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3·1운동 만세길
화성 3·1운동은 불굴과 끈기의 투쟁이었기에 1919년 당시 사람들이 걸었던 만세길은 역동적이며 힘찬 생명력과 함께 우리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103년 전 그 현장을 두 발로 걸으며 3·1운동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보는 건 단순한 역사 공부를 넘어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는 특별한 기회도 될 것이다.
화사한 꽃이 만발한 계절, 이제는 위로와 기억의 의미를 넘어 ‘희망’을 이야기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경기도 화성은 역사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각 전성기였을 때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역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국토 가운데 유일하게 삼국시대 유적이 모두 출토되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경기 남부의 중심지로 남양과 수원 일부가 포함된 넓은 영역을 갖고 있었다. 과거 한양을 제외하고 정치·행정·군사의 중심지로 찬란했던 모습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쇠퇴하였다가 최근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현재 시민들이 기억하는 화성은 어떤 이미지일까?
정보통신의 발달로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다양한 온라인 매체를 들여다보면 화성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과 이미지들이 각양각색 나열되어 있다. 이중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지어 살펴본다면 화성은 대체로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각인된 듯하다. 그러나 화성은 일제의 살인적인 수탈과 탄압에도 자주독립에 대한 민족의 염원을 격렬히 표출한 대표적인 지역이다. 역사 전공자들은 판결문, 신문조서, 일제 주요 감시 대상 인물카드 등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공세적 3·1운동, 폭력적 3·1운동이 전개된 곳으로 주저 없이 화성을 꼽는다. 이와 더불어 일제강점에 대한 저항보다는 독립운동의 가치와 의미를 알려야 한다는 의견들도 속속 표출되고 있다.
기념관 교육에 참여하거나 관람하는 것도 독립운동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좋은 방법이지만, 1919년 당시 사람들이 걸었던 만세현장을 직접 걷는 것 또한 3·1운동에 대한 안목을 키우고 알찬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화성시 서남부 지역에는 우정읍과 장안면이 있다. 이곳에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통한 화성 3·1운동 만세길이 있다. 총 길이 31km인 이 길은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100년 전 화성독립운동가들이 걸었던 길의 약 60% 이상을 복원하여 조성되었다. 안내소 역할을 하는 방문자센터를 기점으로 독립운동가 집터, 생가, 관공서, 횃불시위운동 장소 등 총 15개의 유허지가 표시되어 있다.
만세길 가운데 화성 3·1운동의 정취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곳을 꼽는다면 방문자센터~화수리주재소터~한각리 광장터~최진성집터에 이르는 A코스를 들 수 있다. 방문자센터는 우정읍 화수리 (구)우정보건지소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조성되었다. 첨탑 형태의 외벽에는 화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을 활용해 추모의 의미를 더했고, 내부의 오래된 벽 위로 격자 형태의 구멍이 뚫린 새로운 벽을 쌓아 올려 방문객들이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조형미가 돋보이는 이 건물은 ‘2019 아이코닉 어워드’에서 건축 분야 대상(BEST of BEST), ‘IF 디자인 어워드 2020’에서 금상을 받은 작품이다. 만세길의 출발점이자 추모의 공간인 방문자센터에는 방문객들이 정보를 얻고 쉬어갈 수도 있는 휴게실과 화장실 등 편의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교가 있어 당시 상황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3·1운동 기념비와 함께 이곳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설명하는 표지판이 서 있다. 주재소는 일제강점기 순사가 경찰사무를 맡아보던 곳으로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군중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한 곳이다. 만세를 외치던 마을 주민들은 저녁이 다 되어갈 무렵 일제히 화수경찰관주재소에 도착하여 주재소를 에워싸고 격렬한 시위를 하였다. 주재소 안에 있던 순사보 3인은 황급히 건물 밖으로 나와 도망쳤으나 내부에서 동태를 살피던 일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川端豊太郞)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며 달아났다. 가와바타가 쏜 총에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장안면 사곡리의 이경백 애국지사는 순국하였다. 총을 발포한 가와바타는 주재소 북쪽의 뒷산으로 도망갔으나 그를 뒤쫓은 군중에 의해 처단되었다.
세 번째 유허지인 최진성 집터는 화수리주재소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유허지간 간격이 좀 길다고 느낄 수 있지만 화성 농촌 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기에 어쩌면 1919년 3·1운동 당시를 느끼며 걷기 좋은 구간이다. 계절마다 다른 농촌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하는 봄부터 벼가 자라고 주변의 나무가 무성해지는 여름, 농로 주변에 사람 키보다 더 높이 자란 억새풀 사이로 고개 숙인 벼를 추수하는 가을, 왁자지껄했던 들녘이 휴식에 들어간 겨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겨울은 무성했던 버드나무 잎이 다 떨어지고, 고개 숙인 벼들도 사라지고, 논바닥에 짚을 짧게 잘라 깔아 놓은 짚가리가 썩어가기를 기다리는 풍경은 겨울 들녘의 황량함과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다.
최진성(崔鎭成, 1903~1972)은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서 마을 조사를 통해 최근에 밝혀진 독립운동가이다. 한각리 마을 사람들과 함께 뒷동산에 올라 횃불시위를 전개하고, 우정·장안 연합만세시위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주도자 색출을 명분 삼아 수색작전을 펼치고 한각리에 들어와 최진성의 집에 불을 질렀다. 불이 사방으로 번지자 마을사람들이 힘을 합쳐 최진성 집의 불을 껐는데, 물이 귀했던 시절이었기에 장독대 안에 있던 간장까지 사용하여 불을 껐다는 일화는 이 지역에서 유명하다.
간장독은 후손이 기증하여 현재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향후 (가칭) 화성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되면 전시할 예정이다. 이밖에도 만세길에는 차희식 집터, 차병혁 생가, 쌍봉산 만세 시위지, 개죽산 횃불 시위터, 수촌교회, 김연방 묘소 등 여러 곳이 있다. 타 지역과 비교해 보면 농촌이라는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인물, 종교, 향촌 사회의 특색이 나타나는 다양한 유허지들을 만날 수 있다.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화성에서는 매년 제암리 학살 사건과 관련해 지역의 3·1운동을 알리고 희생자들에 대해 ‘위로’와 ‘기억’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화성 3·1운동은 불굴과 끈기의 투쟁이었기에 만세길은 역동적이며 힘찬 생명력과 함께 우리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선열들의 지치지 않는 노력과 끝없는 희망 덕분에 우리는 큰 힘을 얻었고 독립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제는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기억의 의미를 넘어 ‘희망’을 담아내야 하는 시점에 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추운 겨울 지나 어느새 따뜻한 봄이 왔다. 걷기좋은 날 만세길에서 화성의 기억을 느껴보시길 기대한다.
에디터 김태동(독립운동문화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