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억에 남는 첫걸음은 언제인가요?

화성인의 대답

‘처음’이라는 말은 어딘가 어색하지만 설렌다. 모든 것의 처음은 소중하고 꽤 강한 기억을 남긴다. 나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삶을 살아온 이의 처음이 궁금해 화성시에 사는 5명의 시민에게 물어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첫걸음은 언제인가요?

신화영|주부

상하이로 내디딘 첫걸음

3개월 동안 중국어를 배우고 인턴을 떠난 때가 떠올랐다. 상하이 푸동공항에 도착한 그날을 내 첫걸음으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20대의 나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기회는 의외로 빠르게 찾아왔다. 겁나기도 했지만 후회하기보다는 일단 부딪쳐 보자는 마음으로 나는 걷기로 했다. 첫걸음을 떼던 순간에는 상하이에서의 인턴십 경험이 중국에서 일할 기회를 열어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참 많이 그리운, 미숙하지만 순수한 열정과 꿈이 있던 20대의 나. 어느덧 40대가 된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넌 참 용기 있었고 잘해냈어!” 코로나 바이러스로 6세 아이와 집에만 있는 요즘, 모두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겠지만 곧 따뜻해질 봄날을 기대해 본다.

정효인|프리랜서

아이들에게 배운 활기찬 첫걸음

얼마 전,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퇴사를 했다. 그런데 생각만큼 진로에 대한 확신이 오래가지 않았고, 이내 자괴감과 우울증이 찾아왔다. 몇 달 정도 우울감에 젖어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던 중, 좋은 계기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매일 아이들과 지내면서 생활에 활기를 찾을 수 있었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감사함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내가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걸 깨달으며 그 에너지로 프리랜서로의 삶을 더욱 열심히 준비하게 됐다. 물론 아이들과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이윤영|직장인

마음을 다잡은 엄마의 첫걸음

갓 돌이 지난 아이를 기관에 맡기고 회사로 복귀하던 첫날이 떠오른다. 어린이집 문 앞에서 엄마와 헤어지기 싫다며 울고불고 매달리던 아이. 그 아이를 두고 뒤돌아서는데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에 한 발자국 떼기가 어찌나 어렵던지…. 살면서 망설인 경험이 거의 없는데, 아이의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어린이집 문 앞에서 고민하고 망설여야 했다. ‘회사 가지 말까?’, ‘아냐, 그래도 가야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다가 눈물을 훔치며 회사로 향했던 그날. 엄마로서 한 뼘 더 성장하고 마음이 단단해지던 날이었다. 지금은 웃으며 인사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날의 첫걸음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이연주|직장인

웃으며 추억하는 워킹맘의 첫걸음

3개월의 출산 휴가를 받고 복직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아이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베이비시터를 찾게 되었다. 그 무렵 베이비시터가 아이를 학대한 사건 때문에 세상이 떠들썩했고, 복직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베이비시터 사이트도 찾아보고 이곳저곳 수소문도 했지만,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잘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점점 급해지고 우울감은 커지고….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지역 맘 카페에 글을 올려 보기로 했다. “성당 다니는 분 중 3개월 여아를 봐주실 분 있을까요?” 종교가 같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큰 기대 없이 글을 올렸는데, 다음 날 쪽지가 왔다. “제 세례명은 카타리나이고 다은마을에 살아요. 연락주세요.”라는 쪽지였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내 세례명도 카타리나였기 때문에 인연이 아닐까, 싶은 마음으로 연락했고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카타리나 이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워킹맘으로 출근하는 첫걸음. 12월의 날씨처럼 마음이 서늘하기도 했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계속 일할 수 있다는 기쁨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5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카타리나 이모님은 우리 아이의 진짜 ‘이모’가 되었고, 3개월이던 딸도 어느덧 7살이 되었다.

정희아|학생

엄마 품에서 내디딘 첫걸음

처음이라는 말이 주는 설렘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가슴속에 남아 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나의 첫걸음은 설레는 맘으로 유치원에 입학하던 날이다. 나는 집안의 둘째이자 막내로, 두 살 위인 언니가 있어 늘 뒷전이었다. 나는 기억이 없던 때부터 ‘엄마 껌딱지’로 불릴 만큼 엄마와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오죽하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엄마 등에 업혀 있었고 엄마가 쓰러졌을 때도 꼭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 내가 조금씩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건 언니가 유치원에 다니면서였다. 언니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때면 엄마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고, 언니가 버스에서 내리면 재빨리 뛰어나가 가방을 대신 들고 기분 좋게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 가방에는 언니가 내 몫으로 남겨온 과자나 사탕이 들어 있었는데, 그걸 먹으며 유치원 이야기를 듣는 게 달콤한 즐거움이었다. 그때 소원은 나도 유치원에 가는 것이었다. 노란색 유치원 가방을 메고 유치원 버스에 오르는 꿈! 그러다 정말 소원이 이루어져 유치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입학식 전날부터 가슴이 콩콩 뛰는 설렘을 느꼈다. 더는 언니의 노란 가방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어 좋았고 내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다는 것만으로도 큰일을 해낸 것처럼 뿌듯했다. 다른 무엇보다 늘 엄마 치맛자락만 붙잡고 다니던,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내가 혼자 힘으로 바깥세상으로 걸음을 내디딘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설렘만큼 불안도 커서 밤새 잠을 설쳤고, 결국 유치원 입학식 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설렘과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울음이었다. 그 울음을 시작으로 나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놓고 세상으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에디터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