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인의 대답

화성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떤 공간에 이끌리나요?”

사람들 누구나 마음속에 품어 놓은 공간들이 있다.
일상에 활기를 더하고 싶을 때 찾는 곳,
힘이 축 처지는 어느 날 마음속 위안을 얻고 싶을 때 찾는 곳,
고민에 둘러싸여 생각이 필요할 때 찾는 곳 등 다양한 공간이 있을 것이다.
화성인은 어떤 공간을 좋아하는지,
그 공간의 특징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강보민 | 대학생
감각을 일깨우는 공간

내 숨이 가득 찬 자취방엔 과거와 현재가 뒤엉켜 있다. 난 집에서 숨을 자주 쉰다. 나의 체온이 묻은 날숨을 뱉고 편안함을 들이마신다. 공기의 흐름을 느끼며 공간을 둘러본다. 침대 머리맡 바로 위 창문에는 시끄럽지만, 정감이 가는 참새 소리와 묘한 구름이 흘러내리고, 싱크대 위에는 인센스 스틱이 몽롱하게 울렁울렁 연기를 피운다. 희멀건 벽에는 친구들의 사진과 네모난 TV가 우뚝 서 있다. 과거의 시간은 소유한 물건으로 치환되었고 그들은 과거를 견뎌내 현재에 존재하여 나의 감각을 일깨운다. 나만의 이 공간은 시간을 거쳐 나를 통해 모든 게 연결된다. 이 공간의 주인은 나라고 부르짖는다. 나 자체가 된 공간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어 낸다. 친구와의 정겨운 만남, 새로운 공부의 시작, 계속되는 삶의 출발점. 이 모든 것은 사유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미래를 생각게 한다. 미래가 피어나는 공간, 내 작은 집.

문혜순 | 가든블런티어, 원예생활복지사
순수했던 우리들의 공간

누구나 즐겨 찾는 단골 카페가 한 곳은 있을 것이다. 캐리의 집 여주인은 바느질하고 책을 사서 모으고, 담과 간판을 색칠하고 꽃나무를 키운다. 붉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붉은 포인세티아가 반기고 낡은 타자기와 노트와 나무 도장, 단단하고 큰 10년은 되어 보이는 큰 테이블과 의자가 보인다. 팔월의 토요일 오후, 꽃에 물 주러 나왔다는 그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샀다. 내심 미안한 마음에 카페 실내 말고,
그녀의 정원 의자에 앉아 천천히 바람을 기다리며 마신다. 나는 화려한 간판 아래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카페나 공간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나처럼 중년을 바쁘게 사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공간은 어떤 곳일까? 일부러 찾아가더라도 천천히 생각하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 어쩌면 혼자 가도 되고 적절히 눈에 띄는 공간, 단순해 보이지만, 다양한 최신 기능들이 곳곳에서 나를 자극하는 공간, 생각이 많아 보이는 젊은이들도 간간이 마주치는 공간
집주인의 취미에 관심이 가는 공간이면 좋겠다.

김명은 | 주부
나만의 작은 쉼터

다른 사람들이 보면 불쌍하다 여길 수도 있겠지만, 우리 집 ㄱ자로 된 주방 싱크대 가장 안쪽이 나의 작은 쉼터이다. 아직 아이가 어려서 집 안 구석구석 여기저기 한참을 돌아다니는데, 아이가 낮잠을 자거나 남편이 돌볼 때 저만의 작은 쉼터에 웅크리고 앉으면 세상 편안하다. 구독하는 웹툰에서도 작가의 일상 쉼터가 나와 같은 곳이어서 너무나 반갑고 공감되었다. 가족 모두가 잠들거나 외출했을 때, ㄱ자 공간 싱크대 발 매트에 기대어 앉아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한숨 돌리면 또 일상을 살아낼 에너지를 얻는다.

선우 | 프리랜서
내게 힘을 주는 리추얼

마음의 중심을 놓아버렸을 때가 있었다. 살아지는 대로 살고,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며 당장의 욕구들을 충족시켰다. 막된 인간. 기계처럼 학습된 일상이 하루하루를 기어코 살아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사방에 흩뿌려져 달아나려는 나를 잡기 위해 안식을 주는 바닷가를 찾았고 인근 서점에서 친구가 되어줄 책 하나를 골랐다. 한없이 넓고 큰 바다를 마주하며 깊은 물이 선사하는 정온한 안락함에 기대 책을 폈다. 머릿속이 개운해지고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뒤돌아보지마’ 늘 그랬듯 책은 나에게 답을 알려주었다. 커피 한 모금에 문장 한 줄, 풍경에 눈길 한 번. 온 세상의 파랑이 한데 모인 바닷가의 여유로움에 취했던 행복한 기억이다. 나를 위한 시간을 선물한다는 것. 나를 품어주는 바다가 내게 그런 공간이다. 바다에서의 시간은 이제껏 잘 살아왔지만, 더 잘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안긴다.

차지은 | 직장인
에너지를 채우는 공간

갑자기 우울해진 어느 날 저녁, 집 안에서만 웅크리고 있다가 산책을 나섰다. 집 근처 치동천 산책로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사 온 후 2년 만에 처음 걸어보잔 생각을 하게 됐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사람이 너무 없어 무서우면 어쩌나, 겁이 많았던 내가 놀랐던 건 혼자 온 사람들도, 여러 나이대의 가족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길을 따라 옆엔 풀과 함께 아주 얕지만 물이 흐르고, 이어폰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힘차게 걷다 보니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생기가 돌았다. 특히 많은 사람이 걷고, 뛰고 운동하는 모습을 보며 ‘세상에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구나.’ 각성(?)의 계기도, 다시 힘을 가지고 살아갈 의지도 갖게 됐다. 마음이 힘들 때면 나는 많은 사람이 열심히 살고 있네, 생각하게 만드는 산책로와 도서관 등을 찾는다. 사람들의 생기와 열정이 나에게 다시 에너지를 채워주는 것은 아닐까? 이런 공간이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다.

조정애 | 심휴도자기공방 운영
자연과 함께 삶의 길을 찾아서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크고 작은 고난의 시기가 찾아온다고 한다. 나 역시 절망과 동시에 희망을 앗아간 심신의 고통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스스로 고립과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그럴 때 희망의 근거가 되어주는 곳이 ‘심휴공간’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잊어버린다. 대문을 열면 하늘과 땅은 모두 내 것이 된다. 연초록 잔디와 아담한 집.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푸른 숲과 초록초록한 들판, 그리고 푸른 하늘의 뭉게구름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오른다. 때가 되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모습을 보면 생명의 소중함과 노동과 힐링, 그 어디에서 흘리는 땀방울로 가족들의 입이 즐거운 것은 보람이다.
저녁이 되면 아궁이에 이글거리는 붉은 불빛과 밤하늘의 초승달이 산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좋아하는 노래 가사에 마음을 기대어 희망의 근거를 찾아본다. 그러다 밤이 되면 흙 친구와 요리조리 모양 만들기 삼매경에 빠져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어가고 마음의 생채기도 녹아내리는 마음의 휴식처다.
오늘 하루를 잘 살면 분명 내일은 좋아질 것이다. 간혹 우리는 다양한 심적 고통으로 억울한 누명이나 명예의 상실로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없을 때, 사람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고립되고, 고립을 느끼는 순간 절망이 커지고 그러다 극도의 정신적 괴로움에 소멸을 생각하기도 한다.
소멸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심휴공간을 떠올린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관계의 선이 되어 함께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공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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