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공연의 트렌드

해체와 참여

 

코로나19가 3년째 지속되는 팬데믹 상황에서 한 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공연예술의 경쟁력이었다. 비대면 사회가 지속되는 와중에도 공연 애호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공연장을 찾았고, 비대면 사회가 오히려 라이브 감성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었다. 팬데믹 사회가 커다란 블랙홀로 작용했던 공연계의 트렌드라고 한다면 다시 2019년 이전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공연계 역시 서서히 코로나19 이후를 준비하고 있지만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보다는 해왔던 것을 유지하고 회복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21세기 가장 두드러진 공연 트렌드, 해체

현대 공연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해체와 혼종’을 꼽을 수 있다. 최근 공연들을 보면 기존의 정통적인 특정 장르로 구분하기 어려운 작품들이 많다. 탄츠 씨어터를 표방한 피나 바우쉬의 춤은 무용에 연극적인 요소를 강하게 접목했고, 국립창극단의 최근 작업들 역시 창극의 고유성에 연극적인 면을 많이 가미했다. 매튜본의 <백조의 호수>는 종종 뮤지컬로도 분류되는 데, 이 작품은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백조의 호수>를 남성 백조의 이야기로 각색한 작품이다.
출연 배우 누구도 노래를 부르지 않고, 음악 역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현대적인 인물이 등장하고 새로운 이야기로 각색했다. 이것을 뮤지컬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매튜본의 <백조의 호수>는 영국의 올리비에상 뮤지컬 부문 후보에 올랐다.
최근 팬데믹 사회에서는 영상과 공연의 경계를 허무는 작품들이 실험되기도 했다. 영국 내셔널시어터와 국립영화위원회가 공동으로 개발한 <드로우 미 클로즈(Draw Me Close)>는 말기암 환자인 어머니와 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보통 애니메이션과 다른 점이라면 이미 녹화된 영상이 아니라, 현장에 있는 배우의 움직임에 따라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이 행동한다는 점이다. 관객은 VR 헤드셋을 끼고 관람을 하는데 그저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속 아들이 되어 작품에 참여한다. 이 작품의 결과물은 VR 영상이지만, 관객과 라이브로 만난다는 점에서 공연의 특성을 담고 있다.
<드로우 미 클로즈>를 기존의 영화, 또는 연극으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두 가지 요소가 혼종(hybrid)된 그저 <드로우 미 클로즈>인 것이다. 최근 공연들을 보면 연극에 영상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거나 또는 그 반대이거나, 이 작품이 춤인지, 연극인지, 게임인지 알기 힘든 작품이 많다. 앞으로 다양한 공연 양식이 혼종하는 작품들이 점점 더 많이 등장할 것이다. 이미 특정 장르로 규정지으려는 생각이 촌스러워졌다.

 

 

관객의 적극적 참여, 이머시브 시어터

코로나19 이전까지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re)는 공연계에서 가장 뜨거운 트렌드였다. 이전의 관객이 제4의 벽 밖에서 안전하게 공연을 관람하는 소극적 참여자였다면, 이머시브 시어터의 관객은 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원이 된다. 이미 이러한 공연 양식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이머시브 시어터라는 트렌드로 굳어진 것은 <맥베스>의 이야기로 만든 <슬립 노 모어 (Sleep No More)>의 역할이 크다.
영국에서 선보인 이 작품은 뉴욕의 5층짜리 폐건물 전체를 공연장으로 만들어서 상업화에도 성공했다. 관객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자 원하는 층에 내려 각 방에서 벌어지는 <맥베스>의 장면들을 지켜보게 된다. 운이 좋은 관객이라면 배우 손에 이끌려 같이 차를 마시거나, 인물의 하소연을 들어주기도 한다. <슬립 노 모어>에서 관객은 자신이 어느 방에 들어가서 무엇을 보았느냐에 따라 경험한 공연이 달라진다. 관객의 선택에 의해 감상한 공연 내용이 달라진다는 면에서 관객은 작가이자, 때로는 극에 참여하는 배우가 된다. 양식적으로는 정통적인 공연장의 해체이면서 관객과 작가, 배우의 개념을 해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해체가 관객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부여하면서 발생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관객들을 개츠비의 파티에 초대하는 이머시브 극 <위대한 개츠비>도 대표적인 이머시브 연극이다. 국내에서는 밀납인형 전시관인 그레뱅뮤지엄을 개츠비의 맨션으로 꾸미고 공연했다. 관객들은 개츠비 맨션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된 손님이 되어 등장인물과 눈을 맞추고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공연을 즐기게 된다. 메인 홀에서는 함께 춤을 배우기도 하고 파티를 즐기지만 좀 더 은밀한 이야기는 각 캐릭터를 따라간 방에서 이루어진다. 개츠비를 따라간 방에서는 데이지와의 은밀한 밀회를 엿보고, 머틀을 따라간 방에서는 친구인 닉에게 불륜 사실을 털어놓는 걸 엿듣게 된다. 이머시브 연극 <위대한 개츠비>는 피츠제럴드의 유명한 소설 속으로 관객을 안내해서 소설을 경험하게 하는 특별한 공연이었다.

 

 

 

성(性)의 벽을 넘어, 젠더프리
국내에서는 2016년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이후로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의 권위를 보호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2017년 할리우드 유명 영화 제작자의 스캔들을 폭로하는 미투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공연계에서는 젠더 인식이 높아지면서 기존 역할의 성을 바꾸는 젠더 프리(gender free), 젠더 밴딩(gender bending) 캐스팅이 인기를 끌었다. 2016년 독일에선 네로파(Neutral Roles Parity) 프로그램을 통해 대본을 분석해 보니 반드시 남성일 필요가 없는 역할조차도 남성이 캐스팅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수백 년 동안 남성 중심 사회가 유지되다 보니 연극에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다. 그런 불만을 해소하고자 기존 남성 캐릭터를 여성 배우로 캐스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2018년 런던 글로브극장의 예술감독인 미쉘 테리는 <햄릿>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어 공연했다. 국립극단의 <햄릿>에서도 이봉련이 햄릿 역을 맡아 성별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뛰어넘었다. 젠더 프리는 공연계에서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부족한 환경을 보완하는 동시에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연극 <비평가>는 비평가와 작가가 작품에 대해 토론을 하며 작가와 비평가의 역할에 대해 날선 갈등을 보이는 작품이다. 원래는 남자 배우가 출연했으나 재연에선 여자 배우로 바뀌었다. 대사는 모두 그대로 두고 배우의 성별만 바꾸었는데도 작품에 대한 갈등이 좀더 입체적으로 드러났다.
뮤지컬 <헤드윅>의 미국 투어 공연에선 헤드윅 역을 여자 배우 레나 홀(이츠학을 연기하기도 했던)이 맡으면서 작품의 의미를 심화시켰다. 헤드윅은 잘못된 성전환수술로 1인치의 살덩이가 남겨진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물이다. 성적으로 중립적인 역할임에도 그동안 남자 배우가 출연했는데, 이를 여성이 맡으면서 이분법적 세상에 가운데 손가락을 쳐드는 작품의 취지가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다.
젠더 프리는 기존 작품의 가치를 새로운 시각에서 더욱 풍부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성별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조금이나마 여성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앞으로 더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박병성

공연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과 ≪월간 공연전산망≫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박병성의 공연한 오후’로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연재 중이며, 저서로는 ≪뮤지컬 탐독≫이 있다.

 

 

글 박병성(공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