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인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동심은 안녕하신가요?”
매일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바뀌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어른이 되면 간호사가 되어야지! 유치원 선생님이 될 거야! 가수가 되어야지! 하며 학교에 갔다 오면 매일 꿈이 바뀌었다. 엄마는 매일 매일 새로운 꿈을 꾸는 나를 보며 “좋겠다. 상희는….” 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서른여덟 살이 된 지금 여섯 살 딸을 키우고 있는데 아이는 매일 재미있는 꿈을 꾸며 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보니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호기심도 많고, 흥도 많고, 눈물도 많았던 어린 날의 내가 어느새 그런 딸을 보살피는 엄마가 되어 가고 있다.
내게는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아주 어릴 때부터 남동생을 돌보았다. 어느 더운 여름날, 부모님이 일하러 가시고 안 계실 때 동생이 달콤한 음료수가 먹고 싶다고 했다. 돈의 개념도 잘 모르는 어린 누나였던 나는 동생에게 어떻게든 음료수를 주고 싶었다. 음료수가 먹고 싶다며 우는 동생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을 때, 집 안 구석에 놓여있던 몇 개의 사탕이 눈에 들어왔다. 동생을 달래며 사탕
몇 개를 손에 쥐고, 살고 있던 다세대 주택 옥상 위로 올라갔다. 돗자리에 고추를 말리듯, 사탕을 햇볕에 녹여서 물에 타서 음료수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동생은 울다 지쳐 잠들고 옥상에 쪼그리고 앉아 사탕이 녹기만을 애태워 기다렸던 어린 누나의 마음이 생각난다. 결국 음료수를 못 만들어줘서 속상한 마음에, 집에 오신 엄마를 보자마자 참 많이 울었다.
아이와 함께 전쟁 같은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 때 항상 잔잔한 동요나 자장가를 들려준다. 어떤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를 들었던 장소와 분위기, 그 느낌이 생생하게 기억 날 때가 있다. 아이를 재우며 함께 듣는 동요들은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늘 생각하게 만든다. 흘러나오는 노래 중에는 초등학생 시절 동요대회에 나가려고 열심히 연습했던 동요가 있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가사를 개사해 불렀던 동요, 어린 마음에도 가사가 예뻐 흥얼거리며 공책에 써보던 동요들이 있었다. 그런 동요들을 들으며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잠시나마 그때의 즐거웠던 상상을 하게 된다. 마냥 행복했던 그때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아이와 동요를 들을 때마다 회상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어릴 때부터 뛰어놀고 운동하기보다는, 책을 읽거나 여기저기 걸어다니는 정적인 놀이를 자주 했다. 어느덧 30대의 절반을 넘어섰고 퇴근 후 가끔 아내와 먹는 술 한 잔과 곁들이는 대화로 사는 재미를 느낀다. 혼자 있는 날에는 콘솔 게임기만 붙잡고 있다. 부부의 취미가 달라서 한 명은 항상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고 새로운 취미를 만들기로 (일방적) 합의하고 캠핑을 시작했다. 장비도 사고 놀러 갈 캠핑장도 고른 후 몇 번 다녀보니 깨달았다. 주변에서 비싼 돈 주고 노숙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결국 성인용 소꿉놀이라는 것을. 집을 짓고 침실에 주방을 꾸미면 거실은 캠핑장 전체가 된다.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하는 소꿉놀이와 같았다. 솔직히 캠핑장에 가면 힘들다. 하룻밤 자고 오면 집 짓느라 들인 고생에 몸이 쑤시기도 하고,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사서 해놓고 집에 와서 짐 정리도 해야 한다. 집에 와서 침대에 누우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아늑하고, 따듯하며 푹신하다. 그 고생에도 다음엔 어디를 갈지 생각한다. 산으로 갈지 호수로 갈지 고민부터 어떤 요리를 먹을지, 집을 어떻게 지을지 즐겁게 고민하면서 짐을 싼다. 가는 길이 힘들지도 않고 도착하면 주변 자연환경을 조망한다. 한여름의 계곡은 시원하고 허리 높이의 물에 들어가서 튜브를 타고 둥둥 떠 있기만 해도 좋다. 한겨울의 눈 덮인 충주호는 조용하게 눈 밟는 소리만 들려오고, 녹은 눈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뒤꿈치로 얼음을 깨부수는 쾌감도 있다. 고즈넉한 밤에는 나무 장작으로 불장난을 한다. 이번 겨울에는 어디로 소꿉놀이를 가볼까?
