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채우는 소비

홍화정의 에세이 툰

삶을 채우는
소비

글·그림 홍화정

사실 20대까지만 해도 물건으로 남는 게 없다면
돈 쓰기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절이 지나 만난 사람들은 믿지 않을 얘기겠지요. 후후…)
통장도 마음도 가난해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만 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간혹 필수품도 아닌데 그저 갖고 싶단 욕망만으로 산 물건을 손에 쥐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만질 수도, 보관할 수도, 몸에 걸칠 수도 없는 경험에 돈을 쓴다는 건,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나 하는 사치라며 눈을 흘기곤 했습니다.
마음에 이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마저 편협해지는 것도 모르고 말이지요.

그즈음 빠듯하게 돈을 모아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우연한 기회로 연극도 관람하고, 여러 전시도 보러 다녔습니다.
그 당시엔 ‘좋긴 한데… 그래도 돈 아깝긴 하다…’며 찜찜했어요.
그로부터 한참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순간의 경험에 돈을 쓰는지, 세상과 타인을 보는 제 시선은 얼마나 편협했는지요.
어제나 오늘이나 다를 것 없는 침전된 일상에서
지난 경험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 떠올라 어제와는 조금 다른 오늘이 되더라고요.
경험이란 오히려 형태가 없어서 내 마음대로 변형되어
더 선명하고 짙게 남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먼지도 쌓이지 않고, 낡지도 않으며,
언제 어디서든 꺼내 볼 수도 있고요.

힘들게 모은 돈으로 고민 끝에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
언제 또 여길 올 수 있겠냐는 강박 때문에 참 바쁘게도 돌아다녔습니다.
국제학생증을 사용할 기회기도 해서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도 갔었지요.
짧은 일정에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몸이 성할 리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가 그렇게 좋았다던데,
이건 꼭 봐야 한다던데… 나는 왜 별 감흥이 없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반쯤 감긴 눈으로 느적느적 걷고 있던 그때,
코너를 돌아 시선을 돌린 곳에 반 고흐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원작이 걸려 있었습니다.

홀린 듯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두터운 물감 위로 미세한 붓질 자국까지 느껴졌어요.
어두운 강물과 물결에 실려 흐르는 가로등 빛, 또 그보다 밝은 빛으로 수놓은 밤하늘 별.
이 그림을 그리며 고흐는 어떤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쩌다 이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자 다짐했을까 작품으로만 남은 그를 헤아리느라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작품에 매료되었던 것이지요.
파리 미술관의 많은 작품 중 모네의 <수련 연작>,
마티스의 <오렌지가 있는 누드> 앞에서도 꽤 긴 시간을 서 있었습니다.
 ‛왜 누군가는 그림 앞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할까’ 이해하지 못했던 세계가
저에게도 열린 것이지요.

글을 쓰다 보니 한여름 서유럽, 긴장한 손으로 배낭끈을 쥐고 땀에 젖어 다니던 고생길이
지금은 반짝반짝하고 청명한 추억으로 남아있음을 떠올립니다.
숙박비와 식비를 줄인 돈으로 기념품을 사야 한다며 이것저것 사 왔던 것 같은데,
무엇을 샀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여행을 대표할 만한 물건을 사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던
제 모습은 서툴러서 귀여웠던 20대 초반의 친구로 남아있고요.

올해 봄,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장을 보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이 가로등에 달린 현수막을 가리키며
“와, 이번에 마술쇼 하네!” 흥분하는 게 아닐까요.
“아니, 나이가 몇인데 무슨 마술쇼야~” 몰랐던 남편의 관심사에 놀랍고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은 어릴 때부터 마술쇼를 보는 게 소원이었다 하더라고요.
저기 가면 다 어린이들밖에 없을 거다,
우리 나이대는 다 보호자뿐이라며 핀잔줬지만,
그날 밤 저는 몰래 마술쇼 티켓 두 장을 예매했습니다.

며칠 후 티켓이 도착해 남편에게 별거 아니란 듯이 건네줬을 때,
커졌던 그의 눈과 콧구멍까지 기억나요.
그 시기 남편에게 악재가 겹쳐 힘들어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는데,
오랜만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기도 했고요.

대망의 공연 날, 역시 저희 주변엔 어린이들이 가득했습니다.
두 눈을 반짝이는 남편과 달리 저는 별다른 감흥 없이
공연 막이 오르는 것을 보았지요. (잠시 큰아들이 생긴 기분이었달까요.)
그렇게 공연이 시작되고… 저는 공연 내내 입도 다물지 못한 채 온갖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어린이들이나 보는 공연이라 말한 과거의 저를 쥐어박아도 모자랄 판이었어요.
마술의 세계는 얼마나 환상적이던지요!
혼자였다면 절대 올 리가 없는 마술쇼지만, 남편 덕분에
또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즐거워하던 남편을 볼 수 있어 정말 기뻤습니다.
휴대폰 촬영 금지라 마술 하나하나 자세히 기억할 순 없겠지만,
남편의 행복한 표정과 리모컨으로 차문을 여는 것조차 마술인 마냥 오두방정 떨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은 영상 없이도 선명히 남아있을 테지요

<화분> Vol.69