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플레이리스트

연말을 앞두고 어김없이 애틋함이 스민다. 지난 시간과 장면을 돌아볼 때 우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마음 한구석에 남은 아쉬움을 어루만진다.

BOOK

아주 조금 더 간절한 것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허블, 2019

ⓒ 허블

“딥프리징은 우주 개척의 다음 단계를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의료계에서도 수요가 있었어. 당시는 새로운 질병에 대한 치료법이 날마다 쏟아져 나오던 때였으니까. 아무리 치명적인 병을 앓는 환자여도 한 10년쯤 얼어 있다 깨어나면 누군가가 해결책을 찾아두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던 시대였지. 마치 인류지성의 황금기를 보는 것 같았다니까.” 과거를 이야기하는 안나의 눈은 반짝거렸다. 남자는 그녀가 말하는 시기가 언제인지를 속으로 헤아려보았다. (중략) “하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네. 설령 알고 있었더라도 막상 그때로 돌아가면 내가 해왔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슬렌포니아로 갈 수 있었을까? 고민해봐도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네. 물론 해봐야 의미 없는 상상이긴 하지만.”

남자는 곧 철거될 우주 정거장에 버티고 앉은 안나가 곤란하다. 그는 제3행성 슬렌포니아를 기억하지 못한다. 운항이 끊긴 지 오래된 그 별에는 안나의 가족들이 있고, 미처 별에 닿지 못한 그녀는 빈 정거장에 멈춰 있다. 안나는 ‘딥프리징’ 프로젝트 성공을 코앞에 두고 가족을 다른 별로 먼저 보냈다. 그 무렵 의료계와 우주 개척 산업은 쉴 새 없이 변화와 발전을 거듭했다. 그녀가 역사를 바꿀 새 기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날, 지난 기술로 비효율적으로 여겨지게 된 우주선들은 마지막 출항을 나섰다. 안나는 인류 역사에 이바지할 한 걸음을 내딛는 대신 가족의 곁으로 가는 길을 잃은 것이다. 오래된 우주 정거장에 앉아 아득한 우주를 바라보며 노인은 스스로 묻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가족에게로 갈까. 그러나 오랜 세월 한곳을 바라보며 그리워한 끝에도 그녀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삶의 중요한 순간에 확신에 찬 선택을 하고, 그 결정을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우리가 고르는 것은 ‘최선의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간절한 것’일 때가 많다. 게다가 그 ‘조금’이 51대 49 정도의 아주 미미한 차이라면 어떨까. 돌아보았을 때 아쉽지 않은 선택은 드물지만, 잃어버린 것과 남긴 것을 바꿨어야했다고 말하는 일도 쉽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에 손을 뻗는다.

MOVIE

저마다의 골든에이지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1

ⓒ 미드나잇 인 파리

“여기에 머물면 현재가 될 거예요. 그럼 곧 또 다른 황금시대를 꿈꾸게 되겠죠. ‘현재’라는 건 그런 거예요. 늘 조금씩 불만스럽죠. 삶은 원래 그런 거니까요.”

밤이 깊은 파리의 골목에서 길 펜더는 수상한 차에 올라탄다. 낯선 언어로 손을 내미는 사람들을 선뜻 따라나선 건, 그들이 탄 차가 길이 동경하는 클래식 푸조라서가 아닐까. 단지 올드 카인 줄 알았던 차는 그를 옛 파리 예술가들의 파티에 데려다준다. 콜 포터의 연주를 들으며 피츠제럴드 부부와 인사를 나눈 그는 금세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눈치챈다. 1920년대 파리, 그가 늘 마음에 품어 온 ‘황금시대GOLDEN AGE’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피카소, 그리고 그들의 뮤즈 아드리아나. 길은 자신이 없어 어디에도 내놓지 못한 소설을 사랑해 주는 아드리아나에게 설렌다. 같이 여행 온 약혼녀 이네즈와 사사건건 부딪히며 무안해지는 동안, 길은 자정마다 시간을 건너 파리의 예술가들과 어울린다.

길과 아드리아나가 수상한 마차에 선뜻 올라탄 것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1900년대 벨 에포크(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의 파리. 아드리아나는 줄곧 꿈꿔 온 시대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만 돌아가자는 길에게 그곳에 남겠다고 한다. 길은 자신이 사랑한 ‘황금시대’를 마다하고 과거를 택한 아드리아나를 두고 현재로 돌아온다. 참고 외면해 온 문제들을 마주할 땐 골치 아프지만, 그가 바라보는 파리는 여전히 아름답다. 갈등과 환상을 내려놓은 길은 후련했을까. 어쩌면 그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삶이란 늘 목마르고 어딘가 허전하니까. 그래도 그는 그의 시대를 걷는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비 오는 파리의 밤, 그처럼 낭만을 이야기하는 이와 마주치는 행운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MUSIC

하루의 조각들을 모아
[멋진 하루 OST], 김정범, 2008

ⓒ 멋진 하루

10:12 AM 11:32 AM 12:45 PM 2:10 PM 
3:04 PM 4:26 PM 5:07 PM 5:48 PM 6:43 PM 
8:11 PM 8:52 PM 9:17 PM 11:59 PM 

지난 하루, 아니 요즈음을 돌아볼 때 듣는 음악이 있다. 음반 [멋진 하루 OST]는 희수와 병운의 하루를 그린 영화의 음악을 담은 앨범이다. 영화는 1년 전에 빌려준 돈을 갚으라며 나타난 희수와 갚을 돈을 찾으러 나선 병운이 함께 돌아다니며 보낸 하루를 그린다. 앨범은 시간이 적힌 열세 트랙으로 짜여져 있다. 10:12 AM, 11:32 AM, 12:45 PM…. 영화 내내 들썩이는 지질한 마음들과는 달리 음악은 낭만적이고 편안하다. 화려한 악기 소리나 가사에 방해받지 않고 작은 소리가 필요한 때 들어보는 것도 좋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장면에 간섭하지 않고, 마음을 괜찮게 하는 리듬을 만든다.

글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