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같은 여행, 여행 같은 일상
사상 초유의 팬데믹으로 여행자들의 발이 묶인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그 긴 시간을 지나 어느새 거리두기도 종료되고 입국 제한도 해제되어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선뜻 여행을 가기에 조심스러운 마음이 든다면 책으로 먼저 떠나보는 건 어떨까. 유명한 관광지나 명소를 둘러보는 여행이 아닌, 조금 색다른 여행을 떠난 작가들의 책을 소개한다.
“예감은 정확했다. 바쁘게 회사 일을 하다가 문득, 밥을 먹다가 문득, 지하철 안에서 문득, 이상하게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것은 그런 순간들이다. 너무 아무것도 아니라서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순간들. 그리하여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그리움들. 이런 그리움이 유난히 지독한 날에는, 약이 없다. 다시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다. 유용한 시간을 그만두고 무용한 시간을 찾아 길 위에 다시 설 수밖에 없다.” (본문 164~165쪽)
광고회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작가인 김민철의 ≪모든 요일의 여행≫은 여행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여행 에세이이다. 바쁜 일상에서 겨우 벗어나 떠난 여행에서 마주하는 것이 빽빽한 일정표와 서울인지 미국인지 구분되지 않는 일관된 환경의 숙소, 남들 다 가는 명소 앞에 줄 서서 찍는 사진이라면 식상하지 않을까.
작가의 여행은 다르다. 중심가에서 비켜난 곳의 저렴한 숙소, 잠시 여행을 떠난 현지인의 방, 재래시장에서의 식사, 시장에서 사 온 재료로 직접 만드는 음식, 천천히 산책하며 마주하는 현지 사람들의 일상, 공원에서 가볍게 즐기는 술 한잔, 온종일 집에서 뒹구는 하루 등. 작가에게 여행은 평소보다 여유롭고 느긋한 평범한 일상이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이 일상과 다르다면 다른 점일 것이다.
SNS에 올릴 행복하고 평온한 사진 한 컷을 얻기 위한 여행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모든 여행이 사진처럼 좋을 수만은 없다. 때론 불편함을 감수하기도 하고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 날도 있고,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래도 일상 같은 여행 속에서라면 그런 일은 큰 문제가 아니다. 작은 마을과 그곳의 사람들, 그들의 일상에 살며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자기만의 일상을 만들어가는 여행을 통해 작가는 오롯이 자기만의 여행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여행도 한 번쯤 해볼 만하지 않을까?
“축제장 음지의 꽃인 품바도 있고, 그 품바에 위로 받는 팬들이 있고, 아이들을 달래가며 공연하는 마술사가 있고, 만만찮은 지역민들의 입담을 능숙히 받아치는 노련한 사회자들도 있다. 우리가 아는 세계, 아니 상상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 생각보다 수많은 취향과 노력이 질서를 이루어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우리 또한 누군가들이 아는 세계의 바깥이겠지.” (본문 282쪽)
조금 더 이색적인 국내 여행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전국축제자랑≫은 김혼비, 박태하 작가 부부가 2018년 10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열두 개의 축제를 다녀와서 함께 쓴 책이다. 수백 개의 전국 축제 중에서 지역과 주제를 배분하고 많은 사람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수도권 축제를 제외한 지방 중소 도시들의 축제를 선정하여 탐방객의 시선으로 적은 여행 에세이이다.
지역 축제라고 하면 흔히 특산물과 관련된 주제나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인물이나 사건을 주제로 하는 축제를 떠올릴 것이다. 물론 그런 축제에 방문한 내용도 있지만, ‘우리나라에 이런 축제도 있었나?’ 싶은 축제들도 눈에 띈다. 젓가락 페스티벌, 완주 와일드푸드 축제가 그러했다. 2015년 동아시아 문화도시로 선정된 충북 청주는 11월 11일을 젓가락의 날로 지정했고 당시 청주 명예조직위원장이었던 故 이어령 선생의 아이디어로 젓가락 페스티벌이 탄생하게 되었다. 조금 엉성한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든 축제를 잘 이끌어가려는 지자체 담당자의 눈물겨운 노력이 느껴진다. 김혼비 작가의 맹활약이 돋보이는 전북 완주의 완주 와일드푸드 축제 편은 작가 부부의 너무나도 상반된, 그래서 웃을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자칫 시시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지역 축제에 대한 내용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 김혼비, 박태하 두 작가의 위트 넘치는 필체 때문일 것이다. 마치 직접 축제에 참여한 것처럼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지는 것은 물론, 두 작가 특유의 말맛으로 독자들을 웃기고 울린다. 그렇게 작가들의 이야기에 빠져서 읽다 보면 어느새 이색 지역 축제를 검색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다시 산다면, 아니 앞으로 남은 인생이라도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고문 따위 붙들지 말아야지. 아이슬란드 사람들처럼 ‘내일’, ‘다음’ 따위의 단어도 버려야지. 수시로 땅속에서 불이 솟구쳐 오르고 땅이 뒤흔들리고 뒤집히는 걸 보며 사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겐 ‘지금’이 중요하지 ‘내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중략) 나도 어떤 먼 계획이나 거창한 목적 따위 없이, 그때그때 단기 계획을 세우며 나 좋을 대로 내키는 대로 여행하듯이 살아야지. 순간순간 잘 놀아야지. 뭐가 되려고 아득바득 애쓰지 말고” (본문 444쪽)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꿈도 이루지 못하고 10년의 결혼생활도 종지부를 찍은 작가는 ‘내 인생은 실패했다’라는 절망감을 안고 쉰셋의 나이에 아이슬란드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단돈 300만 원으로 혼자 71일간의 히치하이킹 여행을 이어간다.
아이슬란드를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는 에릭 와이너의 ≪행복의 지도≫속 한 문장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실패가 낙인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를 오히려 찬양하죠.’ 이 문장을 읽고 눈이 번쩍 떠진 작가는 아이슬란드 책, 영화, 다큐멘터리, 음악을 모조리 읽고 보고 들으며 본격적으로 여행 준비를 시작한다.
작가는 71일 동안 캠핑, 트레킹, 하이킹으로 아이슬란드 전역을 돌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대자연의 기이한 광경 속에서 전에 느껴본 적 없던 감정을 얻기도 한다. 아이슬란드의 신비롭고 환상적인 여행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이 여행을 통해서 삶이 무엇인지,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실패했다는 절망감을 안고 떠난 여행에서 자신의 인생이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과정이 더 생생하게 와닿는다. 자칫 무모해 보이지만 묘한 매력을 풍기는 강은경 작가의 좌충우돌 아이슬란드 여행기를 통해 ‘지금’과 ‘오늘’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글 최유진(동탄복합문화센터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