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철
오페라 카르멘 2막에서 흐르는 아리아 ‘당신이 던져 준 이 꽃은’(La fleur que tu m’avais jetée) 카르멘이 던져준 꽃으로 옥중에서의 시련을 견뎌내는 돈 호세의 노래이다.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의 《카르멘》은 사실주의 오페라로 불리며 하층민의 어두운 삶과 새로운 여성 캐릭터로 많은 작곡가들을 매료시켰다. 유약하며 카르멘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돈 호세(테너)의 운명은 2021년의 오페라 테너에게 어떻게 재해석될까.
“음악을 시작한 것은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입니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에 입학했는데, 당시 포항에서 ‘서울대학교’ 입학은 큰 경사였어요. 그런데 음악대학이라니 마치 ‘딴따라’처럼 대하는 걸 보고 클래식에 대한 편견뿐만 아니라 예술가가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수준을 알 수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응원에 힘입어 즐겁게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간디는 ‘동물이 받는 대우로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를 가늠한다’고 했지만, 우리는 예술가의 사회적 인식과 대우로 예술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도 있다. 이규철 테너는 ‘소리를 내는 법’부터 차근차근 쌓아가 콩쿠르에 입상하며 알았다고 한다.
“나는 노래를 계속해야 하는 사람이다”라고. 대학교 졸업 후 경제적 사정으로 바로 유학길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 과정 또한 클래식 음악이 갖는 사회적 기능을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운이 좋았었다”라고 하지만 2003년 명문인 퀼른 대학에서 첫 시험에 합격을 했다. 500명의 한국 사람들만 따로 시험을 볼 정도로 지원이 많았는데, 총 4명을 뽑는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실력이 결코 운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학기 시작 후 ‘드레스덴 콩쿨’에 출전하면서 에이전시를 만나 2005년부터 8년간의 극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극장 생활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기에 학장님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습니다. 학점 상태를 점검해 1학기 조기졸업을 할 수 있었고, 최고연주자 과정 또한 빨랐어요. 시험에서부터 학사과정까지 운이 좋았기도 했지만 참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2005년 1월부터 2012년 8월까지 두 극장에서 전속으로 일하다 보니, 예술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공적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노력은 자신의 몫이지만 운이라는 것도 사회적 기능이 작용할 때 따른다고 생각됩니다.”
독일과 유럽에서 음악과 예술에 대한 높은 사회적 인식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공연을 끝내고 카페테리아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오페라 가수라고 했더니 고위공직자를 대하듯이 하며 사인을 받아 간 일화도 있었다. 예술인에 대한 존중은 시민들뿐만 아니라 공공 시스템이 굳건히 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무척 부럽기도 했다. 30여 작품으로 600여 회의 오페라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예술가에게 한 작품을 이해하고 훈련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과정이 되었다.
“한국은 사설 극장이 많은 반면 독일은 극장 전속이라는 제도가 있어요. 한 극장에 발레, 연극, 합창단, 오케스트라 등이 소속되어 있어 한 해 예산이 무척 많은데 시나 주에서는 1년 예산의 20-30% 정도 지원을 하고, 나머지는 유명 자동차 회사 같은 기업 후원을 받습니다. 그에 따라 행정에서는 후원금만큼 세금 감면을 해주니, 극장에 소속된 예술가들이 안정적으로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지요. 예술에 대한 존중이 사회시스템으로 정착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도 조금씩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독일과 유럽에서 음악과 예술에 대한 높은 사회적 인식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공연을 끝내고 카페테리아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오페라 가수라고 했더니 고위공직자를 대하듯이 하며 사인을 받아 간 일화도 있었다. 예술인에 대한 존중은 시민들뿐만 아니라 공공 시스템이 굳건히 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무척 부럽기도 했다. 30여 작품으로 600여 회의 오페라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예술가에게 한 작품을 이해하고 훈련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과정이 되었다.
