니다. 그런걸 아이들 스스로 자유롭게 즐길 수 있게 미리 답을 내리거나 문자화해서 받아들이게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내가 더 풍요로워졌구나, 그리고 내 시선과 나의 청각, 피부의 감각들이 새롭게 경험되었구나 하는 걸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메시지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냥 재미난 것들이 막 떠다니네 움직이네 하는, 저는 그것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느낌을 가감없이 어떤 필터도 끼우지 않고 보신다면 그것 자체로 굉장히 즐거운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화성에서 공연을 하는 건 처음인데,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모두가 애써서 만들었는데, 지역의 더 많은 관객분들과 만날 수 있다면 안무가로서 감사한 일이죠. 지난해 예술의전당에서 선보인 첫 공연보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보실 수 있다는 것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째 공연인만큼 무용수 분들과 연주자 분들이 훨씬 더 즐기면서 하셨어요.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댄스 ON STAGE 1 :
국립현대무용단 <구두점의 나라에서>
장소 유앤아이센터 화성아트홀
기간 2022년 5월 5일(목)
시간 13시, 17시
관람등급 초등학생 이상
두댄스시어터 대표. 연출자이자 안무가다. <내려오지 않기, 2004>로 요코하마시 예술문화진흥재단 대상과 특별상을 수상했다. <불편한 하나, 2006> <기도, 2007> <제7의 인간, 2010> <닿지 않는, 2020> 등의 작품을 선보이며 실존하는 몸과 움직임에 대해 탐구해왔다. 최근엔 무용작품 <구두점의 나라에서>와 창극 <리어왕>을 선보였다.
에디터 최현주
포토그래퍼 황필주(studio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