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민요 소리꾼, 이희문
지난 11월 27일 반석아트홀에서 화성시 시 승격 20주년을 기념한 특별공연 Ⅲ <여민동락(與民同樂) 그들의 숨결>이 열렸다. 세종국악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민요, 판소리, 설장구, 양금, 테레민 등 우리나라 대표 아티스트들이 역동적인 무대를 선보인 시간. 그 마지막을 장식한 주인공은 세계를 놀래킨 소리꾼 이희문이었다. 경기민요란 DNA를 장착한 채 스스로를 새로운 실험대 위에 올리는 두려움 없는 모험가. 무대의 열기가 더할수록 객석에서 “얼씨구, 좋다!”가 더 많이 나올수록 그의 소리엔 힘이 붙었고, 그의 어깨엔 흥이 실렸다.
11월의 쾌청한 주말 오후, 반석아트홀에 상기된 얼굴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비록 한 좌석씩 띄어 앉고 방역수칙도 철저히 지켜야 하지만 위드 코로나 덕분에 대면 공연이 가능했던 것. 세종국악
심포니오케스트의 파워풀한 연주와 함께 시작된 <여민동락(與民同樂) 그들의 숨결>은 신비로운 천사의 목소리 같은 테레민과 휘몰아치는 말들의 질주를 표현한 양금, 카리스마 넘치는 설장구 연주, 그리고 ‘이희문과 놈놈’의 무대로 이어졌다.
“코로나19로 그동안 관객과 함께 하는 무대가 없어서 정말 아쉬웠어요. 하반기 들어 위드 코로나가 된 후엔 대면 공연이 많아져서 다행이다 싶고, 와 주시는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공연자 입장에서 객석에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정말 크거든요. 관객분들께 에너지를 받고 그 에너지로 폭발할 수 있으니 훨씬 즐겁고 신이 나죠.”
단발머리에 선글라스, 어깨가 풍성한 재킷에 하이힐을 신은 이희문 씨와 검은색 도포에 선글라스를 쓴 놈놈(조원석, 김주현 씨). 역시 파격적인 의상으로 유명한 그의 등장에 객석이 웅성이며 애정 가득한 환호가 날아든다. “멋있어요!” “잘 생겼어요!”란 객석의 호응을 “나도 알아요”로 넉살좋게 받아든 그. 박상우 지휘자의 경쾌한 몸짓과 함께 시작된 무대는 ‘난봉가’와 ‘이리렁성 저리렁성’, ‘육 칠월 흐린날’, 그리고 ‘청춘가’로 신명나게 이어졌다.
“오늘 무대에서 선보인 곡들은 프렐류드, 놈놈과 함께 하는 ‘한국남자’의 레퍼토리들이에요. 이 곡들을 세종 국악심포니오케스트의 관현악 버전으로 들려드린 겁니다. 이중 ‘육 칠월 흐린 날’은 잡가라고 해서 민요와는 다른 장르의 곡인데, 프렐류드가 편곡한 곡을 관현악 버전으로 하면 어떨까 해서 다시 편성해봤어요. 지휘자를 포함해서 연주자분들이 모두 젊으셔서 좀더 젊은 감성, 파워풀한 에너지를 느끼셨을 거예요.”
우리가 ‘이희문’이란 이름을 알게 된 건 2017년 미국 공영 라디오 NPR의 ‘Tiny desk concert’ 에서 였다. 진한 화장에 풍선처럼 부풀린 머리, 금박의 반짝이는 옷을 입은 그는 인조 눈썹을 천연덕스럽게 말아 올리는 신승태와 함께 경기민요를 메들리로 불러 재꼈다. 아델, 맥클모어, 요요마, 존 레전드 등 세계적인 뮤지션이 출연한 작지만 큰 무대. NPR이 포착한 그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여장한 남자의 비범한 춤사위, 곡예하듯 소리의 줄을 타며 노는 그의 퍼포먼스는 신선함 이상의 충격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희문’을 다시 발견한 건 그가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이며 그의 어머니가 명창 고주랑 선생이란 걸 알게 되면서였다. 특이한 의상과 레퍼토리로 주위 끌기에 성공한 퍼포머. 그에 대한 성급한 오해는 곧 비상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스물 일곱 늦은 나이에 소리를 시작했어요. 어머니 따라서 공연을 보러 갔다 어릴 때 뵈었던 이춘희 선생님을 다시 만났는데, 흥얼거리며 민요를 따라 부르는 절 보고 소리 한번 해보겠냐고 물어보셨어요. 우여곡절 끝에 서울예술대학교 국악과에 들어갔는데, 춤 좋아하고 자유분방한 저에게 전통음악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제약이 많았어요. 방황하던 그때 안은미 선생님을 만났고, ‘남들과 다른 것이 가장 나 다운 거다, 너를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 주셨죠. 오디션을 거쳐 선생님의 작품 <프린세스 바리>의 주인공을 맡았고, 이후 지금까지 제가 컨템포러리 작업을 하는데 자극과 조언을 해주고 계세요.”