“한국은 사설 극장이 많은 반면 독일은 극장 전속이라는 제도가 있어요. 한 극장에 발레, 연극, 합창단, 오케스트라 등이 소속되어 있어 한 해 예산이 무척 많은데 시나 주에서는 1년 예산의 20-30% 정도 지원을 하고, 나머지는 유명 자동차 회사 같은 기업 후원을 받습니다. 그에 따라 행정에서는 후원금만큼 세금 감면을 해주니, 극장에 소속된 예술가들이 안정적으로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지요. 예술에 대한 존중이 사회시스템으로 정착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도 조금씩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2013년 귀국길에 올랐다. 잠시 서울에 머물다 2015년에 경기도 화성시 동탄으로 오면서 화성시의 다양한 문화 활동과 공공정책의 지원 사업도 알게 되었다. 독일과 한국의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시스템이 다르다고 해도 나고 자란 곳도 그동안 많이 변했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노래를 계속해야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그 나라, 그 지역이 아니던가.
“한국에서는 주로 오페라 공연을 하는데 오는 8월에 스탠딩 오페라를 준비하고 있어요. 오케스트라와 하우스 콘서트, 독창회를 열기도 하고 다음 세대들을 위해 제도적인 문제에 대한 소리를 내기 위해 활동 중입니다. 2020년에 연주하는 단체를 만들어 시작했는데 코로나19로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불러주는 곳에서는 친숙한 레퍼토리를 선곡해 대중에게 더 가까이 가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이규철 테너는 5월 26일 화성시문화재단 2021년 <더 H 콘서트>에 출연한다. “화성시에서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그는, 이번 공연이 지역 예술을 체감할 수 있는 기회이고 또한 재단과의 협업을 통해 공적 영역의 문화예술이 아티스트와 시민을 어떻게 연결하는지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슈베르트 전곡 독창을 세 번 할 때마다 음악의 색깔과 관객과의 호흡이 달라졌다는데, ‘테너 이규철과 화성시민’과의 호흡은 어떤 빛깔일까?
“음악은 삶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생활이 기반이 되어야 하고 삶을 꾸려가야 하는 건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 코로나와 같은 특수한 시기에 공기 같은 음악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연주자들과 관객들이 아쉽기만 합니다. 유학을 떠날 때와 돌아온 지금, 연주할 때 고용보험을 가입을 하는 것처럼 사회적 변화가 느껴집니다. 삶이 지속되는 것처럼 모든 변화가 한꺼번에 이루어질 순 없지만 좀 더 많은 대중들을 만나길 바랍니다.”
현재 입시를 앞두거나 유학을 준비 중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음악 코치도 하고 있다. ‘나를 떠나서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고자 한다’는 마음으로 대학입시뿐만 아니라 더 멀리 보는 안목을 키워주려 한다. 그들의 수년간의 노력이 단 1분 30초 안에 평가를 당하고 결과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것이 안타까웠다. 지금은 비록 입시생이지만 훗날 무대에 같이 오르게 될 동료이기에 후배들을 위해 우리 세대에서 더 좋은 제도를 만들어야겠다는 각오가 생긴다. 누군가에겐 음악이 즐겁게 누리는 것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삶, 전체일 수도 있기에.
“귀국하고 선배로부터 팝스오케라와 공연을 하는데 독창회를 부탁받았어요. ‘꿈과 희망’이 콘셉트인 공연이었는데 오페라 아리아, 소프라노, 가요 등이 울려 퍼졌고 관객으로 여고생들이 많이 왔죠. 독창회가 끝나고 사인을 하는 동안 출구 쪽 문에 한 학생이 계속 서있는 거예요. 대기실로 들어가는데 그 학생이 다가와 눈물을 흘리며 “학교폭력으로 자살기도하려 했는데 오늘 선생님 공연을 보고 잘 이겨내고 살아봐야겠다”라고 하더군요. 눈물이 났어요. 내 노래가 때로는 누군가를 살게 하는구나 싶어서 말이죠.”
그때부터였을까. 음악이 관객들을 치유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장르를 따지지 않고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게 되었다. 즐거움은 배로 높여주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런 음악은 치유이다. 이규철 테너는 노래를 계속해야 하는 사람이며,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날 한 여고생의 고백을 통해 알았다. 그에게 누군가 음악을 왜 하냐고 묻는다면 답할 것이다.
“나는 음악을 계속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글 최화정
사진 김영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