여자아이들이라면 대부분 그렇지만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인형을 정말 좋아했다. 특히 나의 애착 인형은 ‘똘똘이’였다. 자신도 아기면서 아기 인형을 들고 어딜 가든 안고 다녔다. 딸이 좋아하는 건 다 사주시는 아빠 덕에 인형 전용 유모차도 사서 밀고 다니고, 포대기도 싸서 업고 다니기도 했다. 재주 좋은 우리 엄마는 한복까지 만들어주셨다. 성인이 되고도 유아기적 취향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어딜 가도 귀여운 인형만 보면 못 참고 구매하곤 한다. ‘베이비돌’이라는 공주 캐릭터의 두 인형은 결국 내 신혼집까지 따라와 계절마다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다. 심심할 때마다 어떻게 꾸며줄까 고민하고 옷도 직접 만들다 보면 하루가 후딱 간다. 서른 살의 내가 세 살 때의 나보다 더 거창한 인형 놀이를 하게 될 줄이야!
40대인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에게 국민학교 시절 하굣길을 떠올려보라고 질문한다면? 아마도 학교 앞에서 파는 노란 병아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 같다. 나 또한 남동생 손을 잡고 하교하던 길에 한참을 넋을 놓고 병아리를 바라보았다. 병아리 아저씨 눈을 피해 작은 병아리를 쓰다듬고 싶어 손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는데 “만지면 사가야 해”라는 불호령에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하지만 가는 길에도 시선은 병아리에 가 있었다. 동생의 손을 꼭 쥐며 오늘은 엄마한테 병아리 키우고 싶다고 말하기로 다짐했지만 우린 누구보다 잘 안다. 셋방살이하면서 병아리를 키울 공간도 없고 엄마는 동물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다음날도 열심히 ‘삐약’거리며 우리를 불러대는 병아리들. 한 친구가 의기양양 투명 비닐봉지에 병아리를 담아간다. 그때 무슨 자신감인지 나는 주머니 속 동전을 과감히 내밀었다. 동생이 누나를 부르며 제지하는 손짓에도 나는 아저씨에게 보란 듯이 돈을 내밀었다. 아저씨는 ‘너도 걸려들었구나’ 하는 눈빛으로 봉지에 병아리를 담으시며 “집에 가서 엄마가 물러오라고 해도 안 된다”라는 다짐까지 받아냈다. 그때부터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지만, 봉지 속에서 들려오는 ‘삐약’ 소리가 마치 응원가인 듯 용기를 주었다. 집에 가자 엄마는 눈이 커지시고는 “어쩌자고….” 하시며 조용히 박스로 병아리 집을 만들어주셨다. 그날 저녁 아빠는 “약한 애들이니까 죽으면 다신 키우지 말자”라고만 하시곤 물과 밥 주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친구들 사이에서 병아리 아저씨가 파는 병아리는 며칠 만에 다 죽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집 삐약이는 크지도 않고 잘 있다고 하니 한 친구가 지금쯤 커야 하고 안 죽은 것도 이상하다며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나는 분하고 답답한 마음에 우리 집에 가보자고 했고 같이 가서 본 친구들도 의아해했다. 진짜 병아리 크기 그대로 삐약이가 살아있으니 말이다. 며칠 뒤 삐약이는 우주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사 온 삐약이는 이틀 만에 죽었고 엄마가 우리 몰래 학교 앞에 가서 병아리를 6번이나 사서 집에 둔 것이다. 지금도 귀엽고 작은 강아지조차 싫어하는 친정엄마가 그 시절 병아리를 투명 봉지에 담아서 오실 때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한없이 미안하다. 나와 동생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한 엄마의 마음이 한없이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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