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박자쯤 느리게 걷는 길에는

시민 에디터가 전하는 느림의 미학

‘걷기란 두 발로 하는 간절한 기도’라는 말이 있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평범한 일상에 새로운 발견을 안기고, 호흡을 느끼며, 사유의 세계에 흠뻑 빠져보는 시간이다.
느린 걸음으로 동탄호수공원 둘레길과 반석산 무장애길을 둘러본 시민에디터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그렇게 걷다 보면 선물 같은 풍경을 마주할 것이다.

시선에 온 감각을 쏟아 마음에 담는다

반듯한 길, 보도블록이나 공원 나무 데크 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높다란 건물에 시선이 간다. 언제부턴가 위로 길게 뻗은 아파트,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익숙해졌다. 그 사이를 파고드는 구름은 어쩐지 자유로워 보인다. 가끔은 다니기 편하게 만들어 놓은 길 말고,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길을 걷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걷기 편한 길보다는 발길이 닿는 대로, 혼자 걷는 길을 좋아한다. 형태 없이 흩어졌다 모이는 구름처럼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지면 나는 이어폰을 끼고 밖을 나선다. 주변 소리를 차단하고 내 시선에 온 감각을 쏟는다. 걷다가 내 시야에 깊이 들어오는 풍경은 소중해서 마음에 오래 담아두고 싶다. 때론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어지기도.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자주 걷는 길이 있다. 동탄호수공원 둘레길이다. 조금만 방향을 틀면 그새 키가 자란 미루나무길이 있고, 오산천으로 이어지는 길도 있다. 보통은 호수를 끼고 한 바퀴 천천히 걷는다. 자주 걷는 길이지만 느린 걸음으로 찬찬히 주변을 둘러본다.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한 손에 차가운 음료를 들고 온갖 사물에 시선을 둔다. 나뭇가지 끝이나 바닥에 떨어진 낙엽과 낙엽 사이를 바라볼 때도 있다. 아니면 물가에서 쉬는 오리, 물 밖에 나와 있는 거북이를 본다. 언젠가 호숫가를 걷다가 누가 나무에 달아 놓은 도토리 그릇을 발견했는데, 보물찾기를 하다가 보물을 찾은 듯 웃음이 났다. 가까이에서 만난 작은 행복이었다. 네모난 플라스틱 그릇에 가득 담긴 도토리와 밤.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도토리나 밤이 떨어질 때 다람쥐 먹이를 지켜달라고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

효자 최루백이 아버지를 죽인 호랑이를 찾아가서 직접 물리쳤다는 효암에 간 적이 있다. 효암은 홍법사 뒤 야산에 있는 바위인데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봤다. 커다란 바위틈 사이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 다람쥐가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바위 사이를 오갔다. 몇 마리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마리의 다람쥐가 요리조리 고개를 드밀었다 감췄다. 나는 그 자리에 숨죽이고 서서 다람쥐를 한참 바라봤다. 슬쩍 고개를 숙여보니 바위 밑에는 아이 한 명이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릇 두 개가 놓여있었다. 하나는 비어있었고, 다른 하나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산새와 다람쥐가 그릇에 쪼르르 모여 목을 축이고 간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아주 가끔은 한 박자쯤 느리게, 천천히 살아보자 . 그래도 괜찮다."

가끔은 천천히 살아도 괜찮아

얼마 전, 초등학생들과 마을에서 소풍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반석산 무장애길을 걸으며 사진 찍고 올까, 하다가 아이들에게 다람쥐 도시락을 싸보자고 제안했다. 아무래도 플라스틱 그릇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자연과 가깝게 그릇을 대용할 만한 것을 찾았다. 바나나잎을 엮어볼까, 하다가 수세미를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천연수세미를 손가락 길이로 잘라 구멍에 해바라기씨, 말린 옥수수, 바나나칩 등
을 넣었다. 아이들이 싼 수세미 도시락을 들고 산책을 나섰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먹이를 수북이 쌓았다. 나뭇가지에 수세미 도시락을 걸어 놓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수업이 끝난 이후에 몇 번이나 산에 다녀왔다고 소감을 전했다. 정말 다람쥐가 도시락을 먹고 갔는지 궁금한 마음이 아이들을 산으로 이끌었다. 산에 갈 때마다 발견한 것을 내게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자주 걷던 길이었는데 다르게 보인다고 말했다. 시계가 이끄는 대로 빠르게 움직이는 일상이 익숙해진 아이들은 어느새 느린 걸음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낼 때가 많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이 생긴다.
움직임을 조금 늦추면 새로운 것이 눈에 담긴다. 작지만 소중한 발견이 삶에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느린 걸음에 조바심을 내다가도, 이내 마음을 비우니 편안해진다. 꼭 내 뒤에 누군가 있어야 행복한 것일까.

아주 가끔은 한 박자쯤 느리게, 천천히 살아보자. 그래도 괜찮다. 다람쥐 밥그릇에서 나눔의 의미를 발견한 것처럼, 속도를 늦추면 모든 순간이 내게 선물처럼 다가올 테니.

글 차영선(2023《화분》시민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