몸에 꼭 붙는 핫 팬츠에 망사 스타킹, 목을 치렁치렁 감싼 장신구에 20cm 킬힐. 빨간 립스틱과 까만 매니큐어, 굵은 아이라인과 한껏 말아 올린 속눈썹. 이희문 씨의 의상을 보고 드래그 퀸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가 선택한 아이템은 이희문이 하고 싶은, 가장 이희문스러운 이야기의 표현 방식인지 모른다. 최근에 선보인 콧수염과 퍼프 소매 드레스, 발광하는 네온그린도 그의 연장선. 이번
엔 20년 지기 친구 박승건 디자이너가 함께 했다.
“프로젝트마다 스타일링을 고민하는데, 멤버가 많아지고 그만큼 신경 쓸 부분도 많아 저 혼자 하는게 버거웠어요. 고맙게도 박승건 씨가 흔쾌히 스타일링 콘셉트를 잡아줬죠. 오방신(이희문)이 고통과 번뇌로 가득한 사바세계에서 중생(관객)을 탈출시켜 주는 ‘오방신과(OBSG)’에선 네온그린을 제안해줬는데, 자연에 없는 색인데다 도전, 반항, 젊음을 뜻하기도 해 이거다 싶었죠.”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로 세상에 존재를 알린,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이희문 씨. 하지만 기괴하리만큼 매력적인 그의 무대는 어느 날 뚝딱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2008년부터 꾸준히 개인 무대
를 선보였고, 2013년엔 안은미 선생과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잡(雜)을 만들기도 했다. 낯설고 실험적인 12잡가로 12개의 무대를 연출한 이 프로젝트에 그는 1억 원이 넘는 사비를 들였고, 이후 쾌(快)와 탐(貪)
까지 3부작을 완성했다. 2016년부터 3년 동안 이어진 ‘깊은 사랑(舍廊)’ 시리즈는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사랑방에 대한 이야기다.
“옛날 농한기 땐 노는 땅을 움집처럼 파서 사랑방으로 만들었다고 해요. 깊은 곳에 있는 사랑방이라고 해서 ‘깊은 사랑’이라고 불렀죠. 그곳에 모인 귀명창들이 소리꾼들을 불러 소리를 청해 들었는데, 오롯이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깊은 사랑에서 그분들은 어떤 소리를 했을까, 하는 상상을 했어요. 깊은 사랑 시리즈는 2017년 ‘사계축’과 2018년 ‘민요삼천리’까지 3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일종의 민요 아카이빙이었는데, 그렇게 민요의 역사를 들여다보며 제가 훨씬 자유로워지는 걸 느꼈어요.”
최소 박사 출신의 글로벌 재즈 밴드 프렐류드와 손을 잡은 ‘한국남자’에 이어 레게 밴드 ‘허송세월’, 조선의 아이돌 ‘놈놈’이 함께 한 오방神과(OBSG), 그리고 전통과 소리의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 선율악기를 배제하고 목소리만으로 무대를 채운 프로젝트 날(陧)까지 그의 도전은 종과 횡, 시대와 영역을 넘어 폭넓은 스펙트럼을 선보였다. 그 안에서 언제나 척추처럼 버티고 서 중심을 잡는 건 경기민요. 그를 이토록 매혹시킨 경기민요의 매력은 무엇일까?
“경기민요는 남도소리와 다르게 블랙 코미디 같은 면이 있어요. 내용은 한이 있고 슬픔도 깊지만 멜로디는 밝고 경쾌하죠. 경기민요의 그런 면이 풍자와 해학을 만들어내요.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경기민요를 잘 몰라요. 판소리와 민요도 구분 못하고 그냥 다 같은 것이라 생각하죠. 그래서 제가 더 유명해져야 해요. 유명해져서 더 새롭고 더 매력적인 걸 보여주면 경기민요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될 거예요.”
경기민요 소리꾼 이희문. 공연자이자 연출자이며 아티스트이자 제작자이기도 한 그를 한 마디로 표현 하기란 갈수록 더 어렵다. 세상에 없던 무대를 만들고 두려움 없이 그 무대에 오르는 모험가. 그의 다음 프로젝트는 소리꾼 이희문 이전의 이희문, 소년 이희문에 대한 이야기다. 총 3부작으로 그중 1부인 ‘강남 오아시스’가 내년 2월 18~20일 세종문화회관 S시어터에 올려진다. 그 시절의 이희문은 어떤 모습일까. 그가 우리 별에 당도하기 전 그 행성의 이희문이 몹시 궁금해진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인간문화재 이춘희 선생에게 사사했다. 2017년 밴드 ‘씽씽’으로 NPR의 <Tiny Desk Concert>에 출연하며 국내외 팬들에게 경기민요를 알렸다. 민요와 재즈, 레게와 소울을 넘나드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에디터 최현주
포토그래퍼 남윤중, 화성시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