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문화 트렌드의 핵심 ‘물성’
인공지능, 메타버스, 가상현실 등 디지털 세계가 지배적인 요즘, 우리는 역설적으로 ‘물성’의 가치에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있다. 첨단기술이 확장될수록 현실 세계에 대한 갈증, 특히 ‘만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물성매력’은 문화 소비자들을 사로잡는 강력한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글. 이혜원 박사(트렌드코리아 2025 공저자 /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
물성매력이란 특정 대상에 경험 가능한 물리적 속성, 즉 ‘물성(materiality, 物性)’을 부여하여 소비자의 오감을 자극하고 감성적인 만족을 선사하는 것이다. 물성은 사전적으로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뜻한다. 따라서 손에 잡히는 ‘물질’들만 가질 수 있는 속성이다. 그러나 단순히 제품의 물리적인 특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고 듣는 것을 넘어 직접 만지고 느끼며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여러 감각을 자극하여 경험의 풍부성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물성매력의 핵심이다.
아이들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더럽든 위험하든 개의치 않고 무엇 이든 만지고, 냄새 맡고, 심지어 입에 넣어 보기도 한다. 이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다. 아이들은 오감을 통해 세상을 탐험하고 인지하며 학습하는 것이다. 즉, ‘만지고 느끼려는 욕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물리적인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살아왔다. 호모 사피엔스가 걷고, 달리고, 춤추며 세상을 경험해 온 시간은 1만 년이 넘는다. 하지만 디지털 세계를 접한 것은 불과 몇십 년 사이에 불과하다. 최근에 갑작 스레 너무나 개념이 많아진 것이다. 뭐든지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다보니 분명 눈이 휘둥그레지는 기술적 결과물 앞에서도 일종의 피곤함을 느낀다. 자극이 뇌를 활성화시키기보다 뇌를 지치게 하기까지 한다.
이럴 때 자극이 하나라도 더 추가되면, 우리는 입체적인 감정을 느낀다. 눈으로 보이는 것과 귀로 들리는 것, 거기에 냄새와 만지는 것까지가 일치가 될 때, 즉 다중감각의 충족은 만족으로 이어진다.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감각이 살아나 본능적으로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성매력은 특히 문화 콘텐츠 분야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단순히 보고 듣는 것을 넘어, 만지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들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K-팝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인 ‘버추얼 아이돌’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버추얼 아이돌은 그림, 애니메이션, 그래픽 등으로 표현된 캐릭터로, 가상 공간에서 활동하는 아이돌을 말한다. 하지만 버추얼 아이돌은 물리적인 실체가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팬들은 화면 속 아이돌을 보고 들을 수는 있지만, 직접 만나거나 소통할 수는 없다.
버추얼 아이돌 그룹 ‘플레이브’가 개최한 팬미팅 팝업스토어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물성매력을 활용했다. ‘플레이브’는 2024년 혜성처럼 등장하여 각종 음원 차트와 가요 프로그램 에서 1위를 석권하며 돌풍을 일으키며 Z세대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그룹이다. 이 팬미팅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끈 것은 바로 ‘프로토 홀로그램’ 부스였다. 실시간 홀로그램 기술을 활용하여 팬들이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플레이브 멤버와 사진이나 영상을 찍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진만 보면 아이돌 멤버들과 팬들이 실제로 함께 서서 촬영 한 듯 보일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팬들은 스크린 속에서만 존재하던 아이돌을 현실에서 만나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이처럼 물성매력을 통해 버추얼 아이돌은 가상 세계를 넘어 현실 세계로 그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
VR 기술을 활용하여 가상 세계를 현실처럼 체험할 수 있는 테마파크도 등장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은 2024년 7월, 인기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을 테마로 한 몰입형 놀이기구 어트랙션을 선보였다. 탑승객들은 VR 기기를 착용하고 애니메이션 속 세계를 탐험하며 질주감, 중력, 바람 등을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다. 또한,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티브로 한 팝콘 버킷을 판매하여 미각적인 경험까지 더했다. 2차원에 존재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은, 이처럼 시각, 청각, 촉각, 미각을 모두 활용하여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여준 것이다.
영화 속 세상도 현실에 나타난다. 2024년 초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파묘’는 팝업 스토어를 통해 물성매력을 선보였다. 영화 속 주요 배경인 ‘무덤’을 실제 젖은 흙과 풀로 만들어 전시장에 그대로 재현하고, 음산한 분위기까지 연출했다. 관객은 영화 초반에 네 명의 주인공이 묫자리를 보러 산에 올라가는 행동과 그때의 냄새, 걸음의 촉감, 그로 인한 감정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는 삽을 이용해 흙도 파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영화를 온 몸으로 감상하며 몰입도 를 높일 수 있었다.
이처럼 물성매력은 문화 콘텐츠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관객들 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사물의 소멸>에서 철학자 한병철은 지금의 시대를 현대인이 사물의 시대에서 반사물, 즉 정보의 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 라고 규정한다. 디지털 질서는 세계를 정보화하며, 사물이 아니라 정보가 생활세계를 규정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가상이 실재를 호령하고, 기술이 인간보다 더 정교한 대답을 내놓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물성은 여전히 힘을 갖고 있다.
책을 읽지 않는 세대가 늘어나면서 도서 산업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정작 서울국제도서전에는 15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록 음악은 사양길을 걷고 있지만, 록 페스티벌은 젊은이들로 가득 하다. 클래식은 죽었다고 하지만, 조성진, 임윤찬 같은 젊은 연주자들의 공연은 매진 행렬을 이어간다.
이러한 역설에 대해 조선일보 김성현 문화전문기자가 지적한 바는 흥미롭다. 소비자들이 문화를 향유함에 있어 이제는 ‘소유’보다는 ‘체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졌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책을 소유하는 것보다 도서전이라는 공간에서 다양한 책과 작가를 만나고 경험하는 것을 선호한다. 음반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록 페스티벌이나 클래식 공연 현장에서 직접 음악을 느끼고 즐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이 시대 문화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바이다.
결국 물성매력은 디지털 시대에 물리적 실체에 대한 갈망을 반영하며, 즉 본질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가상 세계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인간은 현실 세계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존재 이므로, 물성매력은 현실 세계와의 접점을 제공하고, 인간의 감각을 깨우며, 풍부한 경험을 선사한다. 물성매력은 디지털과 AI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에서 ‘물리적 실체’를 갈망하는 본능 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 가상 세계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현실 세계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우리는 현실 세계의 다양한 자극을 통해 감각을 깨우고, 감정을 느끼고, 경험을 쌓아 나간다.
문화에 있어서 소비자들의 요구는 분명하다. ‘새로움’을 느끼고 싶다. 이때의 새로움은 주제나 방식도 물론 있지만, 감각적 측면에서도 얼마나 실감 나게 물성을 추가해줄 것인가도 포함 된다. 문화예술에 있어 작품을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해당 작품을, 작품의 의도를, 작품의 저작자를 관객이 다중감각 으로 느끼게 해줄 때 관객은 작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중요 하게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 물성매력을 활용한 더욱 다양하고 창의적인 시도로 인한 전에 없던 문화 트렌드가 대두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